낙원의 저쪽(하) - 백휴 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 소개 제2부 죽음 3. 주사파(主思波), 표영표 4. 오렌지족, 윤애라 5. 회화를 통한 치료 6. 살인광의 전력(前歷) 7. 탐색의 기록들 8. 소동 9. 권태와 불나방 10. 이상한 증발의 귀결 11. 에필로그 작가 소개 - 1984년 서강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86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수료 - 현재 추리작가협회 회원 - 지은 책으로는 장편추리소설로 <사프의 비밀> <장미 벼랑에 서다> 단편추리소설로 <잃어버린 시간>외 <초상화를 그리는 남자>외 등이 있다. 3. 주사파(主思派), 표영표(表泳杓) 두 번째 내 집의 식객이 된 편집광 환자는 자칭 김일성을 신봉하는 주체사상파(主體思想派)로, 군에 다녀와 B대학 2학년에 복학중인 가난한 대학생 신분의 빼빼마른 청년이었다. 내가 그 청년을 만난 것은 미술사 자료 수집을 겸해 머리도 식힐 겸 서초동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던 어느 날 지하식당에서였다. 나는 다소 늦은 시각 단무지 밑반찬에 희멀건한 카레라이스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는데, 나중에 내 앞자리에 다가와 앉아 도시락을 펼친 그가 싱거울 거라며 열무김치를 권해왔다. 나는 식사가 끝난 다음 그 보답으로 휴게실에서 커피를 샀고,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를 가질 수가 있었다. 대화를 나눈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청년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았다. 흔히 시체말로 청년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성토하는 데 게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렇듯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교육을 통한 양심적인 정서의 함양으론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는 혁명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일시에 난장판을 뒤집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개혁은 불가능합니다. 기득권자들이 농어민과 도시 근로 노동자들에게 수탈한 재산을 순수히 내놓을 것 같습니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지요.} {빈부의 격차가 현저하다는 바로 그 점이 우리민족의 단합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을 나도 인정합니다. 허지만 반드시 혁명을 해야 사회가 개혁될까요? 개량주의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을 무조건 보수주의자들과의 야합이니 결탁이니 하는 시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특별히 의식하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온건한 개혁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게 왜 야합이 아닙니까? 번연히 존재하는 모순과 타락을 보고도 외면하는 게 좋지 못한 목적으로 한데 어울리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외면하는 게 아니지요. 방법상의 절차를 말하는 것이지요. 무조건 뒤집어 엎는 것이 다음 세대의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건 사회를 도통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과연 현시점에서 우리나라에 개량주의적 노동운동이 관철될 수 있는 입지조건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나요? 미안한 얘기지만 아직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디 자발적인 노동운동이 허용되지 못한 것만 아쉽겠습니까? 자유민주적 제반원칙이 튼튼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고 거기다가 국가권력은 어떻습니까? 재벌이라든가 군부에 의해 항상 침식을 받고 있잖습니까?} 이런 논란의 핵심은 뻔했다. 개량주의인가 혁명주의인가, 또는 칼 포퍼식인가 허버트 마르쿠제식인가의 선택이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양자의 논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둘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그런 만큼 두 논리는 팽팽히 맞설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은 논자를 피곤하게 만들뿐이다. 마치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맞서듯. 하지만 이상(理想)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논쟁의 괴로움을 비켜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당신은 우리 체제가 사회주의로 개혁이 되길 바라는 거군요?} 나는 피차간에 입장이 수그러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굳이 대화를 회피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핍박받는 기층민중이 해방될 날을 기대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동구 제국가들이 무너졌고 그들의 종주국이었던 소련마저 공산주의를 내던지지 않았습니까?} {현존 사회주의가 패배했다고 해서 사회주의의 깃발이 내려지는 건 아닙니다. 사회주의 이상은 영원불멸한 겁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된 이상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다고 해서 현실의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동구와 소련의 몰락은 적어도 현실의 국가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선진자본주의가 현존 사회주의에 대해서 승리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내가 '적어도'라고 말한 것은 논자에 따라서는 주류경제학의 성과를 그대로 수용한 자본주의가 이론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사회주의에 완전히 승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겐 허울좋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네요. 미국이 소련에 이긴 게 뭐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합니까? 미국식 자본주의가 소련식 사회주의에 승리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타락, 빈곤과 핍박을 없애준답디까?} {영표씨는 지금 개념상의 혼동을 초래하고 있어요. 난 당신과 체제 논쟁을 해왔습니다. 물론 미국이 이기든 소련이 이기든 우리 사회의 환부가 하등 치유될 기미가 없다면 그들의 변화는 우리완 무관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미래가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선진국이 받아들인 체제간의 우열이 어찌 참고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체제상의 우열이야말로 80년대 초 급진적 사회주의 옹호자들이남한과 일본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비난하며 평등이 실현된 중공의 사회체제를 그토록 찬양해 마지 않던 판단 근거가 아니었습니까? 놀랍게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자 아무도 더 이상 중공을 찬양하지 않더군요.} {전 당신이 그런 켸켸묵은 과거를 들춰내어 뭘 말하려는 건지 통 모르겠군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민주화의 투사였던 운동권 학생들이 왜 80년대 초에 중공 사회의 경직성과 반민주성을 내다보지 못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 문젠 일견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기실은 우리 지식인군(知識人群)의 감정주의의 맹점과 비판적 사고의 결여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심정적으론 동정과 공감이 가는 대목이 없지 않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당시 광주 민주항쟁이 있었고 뒤 이어 사악한 5공 정권이 들어섰으니 군부와 재벌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절름발이 자본주의에 염증을 느낄만도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학생들이 암암리에 민중을 탄압하고 있었던 중국 공산정권을 찬양했다는 것은 그들 정신의 미숙성을 노출한 증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겁니다.} {좋습니다. 뭐 좋아요. 그런 문제로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요는 우리 사회의 계급갈등이지요. 당신은 우리사회의 계급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점은 인정합니다만......} {아, 잠깐만요.} 청년은 성급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전 당신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 갈등을 대화로 해소해 보자는 것이겠지요.} {그래요.} 청년은 그 말을 듣자 경멸하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유치하고 무책임한 발상이군요. 말이 좋아 대화와 타협이지, 그게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언제나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내놓을 생각은 쥐뿔도 없으면서 그런 사탕발림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뒤에선 권력과 결탁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게 기득권자들의 벗어던질 수 없는 습관 아니었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을 생각이군요.} {피차일반이지요. 허나 한 가지 구별은 분명히 해둬야 합니다. 당신은 반민주세력에 은근히 야합하고 있지만 난 민주세력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반민주세력이라구요?} {아니면 뭡니까?} {이제 먹혀들지도 않을 그 흑백논리는 그만 집어치우세요. 사회의 모든 분야는 다양화의 첨단을 걷는데 유독 정치 분야만 아직 그 지긋지긋한 이분법이 상존하고 있어요.} {아니죠. 사회현상이란 그렇게 엉뚱한 경우란 없는 법입니다. 정치에 흑백논리가 통하는 이유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만큼 정치가 후진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또 혁명이 아닌 방법을 주장한다고 해서 기득권자들에 무조건 동조하는 세력이라는 비난은 온당치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조잡한 인식은 결국 우리 사회의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당신은 역사의식이 부족해서 우리네 심정을 몰라요.} 청년은 더 이상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약간 아리송한 말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열람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정도의 선에서 우리의 첫만남은 상호불신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은 셈인데, 그 청년도 내가 답답했겠지만 나 또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가 가장 아쉬웠던 점은 P와 ~P가 같다는 논리적 모순은 아니지만, 준모순적(準矛盾的)인 청년의 발상법이었다. 그는 동구 공산국가와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사회주의 이상의 깃발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고 자유라는 기치 아래 평등의 가치가 말살되고 부의 분배가 이뤄지지 않고 황금만능주의가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 그 말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청년의 준모순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 있다. 굳이 따져들지는 않았지만, 동구 제국과 소련이 건재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짐작은 어렵지 않다. 그땐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보시오! 더 이상 핍박이나 억압이 없는 완전한 평등이 실현되었잖소. 그에 비해 우리의 체제는 얼마나 오염되고 부도덕하고 왜소합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사회주의 국가 만세!' 내가 당혹감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대목이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건 하지 않건 청년의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준모순적인 태도가 그의 이론체계에 결함이 있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이다. 청년은 자본을 독점하려는 독점자본주의자처럼 진리를 독점하려는 진리독점주의자이다. 현실의 변화가 신념에 하등 영향력을 줄 수 없다는 것이 그점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신념이 광신 같아 보이는 까닭은 바로 그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 주체사상을 들고나왔을 때는 대체 원하는 바가 뭔지 머리 속이 온통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며칠 후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역시 서초 도서관 휴게실이었는데, 이번에 내가 접근해서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처음엔 별로 탐탁치않은 반응을 보였으나 대화가 진전되자 곧 반감어린 표정을 거두어들였다. 얘기 도중 그는 자신이 주사파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마치 자신만이 민족의 역사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것 같은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나는 그 당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극우의 반공이념이 절정을 이루던 냉전시대의 동물적이고 파괴적인 구호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같은 구호들이 얼마나 조작적이고 허구적이었나를 이제 누구도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우리는 김일성씨를 도깨비뿔을 단 붉은 마귀나 사악한 괴뢰의 화신쯤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를 우리와 같은 하나의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시각을 가질 때 우리는 한 때는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그의 장점을 깨닫게 되지요. 해방 후 남한에선 이승만 정권이 이룩하지 못했던 일제의 잔재 청산,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실현된 평등의 가치, 소련과 중공 사이에서 적절히 등거리 외교를 구사함으로써 동구처럼 종주국의 위성국가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점 등등---- 하지만 그를 사람으로 볼 때 그를 우상화시킨 신화 또한 여지없이 깨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없이 세워진 번쩍이는 그의 우람한 동상들, 소위 인민들의 주눅든 표정과 대비되는 그의 뻔뻔함과 거만함, 순전히 아버지의 광휘를 업고 잘난체를 하는 김정일씨, 경제도탄, 여행의 자유제한, 정보의 독점, 변화의 거부----이 모든 것이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지상천국'의 숨김없는 얼굴이라는 것에 당신은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요? 김일성 주석이 왜 독재자입니까?} {뭐라구요? 김일성씨가 독재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그의 주장에 그저 망연자실해졌다. {아니지요. 그는 인민의 대표자일 뿐입니다.} 그러며 그는 장황하게 역사발전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나중엔 북한사회구조를 인체에 비유해서 김일성 주석은 두뇌에 해당할 뿐 인민을 지배하는 독재자가 아님을 강조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요. 국가권력을 한 사람이 장악한 상태가 독재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을 독재라고 부르지요?}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면 안되지요.} {뭘 단순히 생각한다는 겁니까? 그건 개념상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개념적인 정의(定義)를 부정하면 어찌 대화가 될 수 있습니까?} {그건 사물의 한 측면만 봐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사물의 전체를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지요.} {정말 답답하군요.} {답답한 건 접니다.} {샤머니즘적 광신이라는 말을 들어봤나요?} {......} {우리 민족의 무속적인 정신의 토양이 없었다면 김일성씨는 40년 이상 독재를 누리를 행운아가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동구와 소련이 무너졌는데도 북한이 당당히 건재한 이유는 북한 정치가 잘 돌아가서가 아니라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광신이 그를 떠받쳐주기 때문이지요. 영표씨가 말하는 역사발전이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의식을 청산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요?} {듣다보니 별소릴 다 듣게 되는군요. 비아양거리는 말투를 계속 사용하신다면 대화를 사양하겠습니다.} 그는 여차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설 기세였다. 나로서도 굳이 더 대화를 나눠야할 절박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왕에 논쟁을 시작한 셈이니 어떡하든지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얘기를 좀 돌려보기로 하죠. 영표씨는 지금 사법고시 공부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로서는 그런 점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운동권 학생이 대학을 무사히 졸업해 취직을 하면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히곤 했었죠. 하물며 고시 공부라뇨!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지요. 자신만의 입신영달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 노동자를 위한다느니 민중의 삶의 대변자라느니 하고 내세우고 다니는 게 치졸스럽고 낯간지럽지 않나요?} {그건 몰이해에 불과해요. 주체사상의 대중노선은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을 더 중시해요. 제가 고시 공부를 해 검사나 판사가 되려는 것은 제 개인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일종의 애국적 사회진출이라고나 할까요. 학생운동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등식은 구식이 된 거죠.사무직은 더 이상 화이트 칼라의 안일한 삶의 터전일 수만은 없어요.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변혁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어요. 주사파의 특색에는 그것 말고도 80년대 초반의 상황과는 판이한 점이 있어요. 한 예로 연애관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운동차원의 목적 의식속에서 남녀가 만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사상이나 입장에서 차이가 나더라도 이성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되었죠.} {그건 왜 그렇죠?} {주체사상이 '한번 만난 사람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인간중심의 철학이기 때문이죠. 부연 설명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관념론과의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에 몰두하느라 자연과 사회를 변혁하는 실천에 관한 철학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데 그 공백을 김일성 주석이 메운 셈이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지만 인간의 허위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는 공통분모를 갖는 대사상가들이죠. 또한 레닌 역시 훌륭한 사상가이자 플라톤이 말한 최초의 철인정치적 인물로 손꼽힌다는 평가가 있어요. 그런 위대한 인물들과 김일성씨를 비교하다니요. 너무나 어이가 없군요. 굳이 비교해야 한다면 김일성씨는 독재자 스탈린에 가깝지 않을까요?} {김일성 주석도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린 그 분을 위대한 김일성 동지라고 부르죠.} {과연 그렇군요! 하지만 20대 초반 나는 조카들에게 나를 브룩 실즈라고 불러달라고 했었죠. 난 걔들에게 사탕도 사주고 때론 위협하면서 집안에서 브룩 실즈로 불리우는 영광을 누렸죠.당신이 보기엔 어때요? 제가 브룩 실즈로 보이지 않나요? } {빈정대지 말아요!} 청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궁지에 몰리기만 하면 대화를 회피하려 들지말고 더 들어봐요! 위대함이란 역사의 평가가 내리는 결론입니다. 물론 살아있는 동안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갖다붙인다는 것은 어딘지 공허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북한 주민 누구나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민주국가가 아닐까요? 김일성씨는 권력을 독식해 오면서 그것도 모자라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까지 혼자 차지할 셈인가요?} 나도 덩달아 흥분하고 있었다. {당신과는 얘기가 되지 않아!}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그를 붙잡아 앉힌 다음 말했다. {도망가려 하지 말아요.} {도망가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겁니다.} {감정이 상했다면 사과해요. 하지만 대체 인간중심의 철학이라는 게 뭔지 들려주기는 해야죠.} 청년은 담배를 거칠게 뽑아물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는데, 마치 자신이 크게 수모를 당한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인간중심의 철학이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상이에요.} 그는 시큰둥하나마 마침내 입을 떼었다. {그럼 영표씨는 북한 주민이 자신들의 삶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구요. 그들의 삶 즉 노동의 질(質)은 부패한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으니 그 만큼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죠.} {물론 이론적으로야 자유의 개념을 자본의 침식 정도에 의해 규정하지 말란 법은 없겠죠. 하지만 난 자유를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어요. 만일 북한 주민의 누군가가 공산주의 일당 독재에 회의가 생겨 색다른 욕구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은 그후 어떤 삶과 당면하게 되는 거죠? 반동으로 몰려 당의 성토를 받고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집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욕구에 대한 자유가 주어지는 겁니까?}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투영해 북한 주민이 어떤 욕구를 느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해요.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체가 된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모든 게 다 당의 지도이념과 김일성씨의 까딱거리는 손가락짓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주체적 삶입니까? 자본주의 세계가 다 고귀해야 할 인간의 노동에 자본을 침범시킴으로써 노동에서 소외되고 삶의 질박한 행복에서 송두리째 유리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그 대안으로 김일성씨를 들고 나올 수 있는 건가요?} {젠장! 당신 같은 극우 보수주의자와는 아무 얘기도 할 가치가 없어!} 그는 표정에 서슬이 퍼래지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담배갑을 챙겨들고 휴게실을 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제발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극우 보수주의자로 몰아붙이는 편견일랑은 떨쳐버려요!} 나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입구를 빠져나가는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논쟁이라는 것이 원래 그 성격상 반드시 타협적인 결론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지만, 하나의 사상(事象)을 바라보는 시각이 도저히 융화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엿보이지 않을 때 대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황야의 무법자 크린트 이스트우드는 화연(火煙)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총구를 후후 불며 갈등을 깨끗이 해결한다. 멸공이나 적화야욕도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총구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이런 단순한 해결책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즉각적으로 가져오지만, 그리고 아직도 골이 진 이민족간에 분쟁이 있을 때 가장 쉽게 받아들여지는 해결책이긴 하지만, 과연 동족간에 적용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6.25는 진정 비극이었다. 그렇다면 상호이질적이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간의 충돌을 해결할 방도는 없는가? 나는 이런 의문에 사로잡힐 때면 언제나 마르셀 뒤샹을 떠올린다. 모나리자의 지복한 미소위에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그려넣을 수 있는 그 놀라운 상상력! 또 어느 기발한 예술가이던가, 밀로의 비너스상에 서랍장을 만든 사람은! 상상속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은 하나의 현실로 통합된다. 우리에겐 왜 뒤샹 같은 예술가가 없었을까? 만일 1970년대에 이미 김일성과 박정희를 누드모델로, 둘 중의 하나를 섹시한 여자로 성전환시켜 한 화폭에 담았다면 통일은 80년대 중반쯤에 이뤄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장난끼어린 상상력 이전에 뒤샹이 살던 유럽문화권에선 하나 의 확고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P와 ~P가 서로 진리라고 주장될 때 P와 ~P는 결코 융합될 수 없다. P를 받아들이면 ~P를 버려야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둘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진리 자체를 포기하는 데 있다.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라는 어머니에게 진리란 아들은 고아원에나 가 있어야 할 성가신 존재다. 아들이 외출하지 않으면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다. 이제 아무도 다치지 않는 통일을 바란다면 고통을 무릅쓰고 아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아마도, 영표란 청년과의 논쟁이 생각 이상으로 나를 깊은 혼란속에 빠뜨렸던 모양이었다. 열람실에 돌아와 곰브리치의 미술사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는 끝없이 솟아나는 잡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여 3시밖에 안된 시각이었지만 일찌감치 가방을 챙겨들고 도서관을 나섰는데, 1층 로비까지 걸어나왔을 때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져 누군가가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고함으로 변해갔고 뒤이어 여러 명의 남자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호되게 다그치는 소리가 로비의 공기를 한껏 진동시켰다. 좀더 걸어나가자 경찰관 두 명이 짧은 스포츠형의 머리를 한 청년의 팔을 뒤에서 휘어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년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다친 듯 관자놀이께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반대쪽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한무더기 모여 있었고 상당한 소란이 있었던 듯 로비바닥에는 깨진 소주병과 함께 하얀 유리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씨발눔들 이거 안놓을래! 이거 놔 개새끼들아! 난 미애를 보러왔단 말야! 철원 군발이가 휴가 나와 옛애인 좀 찾아보겠다는데 못들어가게 하는 이유가 뭐냔 말야!} 청년은 술믈 꽤 마신 듯 혀가 꼬부라져 있었고 양쪽으로 단단히 잡혀 있으면서도 괴력을 발휘하며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청년은 거구였고 상대적으로 두 명의 경관은 왜소한 편이었다. 그래서 청년을 제압하는 것은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사태의 추이를 대강 짐작한 나는 금세 호기심이 시들해졌으므로 그 모든 사람들을 비켜나 그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성큼 팔짱을 껴왔다. {그냥 돌아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걸어요......놀라지 말아요. 저예요. 표영표예요.} {왜, 왜 이래요?} 나는 황급히 손을 뿌리치며 돌아다보았다. 화색을 잃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그는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릴께요.그럼 제가 옆에 바싹 붙을 테니 보조나 맞춰주세요.} 그의 목소리가 워낙 긴박감에 차 있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라 천천히 걸어 로비를 빠져나왔다. 그는 마치 수업중인 중고등학교 교실 복도를 걷는 것처럼 살금살금 뒤따라왔다. 도서관의 현관계단을 막 밟아 내려가는데 그가 팔뚝을 잡으며 옆구리 안으로 밀고들어왔다. 내가 작은 소리로 항의하자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저길 봐요! 경찰이 또 몰려오고 있어요.} 아닌게 아니라 언덕 아래에서 정복 경관 두 명이 잰걸음으로 올러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뛰다시피 걸어오고 있었다. 헌데 이 청년이 왜 이리 당황하고 있는 걸까. 나는 영문을 몰라 다그침이 섞인 물음을 던졌다. {대체 왜 겁을 집어먹고 이래요?} {서둘러요. 어서 여길 빠져나가요.} 그는 내 팔뚝을 억세게 잡아끌며 앞장섰다. {아, 아파요. 난 뒤로 가야해요. 주차장에 차가 있어요.} {그럼 그리로 가요.} 도서관 뒤로 돌아가 내 차에 올라탄 후에도 그는 평온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요! 경찰들은 저를 잡으러 온 거예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통 모르겠군요. 제발 좀 들썩거리지 말아요. 나까지 당황하니까 시동이 잘 안걸리잖아요.} 일방통행로를 따라 다시 도서관 앞쪽으로 나오자 청년은 좌석 아래로 몸을 수그려 밖에서 들여다보이지 않게 했다. 차가 도서관 광장을 완전히 빠져나와 교대 지하철역으로 방향을 틀어잡았을 때 그는 조심스레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이 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어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내가 말했다. {과민반응이세요. 경찰들은 복도에서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던 청년을 잡으로 온 거라구요. 왜, 도서관 로비에서 고함을 치던 청년 못보셨어요?} {봤어요. 하지만 그건 다 연극이에요.} {연극이라뇨?} {절 잡기 위한 교묘한 미끼죠.}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이따금 쳐다보던 얼굴을 돌려 운전에만 몰두했다. 차는 이제 서초 2동을 지나 강남역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의 속도가 시속 20킬로미터도 안될 만큼 길이 막히고 있었다. {어디에 내려주면 되죠?} {그,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경찰들이 끝까지 따라올지 몰라요.} {바보 같은 소릴랑은 작작하고 빽미러를 봐요. 순찰차는 보이지 않아요. 게다가 혹 누가 뒤따라온다 해도 서울 시내에서는 신호등에 걸려 놓칠 수밖에 없어요.그래요, 아무튼 좋아요. 난 집이 강북쪽이니 일단 영동대교를 넘어가겠어요.} 20분 후 차는 뚝섬길 사거리를 지나 구의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어쩔 셈이에요?} 내가 말했다.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청년은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연방 오른손 엄지손톱을 깨물어뜯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데나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헌데......경찰이 왜 영표씨를 잡으러 왔다는 거죠?} {제가 주사파이기 때문이에요. 사상적인 탄압을 하는 거죠.} {수배됐나요?} {그렇진 않지만......수배된 거나 다름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자세도 초조감을 이기지 못해 좌불안석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우리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마음을 가라앉혀요.} {다방 같은 덴 싫어요.} {하여간 절 믿어봐요.} 나는 차를 어린이대공원으로 몰아갔다. 그곳 광장 주차장은 그런대로 사방이 툭 있어 쉽게 주위를 경계할 수 있는 편이라 청년이 덜 두려움을 느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오늘따라 주차장엔 서울의 여느 때 같지 않게 한산한 편이었다. 나는 차를 적당한 곳에 주차시킨 다음 핸드브레이크를 올린 후 차창을 내리며 말했다. {그렇게 얼어 있지 말고 찬바람으로 심호흡부터 해봐요. 한결 좋아질 거예요.} 그는 얼마간 머뭇거리다가 결국 맨손체조를 하듯 가슴을 쑤욱쑥 내밀며 여러 번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흥분의 떨림이 배어 있는 몹시 거친 숨결이었다. {어때요?} {좀 나아진 것 같아요.} 그는 뒷통수를 맥없이 등받이에 파묻고 시선을 초점없이 허공에 둔 채 약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공포와 불안에서 덜 깨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이문세 씨디(CD) 있는데 들을래요?} 나는 그의 옆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권했다. {괜찮아요. 전 대중가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랑타령은 정말 피곤해요.} {그럼, 클래식?} {원하신다면요......} 나는 베토벤을 틀었다. 라살 콰르텟(LaSalle Quartet)의 현악 4중주 F장조 작품 135였다. 나는 베토벤보다는 모짜르트를 더 즐겨 듣는데, 이 CD는 불안한 기분을 가라앉히는 데 특효가 있다 하여 전미경에게 들려주기 위해 사둔 것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청년은 이제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복잡한 상념을 떨쳐버리려는 듯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상도(常道)를 벗어난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방어본능은 위기의 순간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이지만 어딘지 그의 반응에는 과장이 엿보였다. 도서관을 벗어나서도 좀처럼 평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 청년은 그토록 당황하고 충격을 받은 것일까? 경찰이 자기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닌데도 왜 그렇게 믿어버린 것일까?..... 그러다가 나는 스르르 음악에 빠져들고 말았다. 1악장 알레그레토(Allegreto)는 베토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장중함의 주조(主調)에 요소마다 즐겁고 생기에 찬 경쾌함을 적절히 가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2악장 비바체(Vivace)에서는 운명과도 같은 강렬한 폭발성이 대두되는데, 중반 부분에 이르러 첼로의 반복되는 빽사운드가 남성적이고 먹장구름을 연상케 하는 힘의 효과를 적절히 구사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과연 불안에 떨던 사람이 이 음악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둔중한 울림의 음조로 인해 공포의 느낌을 갖지는 않을까. 나의 의심은 3악장에서 해답을 얻었다. 3악장은 강조된 렌토(Lento)와 칸타테 트랑퀼로(Cantate Tranquillo), 즉 리듬이 아주 천천히 조용한 노래처럼 흐름으로써 드넓은 설원이나 침묵의 바다를 떠올려 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약간은 권태로운 감마저 드는 장중함이 의혹과 잡념뿐만 아니라 성가신 만사 모두를 삼켜버렸다. 그제서야 세상은 휴식과 안정을 얻게 된다. 음악이 4악장 그라베(Grave)로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오프 보턴을 눌렀다. {들을만 해요?} {됐어요.} 청년은 잠에서 깨어나듯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벼대며 대꾸했다. {뭐가요?} {아니에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직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가 봐요. 우리 커피나 한 잔 마실래요?} 나는 확실한 의사전달을 막는 그의 어정쩡한 기분을 의식하며 말했다. {어디서요?} 그는 등받이에서 몸을 떼냈다.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걱정 말아요. 이 근처 어디에 방해받지 않을 곳이 있을 거예요.} 나는 주저하는 그를 설득해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마침 어린이대공원 입구 한 켠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어 그리로 갔다. 우리는 블랙커피를 뽑아들고 가까운 벤치에 가 앉았다. 청년은 그러는 사에에도 눈알을 굴리며 주위에 대한 경계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의 과민반응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담담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이따금 살다보면 예기치않은 어색한 순간을 만나기 마련인데 바로 지금 경우가 그랬다. 나와 이 청년과의 유일한 접촉점이 사상논쟁이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마 한 10분쯤은 좋이 그렇게 살가운 겨울 햇빛을 쬐며 쌀쌀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나 보았다.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양키놈이다!} {뭐라구요?} {양키놈들이야!} 나는 그가 보내는 시선의 방향을 쫓아갔다. 금발에 벽안의 20대 남녀가 륙색을 맨 캐주얼 차림으로 어린이대공원의 대문 한가운데로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청년은 벌떡 일어서더니 단숨에 들이킨 종이컵을 손아귀안에서 와삭 우그러뜨리며 말했다. {차에 가 있어요!} {왜 그래요?} 나는 그의 심상치않은 표정과 벽안의 남녀를 번갈아쳐다보며 물었다. {글쎄, 가 있으라면 가 있어요! 시간 없어요!} 그의 언행이 워낙 서슬이 퍼랬기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승용차로 돌아왔다. 차창밖으로 내다보니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벤치는 어느새 노란 원복을 입은 유치원 아동들의 놀이터가 돼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5분쯤 지나였을까, 몹시 숨을 헐떡이며 옆좌석에 올라타자마자 서둘러 떠나기를 요구했다. {빨리 차 빼요!} {또 무슨 일이에요?} 나는 시동을 걸며 궁금함보다는 짜증을 내듯 말했다.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 차량의 물결에 휩쓸리자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모호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발작적으로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묵은 체증을 속시원히 뚫어내는 호쾌함을 보이는가 하면 그 새중간에 경첩이 어긋나 소름끼치는 쇳소리를 내듯 음산한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나는 그런 믿어지지 않는 웃음을 접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나의 위축된 반응에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음소리가 커졌다. {제가 그 꼴보기 싫은 년놈들에게 어떻게 해코지를 했는지 알아요?} 마침내 웃음을 그친 그가 말했다. {년놈이라뇨?} {아까 공원 입구에서 본 그 양키들 말이에요. 마치 제나라 공원을 산책하듯 버젓이 륙색을 메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던 꼴이란!} 그는 적의에 넘쳐 있었다. {......} 나는 그제서야 불길한 짐작을 떠올렸다. {전 곧바로 년놈의 뒤를 살금살금 밟아 따라갔죠. 짐작대로 그들은 영어를 쓰는 미국인들이었어요. 무척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대화를 나누더군요. 그게 다 우리나라를 깔보는 거라구요!} 그는 말하는 중간에 갑자기 탈선을 해 독백하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계속 말했다. {양것들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나이는 둘다 서른 안팎쯤 되는 것 같았어요. 전 그들에게 다짜고짜 '헤이, 스톱!'이라고 소리쳤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더군요. 전 그 침뱉고 싶은 면상에다 대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죠. '유, 고우 홈!(You, go home!)' 그러자 그 년놈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해지더군요. 전 다시 목청껏 힘주어 다그쳤어요. '깟뎀! 양키, 고우 홈!(God damn! Yankee, go home!)' 그러자 이번엔 소세지 빛깔의 허우대 멀쩡한 남자 녀석이 제깐에는 수모를 당했다고 느꼈는지 발끈해지며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밀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불손한 위협을 가해 저를 겁주려는 거였지요. 하지만 저야말로 그런 해프닝을 내심 잔뜩 바라고 있었죠. 전 등뒤에 몰래 붉은 벽돌 한 장을 숨기고 있었고 녀석이 방심하는 순간을 틈타 그것을 안면에 가차없이 내리꽂았죠. 키 차이가 많이 나 뒷 꿈치를 드는 수고가 아니었다면 정확히 코뼈를 으스려뜨렸을 텐데......하여간 녀석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보기좋게 고꾸라졌고 놀라 당황한 여자는 그 남자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저는 마무리로 그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를 축구공 차듯이 차주고는 부리나케 달려온 거예요.} 그는 흡사 어린아이가 저녁 늦도록 뒷골목에서 놀다 겪은 무용담을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와 소소하게 자랑을 늘어놓는 것처럼 얘기에 몰입해 있었다. 솔직히 내 기분을 말하자면 착잡함 바로 그 자체였다. 아까부터 조금씩 짐작해 온 바이지만, 그의 착종(錯綜)된 정신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나는 안타까움에 차마 할말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날 그는 처음 내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무슨 권유나 강요보다도 다음과 같은 한 마디가 더 효과적이었다. {도서관까지 찾아온 걸 보면 당신 집에도 경찰이 들이닥쳤을지 몰라요. 당분간 여기 머무는 게 좋겠어요.} 그 당분간은 결국 한달이 되고 두달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그 동안 알고 보니 그의 증세는 흔해빠진 과대망상증에 불과했다. 내가 그와 생활하면서 우선적으로 주목한 것은 그의 철두철미한 반미성향(反美性向)이었다. 어린이대공원 앞 광장에서 외국인----이 해프닝은 신문에까지 기사화되었는데, 노상 테러를 당한 두 외국인의 국적은 스웨덴이었다----에게 폭력을 가한 것은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미국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자칭 주사파답게 그 적개심을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런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남북의 분열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분단의 비극을 없애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데, 분단극복의 장애물은 이질화된 남북한 체제의 차이라기 보다는 외세의 개입 즉 미군의 남한내 주둔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양키놈들을 이 땅에서 싹싹 쓸어내는 일이야말로 젊은 진보적 지식인의 지상과제이므로 자신은 그 과업에 목숨을 바쳐 매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가 평생을 헌신해 남한을 해방시키려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자신이 한때 속해 있던 NL계열(반미민족해방을 슬로건으로 내걸음)의 투사들이 목표한 바도 그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론을 실생활에도 관철시키는 명실상부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한 예로 그는 이따금 간식으로 주어지는 콜라와 햄버거, 캔터키치킨 같은 것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영토침략의 기치를 내걸었던 20세기 초엽의 제국주의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국적기업이라는 경체침략으로 변형되었으므로 그런 수입품을 마구잡이로 사먹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내가 대신 우리는 미국에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팔아 톡톡히 재미를 보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 그는 그것이 소수 기득권층의 매판자본과 미국침략자본의 영리가 맞아서 결탁한 것이지 대다수의 민중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믿음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어느 날은 거실에 있던 내 미국제 오디오 세트를 산산조각내 쓰레기통에 처박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확고하다 못해 믿음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그의 태도는 자신에 반대하거나 미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보이는 편협성을 드러냈다. 그는 안기부가 친미사상의 맹신도 집단이고 경찰은 그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으며, 자신과 주사파의 세력은 민주적 역사의 주체로서 선(善)이며 자신들을 억압하거나 비난하는 모든 세력은 악(惡)임을 명백히 민족 앞에 부르짖는다고도 했다. 이 엄청난 자기도취----자기도취 혹은 자기팽창(self-inflation)은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듣는 사람은 조금도 재미가 없는데 혼자서 무작정 지껄여대는 것에서 부터 희랍신화의 아름다운 청년 나르키소스에서 따와 나르시시즘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발전 정착된 자기애(自己愛)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그 본질은 결국 자신과 입장을 달리하는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는 증오심에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우리] 혹은 [나]는 훌륭하고 [그들] 혹은 [그]는 보잘것없다. [우리]는 선하고 [그들]은 악하다----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만일 교회의 입장에서 북한을 비판해야 한다면, 공산주의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규정하고 탄압한 역사에 있다기 보다는 자신의 전능을 믿고 스스로 신격화되어 북한 주민에게 그 위대함을 강요한 김일성씨의 자기도취에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애굽기 모세의 십계명에서 야훼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신학적인 해석이 아니다. 신학적인 해석만으론 타종교의 역공을 면치 못하며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교리는 오히려 인간학적 내지는 심리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석될 때 왜 야훼는 자신만이 전능하다고 말했는지가 온전히 이해된다. 그것은 신만이 전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전능 즉 자기도취를 부정하는 사상인 것이다. 표영표의 경우, 자기도취는 전이(轉移)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기도 하지만 역시 자기도취에 빠진 강력한 지도자 김일성씨를 숭배하고 복종함으로써----학문의 추세가 워낙 다양화 되어 있는 만큼 한 분야의 진실이 다른 분야까지 커버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주사파가 생겨난 심리적 원인은 그 집단의 자기도취성에 있다. 그 성격상 매우 자기도취적인 집단은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지도자를 열망하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도취성을 강화시킨다. 그는 자신이 위대해지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지도자가 위대하면 할수록 추종자도 그 만큼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는 김일성씨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북한 지역의 곳곳에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고 온 인민의 추앙을 받는 그의 고향은 사상학습소가 되어 있으며 소년시절부터 항일투사로 명성을 떨쳤고 결정적으론 북한 주민 모두가 김일성씨를 부를 때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갖다붙인다는 사실에 있다. 아아, 그 분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위대한가! 표영표는 감격해마지 않는다. 한민족 역사상 그 만큼 위대한 인물이 있었던가! 살아 있을 때 2천만이 넘는 인민들로부터 그런 칭호를 얻은 인물이 있었던가! 그는 눈물어린 감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위대해지는 순간을 느낀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민족을 이끌 민주적 역사의 주체이며 선의 화신이다. 나를 억압하고 비난하는 악마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표영표의 과격한 행위와 추진력은 전적으로 이러한 자기도취의 힘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의 반미성향은 주사파와 나아가서는 김일성씨와 동일시됨으로써 주체철학을 따른 데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 자문하거니와 이 놀라운 자기도취의 괴력은 어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일까? 나는 이제 프로이드 학파의 학설을 전적으로 따를 셈인데, 앞서도 전미경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난 것처럼 나의 능력은 그의 과거를 심도있게 탐구할만큼 개발되어 있지는 못하다. 나는 그의 과거를 피상적으로 알게 되었을 뿐이며 정신과의사처럼 면담이나 최면술로 진지한 고백을 들을 기회마저 충분히 갖지 못했으므로 나의 판단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억측이나 가설 위에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표영표에 대한 나의 진단이 허튼소리는 아니라는 최소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 전 모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앙 월간지에 [주체의 신념은 환상이었다]라는 반성문을 게재한 주사파 황인욱씨(黃仁郁氏)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잠깐, 그 전에 반드시 미리 밝혀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과연 한 인간이 확고하게 믿어오던 자신의 신념을 나중에 가서 어떤 불가예측적인 기회----그것은 자생적인 반성일 수도 있고 처음에는 타의에 의한 강요에서 반성을 할 계기를 찾았으나 나중에는 본인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로 말미암아 눈물로써 참회한다고 해서 그 신념 일반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참회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대하면 그의 과거의 신념 일반이 무너진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안기부로선 이번 황인욱씨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사파의 논리가 허구임을 입증하려는 의도를 가진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얄팍한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나는 황인욱씨의 참회록에서 주사파의 허구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주사파는 틀림없이 그를 변절자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주사파의 조직원들은 오히려 이번 파동을 계기로 사상의 문단속을 더 철저히 할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황인욱씨의 글에서 발견한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위대한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이문열씨가 '영웅시대'에서 김철의 입을 통해 말한 바의 확인일 뿐이다. ----그런 건 없네. 증오란 언제나 사적(私的)이야. 기껏해야 그럴 듯한 이념의 탈을 쓸 뿐이지...... 이념적인 증오란 종종 탈을 쓴 사적인 원한에 지나지 않아 이런 맥락에서 황인욱씨의 글을 보면, ----그러나 나의 세상구경은 충격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온 나는 난생 처음으로 고민이라는 것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아이들과 선생님들로부터 촌놈이라고 놀림받고 무시 당하는 것이 나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나의 처지와 출신배경이 처음으로 비교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과 서울과의 객관적인 학력수준차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울아이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나에 대한 우월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팝송과 외국대중가수, 프로야구에 심취해 있었고 미팅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모르는 전혀 무식한 촌놈이고 가난뱅이 광부의 아들로서 그들과는 대화가 안 통하는 하급문화에 속하는 놈이었습니다. 그의 무시를 당했다는 충격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며 마음속의 응어리가 되어 반감과 편견으로 남게 된다. ----나의 대학생활의 초반을 지배한 것은 고등학교 때 싹튼 서울에 대한 반감과 대학생 일반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었습니다. 웬지 모르게 고등학교 때 나는 서울대학생들이 잘난 체하기 좋아하고 낭만만 찾는 놈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당구나 미팅 같은 것이 사치스런 놀음으로만 여겨졌습니다. 열등의식에서 연유된 증오심이라고 보아야 할 그의 배타적인 사고는 일단은 운동권에 합류함으로써 안정적인 정서를 얻게 된다. ----이런 나에게 운동권 선배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는 나로 하여금 [서울속의 고향]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훼손된 자긍심의 탈출구를 운동차원에서 발견함으로써 서울대생이라 하여 특권엘리트임을 자임하는데 만족하거나 캠퍼스의 낭만과 쾌락에만 몰두하지 않는 성숙한 자아를 깨닫게 되며, 또한 자신의 기득권을 민중에 대한 봉사로 돌려야 한다는 샤르트르의 '지식인론'에 자극받아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인생의 원대한 지침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운동권에 뛰어듦으로써 그에게 생겨난 변화는 건강하고 도덕적인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기득권세력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나 막연한 정의감으로는 뭔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끝내 떨치지 못했는데, 이런 불만의 감정은 보다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에의 욕구를 낳았고, 결국 반미민족해방을 이념으로 내건 [구국학생연맹]에서 큰 만족을 얻게 되었다. 그의 돌이킬 수 없는----그가 반성문을 썼다고 해도 우리사회는 그를 따뜻한 가슴으로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실수는 그가 주사파의 사상을 받아들인 데 있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왜 주체철학에 경도되었는가 하는 점을 깊이 반성하지 못한 데 있기도 하다. 결코 늦는 후회란 없다, 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후회가 너무 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후회가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그는 뒤틀린 자신의 심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음악의 선율은 한국적이고 정서적이어서 좋았으며 그 내용들도 주로 참된 삶, 조국과 청춘, 통일과 반미, 도덕적이고 진취적인 생활 등을 주제로 한 것이어서 나의 정서에 맞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반미통일을 추구하는 운동가로서의 자세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나의 반감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북한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느꼈던 감정은, 서울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고등학교 때 시골 문화와 서울아 이들의 문화를 대비해 보던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광부를 아버지로 둔 탄광촌 아이가 서울에 유학을 와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 키어온 사적인 증오심이 이처럼 완벽하게 이념의 탈을 쓴 공적인 증오심으로 탈바꿈한 경우가 또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표영표의 과대망상증은 그에 필적할 바는 못된다. 그도 그럴 것이 황인욱씨와는 달리 그의 반미성향은 외형적인 식별이 가능한 그 뻔한 동기가 이미 주변사람들에게 확연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표영표의 친아버지는 그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어머니는 독수공방의 과부신세를 과감히 청산했는데, 그 상대는 15살난 여자 외동딸을 둔 이혼남이자 한국에 파병된 하사관 출신 GI였다. 체구가 워낙 건장해 디트로이트 맘모스란 별명을 갖고 있는 계부는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매사에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까탈스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계부는 새아내와 함께 얻은 아들을 당장 남산중턱의 외국인 학교 초급반에 입학시키기를 원했는데, 소년 영표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영표는 친했던 동무들과 헤어지기를 몹시 슬퍼했고, 사실 그의 슬픔은 예기치않게 닥친 변화가 가져온 공포----그는 살갗이 붉고 레슬러 같은 인상을 풍기는 파란 눈동자의 이방인을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는 현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의 감정이었는데도, 소년의 여린 심성을 그 누구도 다독거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외국인 학교에 들어가 거의 자폐아와 같은 생활을 했다. 우선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탓이었다. 외로움과 고독은 소년 영표의 성격에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본국으로의 전출명령이 떨어진 계부 스미스를 따라 낯선 땅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한얼마 후 그는 어린 마음에도 자살할 결심까지 했었다. 다행히 그것은 불발로 그쳐 목숨은 건졌지만 어머니는 그후로 계부의 비위를 맞추느라 한 번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스미스는 그의 말수가 적고 다루기 어려운 성격에 대해 곧잘 화를 내곤 했다. 무관심과 고독, 고독과 무관심이 악순환처럼 반복되었다. 애정결핍증을 보이는 아동들이 으례 그렇듯이 소년 영표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히 아끼는 보잘것없는 곰인형 하나가 있었다. 회색의 짧은 나일론 털실로 뒤덮인 그것은 성인 손바닥만한 크기였는데, 소년은 잠자리에 들 때는 물론이고 등교할 때도 인형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집요한 애착을 보였다. 부피가 크지 않아 가방에 넣을 수 있었으므로 그 자체는 별로 문제시될 게 없었지만 스미스는 손에 쓸려 까만 때가 반들거리는 곰인형을 볼 때면 위생에 좋지 않다며 이따금 불만을 터뜨리곤 하였다. 하루는 어느 일요일 오후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스미스는 몹시 취해 있었고 1시간 이상 어머니와 격렬한 말다툼을 한 후였다. 어머니는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영표는 숨이 막힐 듯한 집안의 공기를 견디기가 어려워 거실을 가로질러 막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스미스가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그를 부르자 영표는 곰인형을 가슴에 안은 채 엉거주춤 계부 앞으로 다가갔다. 계부는 다짜고짜 그에게 곰인형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고 영표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계부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붙잡고 곰인형을 낚아채려하자 영표는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는데 그 바람에 스미스는 거대한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뒤뚱거리다 거목이 쓰러지듯 둔중한 소리를 내며 탁자위로 나자빠졌다. 소년 영표는 어깨 뒤로 계부의 욕설을 들으며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왔다. 낙조(落照)가 낙엽이 수북히 쌓인 플라타너스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주택가 거리는 드문드문 차가 서 있을 뿐 한적하기만 했다. 오가는 행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멀리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아름다운 적막의 배경음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소년은 무작정 걷다가 집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가까운 떡갈나무 벤치에 가 앉았다. 눈물이 나왔다. 자꾸만 복받치는 서러움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상처위로, 친아버지의 웃는 얼굴위로, 동무들과 뛰어놀았던 서울 명륜동 뒷골목의 오밀조밀한 샛길위로 빗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소년은 곰인형을 양손으로 꼬옥 감싸쥐며 볼에 부벼댔다. 죽은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땅속에 붙박힌 벤치의 기둥과 나무뿌리 사이의 구멍밖으로 빠져나온 은빛 다람쥐 한 마리가 소년이 의식하지 못하는 틈을 타 재빨리 굴곡이 심한 떡갈나무 몸통으로 기어올랐다. 다람쥐는 순식간에 나뭇가지를 타고 옆나무로 옮겨갔다. 다람쥐가 사라진 나무위로 붉게 노을이 졌던 하늘은 어느새 검푸르게 변해가 은하수의 띠를 이루며 하나 둘씩 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하늘은 소년이 꿈을 심으며 죽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을 꼭지점으로 아버지의 환영을 그려보았다. 아버지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스미스 같지 않았다. 체구도 크지 않았고 코도 높지 않았고 피부도 소세지 빛깔이 아니었고 자기를 윽박지르거나 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늘 다정다감했다. 소년은 다시 콧마루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소년이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온 동네가 잠들어 있었다. 낮엔 그렇게 흔하던 개조차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등이 꺼진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소년은 살금살금 집뜰을 돌아가 물홈통을 타고 2층의 창문을 통해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을 벗고 침대에 들기 위해 스탠드의 스위치를 당겼는데---- 아아, 이럴 수가! 방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책상 서랍은 하나도 남김없이 열려져 내용물이 죄다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고 바닥은 너저분한 옷가지며 그가 아끼던 장난감들이 한낱 찌그러진 쓰레기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원래의 제위치를 가지런히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영표는 스미스의 험악하게 찌푸린 얼굴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다음 날 영표는 아침 일찍 아무도 몰래 등교를 하려다가 신문을 가지러 나온 스미스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스미스는 어제 일로 아직 화가 안풀렸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놔!} {뭘요?} 영표는 시치미를 떼었다. {나쁜 자식!} 스미스의 손이 소년의 뺨을 후려쳤다. 그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았고 영표는 그만 기가 질려 책가방을 낚아채는 스미스의 억센 손길을 뿌리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미스는 가방에서 곰인형을 꺼내 양손으로 쥐어뜯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일론 털실이 질겨 그것이 여의치 않자 두어 번 바닥에서 발로 짓이기더니 아예 벽난로로 들고 갔다. 벽난로는 막 불을 지핀 후였는지 겹겹이 쌓아올린 장작더미에 불길이 잡혀가고 있었다. 스미스가 그 위로 석유를 뿌리자 삽시간에 장작은 활활 타올랐다. {아, 안돼요!} 영표는 스미스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스미스는 한 팔로 영표를 제지하며 다른 손으로 곰인형을 벽난로 깊숙이 던져넣었다. {아, 안돼......그, 그건......} 영표의 낯빚은 사색이 되었고 반면에 스미스의 얼굴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영표는 스미스를 제치고 허둥지둥 벽난로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곰인형을 도로 끄집어내려 했으나, 화염은 순식간에 그것을 시꺼먼 잿더미로 화해 놓고 말았다. 곰인형을 집어삼킨 시뻘건 불길이 뱀의 혀처럼 날름대며 오만가지 형상으로 모습을 바꿔가는 것을 지켜보던 영표의 눈동자에도 서서히 증오의 화염이 치솟아올랐다. 소년의 안면에 보일듯 말듯 경련이 이는가 싶더니 고사리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서서 스미스를 노려보았다. 스미스는 자신의 분풀이 행위가 불러일으킨 소년의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보면서 날카롭게 부어지는 시선을 맞받았다. 그 얼굴에는 '황구새끼 같은 놈아! 그래, 니까짓게 눈에 쌍심지를 돋우면 어쩔테냐?'하는 경멸의 빛이 어려 있었다. 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순간처럼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스미스는 소년이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상치않은 눈빛에 조금씩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적개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숨을 한 번씩 들이쉬고 내쉴때 마다 적개심은 빠져나가고 그 공백에 주체못할 서러움과 외로움이 밀려들어왔다. 소년은 풀썩 고개를 떨구었다. 속으로 욕설을 짓씹는가 했으나 스미스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달려나왔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거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 때 소년은 돌부리에 채여 휘청하고는 중심을 잃었다가 다음 발에 중심을 되찾고는 내처 뛰어갔다. 그는 온 체력을 다해 힘껏 달리는 것만이 손상된 감정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처럼 거의 미친듯이 무작정 돌진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왔다. 그에 따라 평소 눈에 익었던 주택과 나무들도 점점 낯선 풍경으로 변해갔다. 의식마저 명료함을 잃고 희미하게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았다. 소년은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면서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로 다리가 보였다. 사람만이 통행이 가능한 작은 나무다리였다. 그 아래로 개울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소년은 다리 중간에 와서야 뛰기를 멈추었다. 다리난간을 부여잡고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터질듯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나서 소년은 들릴락 말락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쁜 자식, 곰인형은 아버지가 선물한 것이었는데......} 표영표의 인생이 그 스스로의 입으로 들려준 어린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얼마나 굴절되었는지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에 계부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고 결국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7년 전 서울 대림동의 작은 이모집으로 입양되어 온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의 배려는 없었다. 오히려 편지를 붙여올 때면 서두에 못난 놈이라는 타박을 잊지 않았다. 영표는 영표대로 굳이 작은 이모집에 입양되는----그는 이모와 어머니가 자매라는 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더 좋은 입양처가 있었으면 서슴없이 그곳을 택했을 것이라고 했다----극단적인 방법을 택함으로써 스미스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마저 등을 돌리는 냉혹함을 보였다. 그는 고3 때까지만 경제적인 도움을 받다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3학기를 마친 후 방위에 입대했는데, 주사파는 국군 전체를 미제의 용병으로 보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그 즉시 대답했으나, 그렇다면 왜 용병이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어물쩡 대답을 회피하다가 나중에서야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였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의 반미감정이 비교적 그 심리적 근원과 까닭이 명확한 데 비해, 반미반제(反美反帝)----표영표에게 있어서는 '스미스에 대한 적개심'과 동의어이다----라는 이념적인 증오의 궤적을 일탈해 정신적인 혼미로 까지 발전한 데에는 아직 석연치않은 점이 있다. 그의 위대해지려는 자기도취성 노력은 기본적으로 위압적인 스미스의 체구와 완력이 불러일으킨 공포와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심리적인 방어기제인 듯이 보인다. 그가 새 가정내에서 스미스를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그것은 당연하면서도 건강한 심리작용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이모집에 입양되어 어머니와의 인연조차 끊으려는 결심을 굳힌 것은 심상치 않은 징후이며 이미 이때부터 병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그 경계선, 건강과 병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이런 추단을 내려보고자 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과대망상은 리비도의 대상충당의 철거로서 자아가 확장되는 결과, 즉 유아초기의 나르시시즘이 재발되어 나타나는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이다. 유아초기의 나르시시즘이란 별 게 아니다. 그것은 유아가 탯줄을 끊고 세상밖으로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양수에 담겨 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유아는 여전히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이를테면 배고프면 먹여주고 심심하면 얘기 동무가 되어주고 울면 달래주는,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어머니를 통해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자기도취에 손상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가장 비근한 예로 어머니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배변교육을 시키면서부터 유아는 자신의 도취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유아는 배변과 자신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배변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어머니의 꾸지람으로부터 나르시시즘의 알에서 깨어나오는 계기를 포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표영표의 '김일성 주석은 독재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김일성 주석의 약점은 약점이 아니다'로 번역되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다시 '자신의 똥은 더럽지 않다'라는 감정과 통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 자란 성인에게도 자신의 똥을 보는 것은 참으면서 남의 똥은 도저히 역겨워서 똑바로 보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희미한 흔적일 뿐 건강한 성인의 정신에 눈에 띌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표영표의 경우는 왜 세상밖으로 돌려져야 할 에너지가 자신에게 집중됨으로써 이차적 나르시시즘 즉 과대망상에 빠지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그가 세상을 보아온 방식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그에게 세상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는데, 그것이 제거됨으로써 모든 리비도적인 에너지가 자신에게 돌려져 자신을 팽창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스미스의 대변인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는 더 이상 어머니를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의문이 남는다. 왜 그에겐 어머니가 세상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을까? 그도 앞서 알튀세르의 경우처럼 어머니의 욕망을 통해서밖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아직 내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한 그는 언제까지나 우리집에 머무는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4. 오렌지족, 윤애라(尹愛羅) 신세대 1번지, 국적부재 1번지, 향락의 공화국, 오렌지 나라, 삐리삐리(차를 몰고 카페골목을 찾아다니며 여성을 유혹하는 짓)와 부킹(짝맞추기)의 천국, 욕망의 통조림 공장 압구정동! 윤애라는 그곳에 본적을 둔 전형적인 압순이(여성 압구정족)였다. 하루는 갤러리아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가 어둑해질 무렵 로데오 거리로 나섰는데, 내 뒤를 누군가가 바싹 쫓아왔다. 한 블럭 이상을 의식하며 걸었는데도 낯선 젊은 여자가 쉼없이 따라오길래 나는 획 돌아서며 따져 물었다. {대체 왜 절 미행하는 거죠?} {아, 아니에요. 전 그냥......} 한 마디로 요란하다고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복장의 아가씨는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쩔쩔맸다. 스물이 채 되었을까, 아니면 스물 한둘. 아가씨는 아직 봄기운이 쌀쌀한데도 허벅지가 드러난 맨살의 똥꼬치마에 아주 비싸보이는 가죽 자켓을 입고 귀걸이며 팔찌며 걸 수 있는 곳엔 어디든지 번쩍이는 황금붙이를 질렁 내려감고 웬지 추워서 떠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 제게 용건이 있었던 게 아녜요?} {저......저랑 잠깐만 동행해 주시면 안되겠어요? 잠깐이면 돼요.} 아가씨는 지나왔던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제정신을 차린 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어떤 아저씨가 자꾸 쫓아와서 그래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해 놓고 내 의사는 아랑곳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밀어붙여 가까운 카페로 데리고 들어갔다. 몹시 서두는 기색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붉은 카펫이 깔린 지하계단을 밟아 내려갔는데, 압구정동 카페에 대해 매스컴에서 듣던 대로 입구부터 시설이 으리으리하면서도 세련돼 있었다. 실내는 가히 압도적이라 할만큼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성인취향의 복잡함과 우미함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20대초반 미만을 위한, 오로지 싱싱한 젊은이들만을 위한 장소였다. 그저 쉽게 밝은 조명이 비치는 넓은 공간, 푹신한 소파, 옅은 코발트빛 단색상, 언밸런스가 특징인 액자 장식품----이를테면 자유, 안락함, 단조로움 그리고 포스트모던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쌍쌍이 대부분인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하나같이 대담한 복장의 미남 미녀들만 모인 것 같았는데, 나이 많은 이방인의 출현이 달갑지 않은 듯 탁자 사이를 지나칠 때마다 눈꼬리를 치켜 힐끔거리곤 했다. 아가씨는 입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동안에도 연방 쫓기는 듯한 초조함을 보였다. 경찰을 부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여종업원이 엽차를 들고 왔으므로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종업원 또한 나의 존재가 의외라는 듯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주문을 받은 여종업원이 돌아가자 아가씨가 변명을 대신하듯말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이 동넨 다 우리 또래 뿐이에요. 그래서 예민한 반응들을 보이는 거예요. 우린 20대 후반만 돼도 똥차 취급을 하거든요.} {똥차라뇨?} 나는 그녀의 상스러운 비유에 약간 화가 난 투로 물었다. {기성세대라는 뜻이죠. 고리타분하다는 뜻도 돼구요. 하지만 악의가 있어서 그런 시린 눈을 하는 건 아니니 이해하세요. 그래도 이 카페가 이 근처에선 가장 점잖은 축에 속해요. 다른 데선 물이 흐려지면 안된다고 30대 이상은 입구에서부터 아예 발도 못붙이게 하는 곳이 있거든요.} {왜 그런 돼먹지 못한 짓들을 하죠?} {다 장사속이죠. 그러지 않으면 돈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들지 않으니까 지레 돗자리를 깔아놓고 손님을 선별해서 호객을 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그렇군요. 헌데 이제 좀 괜찮아요?} 나는 그녀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도는 것이 이상해서 말했다. {좀 나아졌어요.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어요.} 그녀의 표정은 다시 풀기를 잃고 기가 죽었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표정이 수시로 변하는 타입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탤런트나 미스코리아 뺨치게 예쁜 아가씨였다. 같은 여자로서 질투심이 날 정도였다. 통속적으로 묘사되는 오똑한 코에 앵두 같은 입술 수준이 아니라 '삼손과 데릴라'에 나온 여주인공 헤디라말처럼 보는 이를 흠뻑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풍겨나는 용모였다. 아가씨는 초조함을 이기려는 듯 초록색 니나리치 핸드백을 열고 마일드세븐을 꺼냈다. {태우시겠어요?} {네, 한 대 줘요.} 나는 그녀가 건넨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불붙은 던힐 라이터를 내밀었다. 나는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이제 어쩔 셈이에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 좀더 있어 봐야겠어요.}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면 어떡하려구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여긴 보는 시선이 많으니까요.} {경찰을 부르는 게 안전하지 않겠어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상대가 흉포한 인신매매범이면 어쩌려구요?} {그렇진 않아요.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싶었다. 사랑 싸움이거나 그와 유사한 경우라면 굳이 끼어들어 감나라 대추나라 할 건 없었다. 그런 일일수록 3자의 관여는 긁어 부스름을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런 정도의 미모와 헤퍼 보이는 행색이라면 오나가나 시비붙을 남자가 줄을 서고도 남겠지. 나는 은근히 질시섞인 시선을 보내면서 이제는 그런 해프닝보다는 그녀의 생활에 더 관심이 갔다. {요즘 압구정동에 대해서 말들이 많던데, 참! 우리 통성명도 안했군요. 전 임유진이라고 해요. 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조각에도 조금 손을 대구요.} {그럼 화가세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무명이라 명함을 내세울 정도는 못돼요.} {전 윤애라예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요. 요 얼마 전에 모던 아트라는 디자인 학원에 다녔는데 시시해서 그만뒀어요. 왜 그런지 요즘은 모든 게 시시해요. 노는 것두 따분하고......뭔가 나를 흥분시킬 수 있는 짜릿하고 강렬한 쾌감을 주는 것을 찾아다니는 데 쉽게 눈에 띄지 않아요.} {왜요? 재미가 없어요? 제가 알기론 대한민국에서 이곳 만큼 재미가 있는 곳도 없다고 들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요. 쭉쭉이들 사냥하는 덴 방배동이랑 여기가 그런 대로 괜찮죠.} {쭉쭉이?} {원래는 늘씬한 여성을 의미하는 은어예요.하지만 사내애들이라고 별다를 게 있나요? 늘씬하고 잘 생기면 다 쭉쭉이죠.} {최근들어 이곳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곤 하던데?} {꼰대들이야 항상 그렇잖아죠. 공부해라 조심해라 남의 손가락질 받지 마라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또 하지 마라.....지겨운 사람들이에요. 언니도 꼰대예요?} {아, 아니에요. 난 그렇게 사시(斜視)로 보진 않아요. 다 긍정할 순 없지만요.} {한 마디로 우스워요. 자기일도 주체 못하는 것들이 남의 일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 꼴은 가당찮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꼭 비난을 일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생의 후배들이 탈선할까봐.....} {피! 언니도 결국 꼰대군요. 탈선 운운 하는 건 웃기는 일이에요. 자기가 나서서 책임져 줄 인생도 아닌데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기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득이한 현상의 일부분일 수 있지만 그 정도로 냉소적이라면 문제가 아닐까요? 냉소적이라는 건 열등감의 표현일 때가 많아요.} {우리가 열등감을 갖고 있다구요? 듣다 듣다 처음 듣는 말이네요. 우린 돈도 많구 애인도 많구 의상도 많구 시간도 많구 모든 게 많아요. 풍족하지 않은 게 없는데 열등감을 느끼다니요? 우월감이 지나치다면 모를까요.} {그 우월감이라는 게 진지한 노력을 통해 한칸한칸 쌓아올린 게 아니라 아버지의 은행구좌에서 넘쳐나온 거라면 사상누각이거나 바닷가 모래성이지 않을까?} {아무렴 어때요. 돈을 끌어 쓰는 실력이야말로 바로 그 사람의 능력 아닌가요? 게다가 길지 않은 인생 남의 시선 일일이 다 신경 써가며 살 필요가 뭐 있어요? 우린 우리대로 사는 방식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대로 사는 방식이 있을 거예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떤 사고방식이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게 민주주의 아닌가요?} {하지만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말도 있잖아요.} {언니, 우리 같은 압순이의 인생 모토가 뭔지 알아요?} {......?} {여유있게 즐기고 골치아픈 것에 신경쓰지 말자예요. 남들이 뭐라고 떠들건 그들이 어떻게 살건 우린 관심밖이에요.} {정말 편한 사고방식이군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게 바로 그 편안함 아닌가요? 솔직히 말해 언니의 말투에 비아냥이 숨어 있다는 거 나 알아요. 일전엔 더 험한 꼴도 당했는 걸요. 모 여성잡지사 기자가 나와 취재에 응했는데 아주 고리타분한 친구였어요. 질문에 느낀대로 대답하라더니 취재한 지 10분도 안돼 붉으락푸르락 하더군요. 왜, 자기가 도덕군자인 체하며 남의 일에 참견하는 족속들 있잖아요. 바로 그런 타입이었어요. 글쎄, 나 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며 멱살를 거머쥐더니 자기성질에 못이겨 핵핵대다가 카페를 뛰쳐나가는 거 있죠. 나 웃겨서......언니가 보기에도 내가 그렇게 밉보여요?} {혹시 애라양은 압구정 문화를 찬성하는 의견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소비공간 운운하는 얘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요, 경제학적으로 계속 상품생산이 가능하려면 누군가가 소비를 해야할 테죠. 소비가 중단되면 상품생산도 중단되고 연이어 공장이 문닫고 실업자가 생기고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온 나라가 시끄럽게 들끓겠죠. 그런 차원에서 압구정 문화를 비난할 수 없다는 논리는 충분히 일리가 있어요. 헌데그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버릇처럼 끝에 항상 토를 달곤 해요.} {그게 뭐죠?} 그녀는 새담배에 불울 붙이며 호기심어린 눈을 했다. {고급문화 육성,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소비공간 확보, 사회에 만연된 황금만능주의를 해소하고 기타 등등...... 정말 꼰대들이 조회시간에 늘어 놓는 입바른 말로 끝을 얼버무리죠.} {꼰대들은 정말 잔소리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그녀는 내 얘기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는 이렇게 무지해 보이는 여자와 입씨름을 해야 할 건지 망설여졌지만, 말이 나온 김에 끝맺음을 해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 말했다. {그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건 압구정 문화를 긍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진보적인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동시에 '건전한' '고급'이라는 상투적인 용어를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도덕성이나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아요. 왜 그들은 그냥 압구정 문화가 좋다 라고 말하지 못할까요? 순수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비평정신 또한 부족해요. 그들은 하나의 상투적인 비평형식 밖에 몰라요. '~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얘기가 얼마나 뻔한 건지 나는 반문하고 싶어요. 소비와 파괴의 뿌리가 같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체 건전한 소비라는 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다이애너비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천만원을 호가하는 드레스를 입을 때는 준수하고 우리애들이 그런 사치를 할 땐, 영국과 우리의 형편 비교상, 건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매끼 점심을 피자로 먹는 사람은 우동으로 허기만 때우는 사람에 비해 덜 건전한 식생활을 하는 걸까요? 소비가 미덕이면 미덕이지 거기에 달리 사족을 달 필욘 없는 거예요. 소비는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병이 된다, 라는 관념은 기껏해야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마치 창녀의 존재가 필요악인 것처럼요. 정작 문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인간성을 오염시키는 그 자체----압구정족은 아니 압구정족뿐만 아니라 소비지향적인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비되어져야 할 상품처럼 인간을 보게 되는 거예요. 어떤 여자가 블라우스는 미제 마인, 미니스커트는 일제 미치코 런던, 속옷은 캘빈 클라인, 향수는 포이즌, 화장품 폴라, 귀걸이는 지방시 등등으로 치장하며 매일 변화를 주지 않는 한 권태로움을 느낀다고 쳐봐요. 그 여자가 남자를 보는 시각은 어떻게 될까요? 한 남자에 평생 아니 한달쯤이나 만족할까요? 내 대답은 부정적이에요. 은연중에 그 여자는 남자를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을 하찮은 물건쯤으로 취급하게 되고 말거예요. 그리고 자신 또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소비지향적 인간에 의해 물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불행의 서곡에 불과하지요. 더 큰 문제는 소비순환의 주기가 짧아질수록 파괴의 성향이 증대된다는 데 있어요. 과거엔 소비가 쓸모가 없어진 물건을 대체하는 수단으로만 행해졌었죠. 내 경우만 해도 허리띠 하나로 4~5년은 좋이 쓰던 때가 있었어요. 가죽의 이음새가 갈라지고 모서리는 닳고 해져서 정말 이젠 어쩔 수 없이 갈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약간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낡은 허리띠를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었죠. 헌데 지금은 그런 절약정신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이든 간에, 보는 대로 욕구하고 또 금방 싫증을 냄으로써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는 사이클에 탐닉하게 되고 만 거지요. <생산과 소비>는 <창조와 파괴>의 경제적 술어에 불과함을 알아야 해요. 20세기를 '살인의 시대'라 일컫는 것도 '람보'와 같은 수천명을 잔인하게 죽이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정신은 동요하기는커녕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파괴의 정신이 소비의 정신만으론 설명될 수가 없는 거지만, 람보가 베트콩을 하나씩 죽일 때마다 우리 여자들은 멘스로 더러워진 스캉달 팬티를 갈아입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장황한 설명이 끝났을 때 마침 음식물이 날라져왔다. 버드와이저 3병과 쇠고기와 생선이 섞인 이름 모를 안주였다. {이 카페 정식이에요. 드셔보세요. 아주 맛있어요.} 그녀는 하이볼잔에 맥주를 따르어 주며 말했다. 나는 맥주병을 건네받아 그녀의 잔을 가득 채운 다음 내 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시늉을 한 후 쭈욱 들이켰다. {술이 세신가봐요?} 그녀가 다시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남들만큼은 먹어요. 애라씨는요?} {저도 꽤 하는 편이에요. 오늘 저와 코가 빠지도록 마셔볼래요?} 그 제안은 뜻밖이었다. 그녀가 날 필요로 하는 이유는 분명했지만, 압구정족에 대한 내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못하리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온 말이라 나는 선뜻 승락할 수가 없었다. {꼰대하고도 술을 마시나요?} {웬지 언니한테는 친근감이 들어요. 절 비난한다 해도 말예요.} {그 비난이 아주 호될 수도 있는데요.} {헌데 저로서는 아까 언니가 말한 요지를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우릴 비난한 거예요? 칭찬한 거예요?} {비난도 칭찬도 아니예요.} {그럼 됐잖아요.} {된 건 아니에요. 소비에 탐닉함으로써 인간성이 파괴되었다는 거죠.} {그럼 저도 한 말 할까요?} 나는 대답 대신 잔을 비우며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는 캐ㅊ을 접시 위의 야채에 골고루 뿌리며 말했다. {인간성이 파괴되었다고 해서 이제 그만 자본주의와 대량생산의 문을 닫자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안그래요?} {적어도 사회주의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렇겠죠.} {그럼 언니는 사회주의를 바라나요?}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사회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장점 한 가지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자본주의의 전제가 개인 즉 뭐든지 나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는 전체에서 출발하는 것이거든요. 너무나 흔하게 쓰여 잘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소리가 되어버렸지만 자유 못지 않게 평등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전 언니의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봐요. 아까 언니가 '건전한' '고급문화' 운운했다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쓰였던 논리가 언니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봐요. 과연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에서 구조적 평등이 얼마나 실천될 것 같아요? 물론 자본주의는 수정을 거듭해 와 사회주의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근본적인 결함을 없애진 못했어요. 그 잘 나간다는 미국도 부시 정권 하에서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졌어요. 그런데도 언니는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평등개념을 끌어들일 작정인가요?} 윤애라는 내가 판단한 이상으로 똑똑한 데가 있었다. 내 이론의 헛점을 여지없이 집어내고 있었다. 내가 약간은 씁쓰레한 기분으로 말이 없자 그녀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언닌, 우리 압구정족들이 골빈 애들로만 구성된 줄 아는 모양인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요. 개중에는 제법 쓸만한 애들도 있어요. 다만 우린 자본주의의 논리에 철저할 뿐이에요. 그것도 그래요. 우리가 우리자신들을 방어할 논리적 무기가 전혀 없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전 대략 3가지 점을 들고 싶어요. 첫째는, 인간성 파괴가 소비지향적인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샐러리맨들, 단순 노동자들, 기타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현대인의 열심과 성실 뒤에는 인간성 파괴가 은폐돼 있어요. 반복되는 출근과 퇴근, 그리고 별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일로 하루종일을 보내면서 스스로 생기를 잃어가는 것이 인간성 파괴가 아니고 뭐겠어요? 룸살롱 같은 유흥업이 번창하는 이유는 그런 공간만이 현대인의 위로가 되줄 수 있을 뿐이어서 그래요. 우린 풍족한 돈을 발판으로 그런 삶에서 탈피하고 싶은 거예요. 둘째는, 지난 30년간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애써 벌어들여 은행에 저축한 돈은 결국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배불리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이제 우리가 아버지 세대가 일군 농사의 결실로 시루떡을 해먹든 가래떡을 뽑아먹든 그 누가 탓할 자격이 있는 거죠? 그 탓함에는 전혀 시기가 섞여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셋째는, 대체 부(富)라는 것을 쓰지 않고 쌓아놓기만 해서 어쩔 작정인가요? 좀 거창하게 말해서 우리의 문제는 문명의 문제이기도 해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영국 귀족들은 돈이 많아서 별의별 짓을 다 해봤다고 하대요. 단지 2가지, 자살과 살인만이 그들이 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 친구중엔 스무 살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50억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애도 있어요. 그 애가 어떻게 생활하길 바라나요? 고생고생하면서 남들처럼 아침 5시에 일어나 연탄불을 갈고 스스로 꼬들밥을 지어먹고 몇 푼 되지도 않은 급료를 벌기 위해 지옥철에 몸을 실기라도 바라나요? 세계는 지난 1세기 동안 부를 과다하게 축적한 결과 개개인이 평생을 통해서도 쓸 수 없는 돈을 개인에게 가져다 주었어요. 그게 바로 성공의 의미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경험은 특수층 몇몇을 빼놓고는 과거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터라 돈이 많은 사람들은 넘치는 욕망속에 매사에 권태를 느낄 뿐 아무런 지침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어요. 적당히 자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하기야 쉽죠. 하지만 아무리 써도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충고가 과연 먹혀들까요?} 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이론이 조목조목 논리정연해서 따져들 틈새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언제나 뇌리속을 맴돌던 의문들----경쟁사회에서 진정 선의의 경쟁은 가능한가, 이윤추구의 사회에서 순수한 사랑은 가능한가, 혹시 이 모든 가능성은 강자가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기 위해 마련한 선전용 플래카드이거나 남을 짓밟아 일어선 자가 손톱만큼의 동정심과 시혜를 뻥튀기 해서 내보이는 교활한 방법은 아닌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자가 압구정족에게 무슨 충고를 할 수 있을까? 단편적인 도덕심을 고취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달동네에 이런저런 비참한 삶을 사는 이가 있으니 너희들은 좀 자제해 달라는 말이야 상대가 당나귀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입력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비록 그 이상을 저버릴 순 없다고 해도 나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이상과의 어설픈 결합을 통해 그들의 약점을 지적하거나 측은지심을 유발시키고 인간의 도리를 내세움으로써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정서적으로는 이런 비난이 타당하나 이성적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정합성(整合性)----그들의 주장은 적어도 자본주의의 전제에 조금도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에 관한 한 압구정족이 일반인보다 모자란 것이 없다. 비록 자본주의의 윤리성을 따지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윤애라는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무척 만족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논쟁에 승리했다는 도취감으로 인해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 쾌감을 얻기 위해 봉사한 입과 혀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거푸 두 잔의 맥주를 단숨에 비워내더니 자기잔을 내게 불쑥 내밀었다. {들어요. 우리 이거 빨리 마시고 딴곳으로 가요. 여기가 벌써 지겨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아까 쫓기고 있었던 일을 깨끗이 잊은 듯이 마지막 잔의 거품을 비우 고나자 지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어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이 동네에서 가장 붐빈다는 옥향(玉香)이라는 로바다야끼 술집이었다. 저녁 7시경이면 자리가 없어 먹고 싶어도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다는 곳이었는데, 그녀의 수완으로 우리는 구석에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한 좌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윤애라는 자신이 이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음식의 깔금함과 또래들이 즐겨 찾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생을 연상시키는 이름이 특히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여기 말고도 아랑, 화심, 매화라는 일식집도 분위기가 좋아요. 역시 옥호가 기생 이름 같아 왠지 끌려요.} {왜, 기생 이름에 특별히 개인적인 연관이 있던 기억이 있나요?} 나는 그것이 성적인 관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옥향이 옥을 잘게 새겨 속을 비게 만들고 그 속에 사향(麝香)을 넣은 여자의 노리개의 한 가지이며, 그 사향은 사향록(麝香鹿) 수컷의 생식선에서 분비되는 흑갈색 입상(粒狀)의 동물성 향료로 간질 등의 약제로로 쓰이지만 성적인 흥분제로도 쓰임을 알려주었다. {어머, 그래요! 그럼 옥향이란 건 은근히 여자의 성감대를 자극했던 노리개였군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닐 거예요.} {그런 얘길 들으니까 옥향이 더 마음에 드는데요. 아닌게 아니라 전 성적인 이미지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혹시 오렌지족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아요?} {글쎄요.} {정확한 얘기는 아니지만 미국 LA등지에서 젊은 남성들이 이성 접촉의 수단으로 여성에게 오렌지를 건네줬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헌데 전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참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오렌지가 앵두나 체리처럼 선정적인 이미지를 담을 수가 있거든요. 그것도 완곡한 방식이 아니라 아주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요. 이런 불란서 시가 있어요.} 그러며 그녀는 그 시를 천천히 읊조렸다. ****** 내 乳房은 두 개의 오렌지 이것들을 사랑해 주시던 당신이여 따 주세요 당신은 이것들을 말캉말캉한 것을 손바닥을 위해 바라셨습니다 당신은 이것들이 新鮮해 주기를 밤의 渴症을 위해 바라셨습니다 이것들을 벗기세요 이것들을 잡숴 주세요 이것들의 금빛 피가 부디 당신의 갈증을 끄고 당신을 保養해 주기를 비옵니다 ****** {어때요?} 그녀는 시를 다 읊조리자 감상을 물었다. {글쎄요. 애라씨 말씀대로 너무 노골적인 것 같네요.} {어떤 해석자는 이 시에 비키니 스타일의 사랑노래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했어요.} 그녀는 유쾌한 듯이 살큼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보기엔 비키니 스타일이 아니라 토플리스 차림 같은데요.} 나의 유머에 그녀는 목젖을 내보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사실 제가 읊조린 시의 부분은 초장에 국한돼 있어요. 후반 부분은 육체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충족감과 신뢰감을 노래하고 있어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천박한 시는 아니라고 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앞부분이에요. 외우고 있는 것도 그 대목이구요.} {속마음이 야한가 봐요.} {그래요. 전 좀 야해요.}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나는 아까부터 그녀의 야함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을 정도였다. 짧은 똥꼬치마도 그랬지만 그 속으로 팬티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있어 여자인 나로서도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그러니 남성들은 오죽하겠는가. 이처럼 그녀를 대하는 나의 시각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음에도 나는 두 시간 가량이나 더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 동안 윤애라는 자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는데, 최근까지 연극배우 생활을 해왔으며, 그러나 자신의 궁극적인 꿈은 슈퍼모델이 되어 해외를 주름잡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실 자신은 순전히 압구정동에 발을 붙이기 위해 초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지 그 보다는 품위가 있는 드레스를 더 즐겨 입으며, 가장 좋아하는 취향은 스칸디나비아적인 거미 타입의 여성----흐르는 듯한 큰 키에 가느다란 몸, 머리카락이 없는 작은 머리, 거대한 사지, 해맑은 피부라고도 했다. 그런 북구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기 위해 요즘 유행하는 인공선탠도 극구 마다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고보니 백옥같이 흰 살결이 얼굴의 웬만한 약점을 감춰주어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일식집을 나올 때 우리의 행선지는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귀가를 서둘러야 했고 그녀는 술을 한 잔쯤 더 마시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취하지는 않았으나 손수 운전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비틀며 나이트에 가서 하우징댄스나 춰야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오늘 정말 고맙고 재미있었다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돌아섰다. 그리고 몇 발짝을 떼었을까,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가 달려왔다. {언니, 같이 가요!} 그녀는 쇼핑백을 든 내 팔을 바싹 죄며 달라붙었다. {그 자식이 또 쫓아와요.} {어디요?} 나는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상점에서 환하게 비쳐나오는 불빛을 받으며 바쁜듯이 오가는 행인들은 많았지만 특별히 눈에 거슬리는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남자예요?} {그걸 확인해서 어떡하려구요? 빨리 여길 떠나요!} 나의 물음에 윤애라는 어서 가기만을 재촉했다. 다행히 내 차가 주차된 곳까지 뛰어오는 동안 우리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떡하실래요? 집에 까지 태워드려요?] 나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도어에 키를 꽂았다. {아니, 언니! 이거 BMW잖아요! 이런 줄 알았으면 술값을 언니한테 물릴 걸 그랬네!} 금방 쫓긴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차종에 감탄을 연발하는 그녀를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나는 일단 운전석에 올라타 조수석을 열어주었다. {집이 어디죠?} 시동을 걸며 내가 말했다. {벌써 집에 들어가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볼멘 소리를 냈다. {쫓아다닌다는 남자가 두렵지 않아요?} {두려워요.} {그럼 집에 들어가야죠.} 나는 칭얼대는 아이를 타이르는 기분이었다. {전 새벽 5시 전에 자본 적이 없는 걸요.} {그렇다고 아무 데나 나돌아다닐 셈이에요?} {나이트 클럽에 가면 친구들이 많아요. 정 없으면 부킹을 해 호텔에서 잘 수도 있구요.}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오늘은 몸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일단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이런 경우엔 길이 막히는 게 오히려 여유를 가질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의 집이 강남이라면 영동대교를 넘기 전에 적당한 곳에서 내려줄 작정이었다. {정말 집에 들어가지 않을래요?} 나는 차를 도산공원쪽으로 꺾으며 다시 의향을 물었다. {언닌, 집이 어디에요?} 그녀는 반문했다. {우이동이에요.} {꽤 멀군요. 그럼 저한테 신경쓰지 말고 우선 한강부터 건너세요. 전 강북 아무 데나 내려주면 돼요.}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오늘은 아무래도 애라씨에게 손재수가 있는 날인가봐요. 놀일은 다른 날로 미뤄요.} 나는 안심을 하며 FM을 틀었다. 음악이 흘러나왔다.'봄여름가을겨울'의 '어떤이의 꿈'이었다. 1절이 끝나자 윤애라는 흔쾌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 하고 꿈이란 이런 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혹 아무 꿈---- 꽤 지난 것 같았다. 영동대교를 건너는 데만도 20분쯤 소요되었으니까. 마침내 다리를 건넜을 때 내가 말했다. {애라씨 어디에 세울까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조금 전부터 그녀는 노래도 따라 부르지 않고 말없이 조용했다. 곁눈질로 보자 그녀는 쌔근대며 골아떨어져 있었다. 나는 차를 한적한 이면도로로 몰고가 세운 다음 그녀를 잡아 흔들었다. {애라씨, 일어나요. 강북이에요. 여기서 내려야 해요.} 뺨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리며 깨어나길 재촉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취기로 인해 그녀는 이미 인사불성이 돼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경우였다. 내가 한 잔을 비울 때마다 그녀는 두 잔 이상을 마셔댄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내 집에서 재우기로 했다...... 처음엔 나는 윤애라가 망상증 환자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다만 행실이 얌전치 못하고 출처가 불확실한 돈을 수중에 많이 가지고 있으며 주관이 뚜렷한 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은 신세대의 대표적인 여성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내 집에서 일박을 한 다음 날 아침 깨어나자 무척 당황한 것 같았는데, 집안을 둘러보더니 썩 마음에 들었는지 오후가 되어도 도무지 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떠밀다시피 해서 내보내려 하자 그녀는 하루만 더 자고 가겠다는 거였다. 부모님이 걱정할 테니 전화라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는 자기가 알아서 할 거니까 염려 푹 놓으라는 말만 했다. 다시 하루를 묵고 점심까지 먹여 내보낸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그녀는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콤을 통해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문 열어줘요! 그 자식이 또 쫓아왔어요!} {무슨 소리니? 또 누가 쫓아왔단 말야?} 나는 그녀가 가기가 싫으니까 쇼를 하는 줄 알았다가 워낙 소리를 치고 문을 두드려대길래 어쩔 수 없이 문을 따주었다. 내가 정원으로 나왔을 때 그녀는 얼굴이 상기된 채 허둥지둥 돌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잔디밭에 세워두고 문밖으로 나가 동정을 살폈다. 학교를 파한 동네 아이들이 편을 갈라 공차기를 하고 있을 뿐 수상한 남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정원으로 돌아와 애라에게 따지듯 말했다. {애라야, 아무도 보이지 않아. 축구하는 동네 꼬마들 소란뿐이라구. 대체 누굴 봤다고 이 호들갑이지?} {또 그 몹쓸 자식이라니까요. 그저께 밤 여기까지 따라와 집을 눈여겨 봐두었었나봐요.} 그녀는 자기가 불신을 받은 데 대해 노여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자식 그 자식 하는데 대체 너를 쫓아다닌다는 그 남자의 정체가 뭐야?} {가볍게 서너 번 데이트했던 상대예요.} {그럼 굳이 비싸게 굴 거 없잖아. 니가 좋은가 본데 그냥 계속 만나주지 뭘 그러니?} {싫어요. 그 사람이 싫어졌단 말이에요. 또 애초부터 좋아하지도 않았구요.} {정 내키지 않으면 그 사람 만나서 딱 부러지게 싫다고 말해. 니 태도가 가타부타 확실치 않으니까 저쪽에서 더 열을 올리는 거 아니니?} {아니에요. 벌써 인연을 끊자고 두 번이나 대놓고 말했었어요. 그것도 아주 불손하고 모욕적으로요. 헌데도 먹혀들질 않아요. 뭐든지 제멋대로인 남자예요. 전 이제 어쩜 좋죠?} 이렇게 윤애라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론 둘의 관계가 어떤 상태인지, 정말 위험한 수위인지 나로서는 막연한 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윤애라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 소리를 내는 이상 무조건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일단 거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 표정에서 못미더워 하는 내심을 읽었던지, {언니, 믿어줘요. 정말이라니까요. 그 남자가 정말 여기까지 찾아왔다니까요.} 라고 애절하게 말했다. {그래, 믿어. 네 눈을 의심하는 게 아냐. 네 말이 거짓이라는 것두 아니구. 다만 난 네 반응이 유별나다는 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너 정도의 미모라면 여태껏 추근대는 남자가 한두 명은 아니었을 거야. 개중에는 짓궂게 구는 녀석들도 있었을 테구. 왜, 아니니?} {틀리지 않아요.} 그녀는 들릴락 말락한 작은 소리로 수긍했다. {그럼 뭐가 문제지? 그 남자를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구?}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 불길해요. 마주앉아 그 사람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웬지 끔찍한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오싹함이 온몸에 닭살 돗듯 해요.}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그 남자가 혹시 손찌검이나 폭행이라도 한 적이 있는 거니?} {아니에요. 정반대예요. 겉으론 더 없이 점잖고 예의바른 신사예요.} {그런데도 그 자가 무섭단 말야?} {그런 친절이 어쩐지 가식으로 느껴져서 그래요.}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아무튼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루쯤 더 묵든가 그 남자가 안보일 때 집으로 돌아가든가 네 기분 내키는대로 해.} {고마워요, 언니......저 잠깐 2층 발코니로 올라가봐도 돼죠?} {왜, 그 사람이 아직 밖에서 지키고 있을까 봐서 그러니?} {네......} 대꾸에 풀기가 없고 안색마저 창백해 보였기에 나는 2층 발코니까지 동행했다. 발코니는 전망이 툭 트여 있어 집밖의 동정을 살피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문앞에서 보는 것보다 시야가 4~5배는 좋이 넓어져 있었다. {어, 언니! 바로 저 남자예요!} 내가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소리쳤다. {어디?} {이쪽요. 아니 거기 말고 언덕길을 쭉 따라 올라가다.....그래요. 거기요. 그 위쪽요.} 나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더듬더듬 쫓아가 마침내 문제의 인물을 찾아냈다. 골목이 막 꺾어져 돌아가는 길에 흑색 프린스의 본네트에 기대어 서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허리춤을 동여맨 베이지색 바바리를 입고 양손은 주머니에 푹 찌른 채, 180센티 가량의 키에 75킬로쯤 되어 보이는 체중, 험프리 보카트처럼 강인하면서도 이지적인 용모,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 담배를 짓씹으며 이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 남자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봄으로써 마치 자신이 이쪽을 의도적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 다음 프린스에 올라탔다. 프린스는 선텐이 돼 있었기에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것봐요. 제가 뭐랬어요?} 윤애라는 내가 그 남자를 볼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한 듯이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흥분하지 말고 좀 침착해. 저 남자의 이름이 뭐지?} {곽웅혁이에요.} {뭐하는 사람인데?} {구상하는 사업이 있어 요즘은 쉬고 있대요.} {사기꾼 아닐까?} {돈 많은 유한마담도 아닌 제게서 뭐 등쳐먹을 게 있다구요? 또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저도 아니구요.} {애라와는 나이 차이가 꽤 있어 보이는데?} {자기 말로는 미혼이라고 하던대요.} {순진하긴. 아내 있다는 바람둥이 봤어?} {아무렴 어때요. 이제 더 이상 저랑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요.} {저렇게 죽치고 앉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만만히 물러설 것 같지가 않은데.} 이 마지막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 내뱉고 나자마자 나는 후회가 막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애라는 금세 창백한 얼굴이 되어 걱정을 늘어놓았다.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인데 어쩜 좋죠? 언니가 한 번 만나줄래요?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만나서 야무지게 야단을 쳐줘요. 그러지 않고서는 저 사람 저기서 밤을 세울지도 몰라요.} 그녀는 제출물에 흥분하고 있었다. {내가?} 뜻밖의 요구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비록 이틀밤을 내 집에 묵는 동안 언니 아우 하는 친근한 사이가 되긴 했지만, 그녀의 사생활에 내가 적극적으로 끼어들기에는 우리는 서로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대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여서 저돌적인 자신의 행동이 이득이 되기는커녕 역효과만 낸다는 사실을 까맣게 못깨닫고 있다면 또 모를까, 애라를 대변해 내가 꾸짖는다고 해서 30대 후반의 사내가 순순히 저자세로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에 선뜻 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니가 설득하면 틀림없이 물러날 거예요.} 내가 망설이는 동안 애라는 칭얼대기도 하고 강하게 고집을 피우기도 하면서 나를 부추겼다. 그러나 나는 끝내 결심이 서지가 않았다. {내가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일단 기다려보자구. 엉덩이에 인이 배겨서라도 저기 저렇게 하루종일 지키고 있진 않을 거야.} 애라는 팔을 잡고 늘어지며 졸라댔지만 나는 외면하며 1층 거실로 내려왔다. 나는 그녀에게 얼음을 반쯤 채운 갈색의 조니워커 한 잔을 타주었다. 큰 컵 속에서 얼음 조각들이 빙산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거 마시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그럼 저 남자 가고 없을 거야.} {정말 그럴까요?} 애라는 잔을 받아들며 반신반의 했다. {이 언닐 한 번 믿어봐. 자, 이리와.} 나는 그녀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 커튼을 친 후 잠자리를 봐주었다...... 그러나 당일 오후는 물론 다음 날 오전까지도 흑색 프린스는 그 자리에서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자 애라는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당분간 내 집에 머물기를 원했다. {언니, 저 좀 도와줘요.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게 제일 안전할 거 같아요. 며칠 더 여기 있음 안돼요?} {무슨 소리야? 집에 며칠씩 안들어가는 게 말이나 돼? 걱정을 많이 하실 텐데.} {친구집에 있는다고 어제 연락은 해뒀었어요.} {밖에 있는 남자가 그렇게 두렵니?} {두려워요.} {아무래도 경찰을 불러야겠다.} 내가 수화기를 집어들려고 하자 그녀가 손을 덮쳐오며 적극 만류했다. {소용없을 거예요. 그 남자가 범법행위를 한 건 아니잖아요. 경찰을 부르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하지만 네 집까지 에스코트를 받을 수는 있을 거야.} {싫어요. 경찰은 싫어요.} {왜?} {......} {경찰을 대면하지 못할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니?} {아니에요......하여간 경찰은 싫어요.} {그럼 우리 이렇게 하도록 하자. 내가 차로 집까지 바래다줄께. 그 남자가 뒤따라온다 해도 내가 같이 있는 이상 별일은 없을 거야. 이제 됐니?} 애라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허탈해 하는 표정이었다. 어떤 숨죽인 기대가 일시에 무너진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간단히 나갈 채비를 한 다음 차고로 나왔다. 그녀는 말없이 뒤따라왔는데, 아쉬움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걸음걸이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BMW 앞좌석에 나란히 앉아 시동을 걸었을 때 그녀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 남자가 쫓아와서 우리차를 세우지는 않을까요?} {난 애라가 이렇게 겁장이인 줄은 몰랐어. 이건 영화가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비상시엔 둘이 목청껏 비명을 지르면 건장한 사내 열 명쯤은 달려올 거니까 마음 푹 놔.} 나는 리모콘을 작동시켰다. 위잉 소리를 내며 차고문이 가운데를 축으로 서서히 올라갔다. {어, 언니......여기에 일주일쯤 더 머무르면 안될까요?}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나는 핸드브레이크를 풀다 말고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대체 왜 그래? 무슨 문제가 있니?} {아빠한테 가기 싫어요.} {싸우고 집을 나온 게로구나?} {그래요.} {어쩐지.....하지만 화해는 빠를 수록 좋아.} {화해하고 싶지 않아요.} {감정은 일시적일 뿐야. 벌써 아빠는 애라를 용서하고 계실 거야.} {언닌 몰라요! 아무 것도 모르시면서......} 그녀의 언성이 높아졌다가 힘없이 잦아들었다. 중대한 얘기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심각해 보였다. 나는 시동을 껐다. 웅웅거리던 잡음이 사라졌다. {제 아빤 친아빠가 아니에요.} 그녀는 침통한 얼굴로 쓴맛을 다시며 말했다. {CF모델로 저를 전격 발탁해주신 스폰서가 있었어요. 제가 극단에서 말단으로 고생을 할 때였지요. 재작년 겨울인가, 추위로 꽁꽁 언손을 녹여가며 '맨발로 공원을'이라는 번안작품을 공연했었어요. 하루는 7시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에 앉아 피로를 씻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는데, 선배 언니 하나가 저를 조용히 밖으로 부르는 거였어요. 오늘 자기랑 단둘이 만나뵐 분이 있다는 거였지요. 그 언니는 요즘 세상 땅 짚고 헤엄치지 않으면 결코 성공을 하지 못할 거라더군요. 그러며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테니 잘 사귀어 보라는 거였어요. 처음엔 호기심 반 정말로 이 사람이 나를 밀어줄지도 모른다는 들뜬 기분 반으로 만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저는 그것이 제 인생을 방해하는 덫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한동안은 그 분의 도움으로 바람 탄듯이 잘 나갈 때도 있었어요. 그 얼마 후 연극의 주연도 맡게 되었고 L제과 초코렛 선전에도 나가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그 사람이 저를 도와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게다가 나중엔 마가 끼었는지 일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 언젠가는 당당히 사람들 앞에 내 성공을 자랑할 날이 올 때가 있을 거라고 믿었었어요. 헌데......그 결과는.....오늘의 제 솔직한 모습은 겨우 그 사람의 섹스놀이개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성공을 돈으로 살 순 없다는 말이 맞는가봐요. 전 너무 성급했어요. 노력도 하지 않고 명예를 얻으려 했으니까요.} {아빠가 언제부터 싫어졌지?} 나는 그녀의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아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그 사람이 내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 만큼 나도 뭔가를 줘야하겠다는 생각에서......}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어디지?} {서초동의 조그만 빌라에 있어요. 그 분이 사준 집이죠. 하지만 명의는 공동으로 돼 있어요.} {교묘한 수법이야. 그 사람은 물론 아내가 있겠지?} {아들 딸이 다 성장해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가봐요.} {파렴치한 사람 같으니라구!}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그 분 잘못만은 아니에요. 제가 좀더 똑똑했더라면......} {자학은 금물이야. 그래 이제 어쩔 셈이야?} {그 집에서 아예 나올 작정이에요. 결심이 섰어요. 헌데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서......} {친부모님이나 가족은?} {다 뿔뿔이 헤어졌어요.} {곽웅혁이라는 사람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어느 날 압구정동 카페에 앉아 있는데 그 남자가 접근해 와서 사귄 거예요. 그땐 정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었고 외로움을 달래줄 상대가 필요했거든요. 그 사람은 이미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제가 '쥬리아 오다이네'라는 연극에서 맡은 성처녀 쥬리아역에 매료되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세도가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혹을 뿌리친 쥬리아역에 저만큼 어울리는 여배우가 없을 거라면서 칭찬을 했어요. 전 우쭐해져서 기분이 좋았구요.} {그럼 그 사람을 두려워 한다는 건 전적으로 이곳에 있기 위한 핑계였니?} {반쯤은요. 과장된 건 사실이지만 웬지 그 남자를 만나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게 솔직한 제 느낌이에요.} {얼마나 깊이 사귀었지?} {별루예요. 그 남자가 몸을 요구했다면 거부하진 않았을 거예요. 헌데 그 남잔 성적인 호기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전혀 추근댄 적이 없었거든요.} {호색한은 아닌가 보구나......그건 그렇고 내 집에 머무르겠다는 건 어째서지?} {뒤뜰 별실에 거처하는 20대 남자랑 또......2층에 있는 젊은 여자를 봤어요. 그들처럼 저도 언니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애라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입을 떼었다. {그들이 나랑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는 거지?} {모르겠어요. 굳이 상상하려 들진 않았어요. 다만 제가 보기엔 그들이 몹시 행복해 보였어요.}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허나......이걸 너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그들이 나랑 사는 데는 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뭐랄까..... 설명하기는 어려워. 하여간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들은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될 사람들이야. 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얼마든지 혼자서도 세상과 싸워나갈 수가 있잖니?} {그렇지도 않아요. 지금은 막막해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요.} {그게 나란 말이니?}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일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네가 싫진 않아. 하지만......}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좋아.지금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네가 안정된 직장을 잡을 때까지만이야. 한 한두 달이면 되겠니?} {언니, 고마워요!} 애라는 내 품에 와락 안겨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된 이상 곽웅혁이라는 성가신 존재는 우리의 관심밖이었다. 그가 계속 집안의 동정을 살피는 것에는 신경이 쓰였으나, 그저 그뿐이었으므로 우리의 사생활이 크게 방해될 것은 없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그에게 무관심함으로써 지리함 때문에라도 그가 물러나 주기를 바랐다. 그런 소망이 알 수 없는 텔리파시의 힘을 통해 전달되기라도 한 것일까, 어스름이 내려앉는 해질 무렵 꼼짝없이 지키고 있던 흑색 프린스는 거짓말처럼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애라는 2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와 그 사실을 내게 알리면서 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을 부처님께서도 축복하는 모양이라며 기뻐 날뛰었다. {언니 전 자유로와요! 이제 아무도 절 방해할 순 없어요. 더 이상 외양만 번지르르한 명예나 명성도 저를 구속할 수 없어요. 내 원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펼쳐볼래요. 지난 번처럼 자만하거나 노력도 하지 않고 얻는 성공은 애초부터 바라지 않을 거예요.} 나는 엉겁결에 함께 기뻐했으나 그녀가 그렇게까지 해방감을 맛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표정이 풍부하다거나 상황이 일시에 급변하자 변덕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진정 애쓴 노고 덕택에 뭔가를 쟁취해 얻는 자의 기쁨, 그것이 아니라면 곧 닥쳐올 무한한 쾌감에 사로잡힌 듯한 흥분의 떨림, 바로 그런 깊이 모를 눈빛이 그녀의 얼굴에 빠알갛게 화색을 돌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애라의 기쁨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그런 느낌이 강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열이 올라 보조를 맞추면서 내일 성대히 동거기념 파티를 열자고 말해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환희의 난장판----떠들썩한 소란과 수다, 백포도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 밤을 지새는 잡다한 얘기의 꽃으로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명일은 쇼핑과 시장을 함께 보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턱없이 부풀어 있었는데---- 방문객의 급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쉼없이 반복되는 초인종 소리가 나를 깨웠다.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애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는 조심스럽게 시트를 걷어내고 침대를 벗어났다. 거실의 벽시계는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출부의 출근 시간은 12시였다. 더구나 오늘은 오는 날도 아니었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 인터콤의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누구세요?} {저.....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50대는 좋이 되어 보이는 탁한 목소리가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윤애라양을 만나뵈었으면 하는데요.} 나는 순간적으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송화구멍을 틀어막고 애라가 잠들어 있는 방쪽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이 사람은 누굴까? 곽웅혁이라는 사내가 보낸 하수인, 아니면 애라의 돈주머니 아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채 정신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부닥친 일이라 나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저, 실례지만 누구시죠?} {양동수라고 전해주면 알 겁니다.} 상대는 점잖고 예의발랐다. 말투에서 윽박지른다거나 강요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내 마음을 한결 놓이게 했다. 그때 마침 검은색 네글리제 차림의 애라가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언니, 아침부터 누구예요?} 그녀는 하품을 짓씹고 양팔을 벌려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부족한 잠을 떨쳐버리려는 듯 온몸을 뒤틀고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 수화기를 틀어쥐고, {양동수라는 사람이래.} 라고 짧게 말했다. {언니, 안돼요! 있다고 하면 안돼요!} 화들짝 놀라 잠이 달아난 애라는 손을 저으며 내게로 달려왔다.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어쩌지?.} {하여간 시치미를 떼봐요, 언니. 제발요......} {대체 누구니? 바로 그 아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초조한 기색으로 애라의 표정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송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여보세요, 집을 잘못 찾아오셨어요. 여기에 윤애라라는 사람은 없어요.} {애라양이 없다고 말하라고 시키던가요? 옆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뻔한 수작 그만둬요. 애라양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날 수 없소.} 사내는 내 대꾸를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냉철한 반응을 보여왔다. {그런 사람 없어요. 정말 없다니까요. 자꾸 성가시게 굴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그건 내가 더 바라던 바요. 애라양이 이곳에 납치됐다고 신고하겠소!} {뭐라구요?} 귀를 내 얼굴에 바싹 들이대고 통화를 엿듣고 있던 애라가 송수화기를 낚아챘다. 나는 그녀가 하는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빠, 만나기 싫어요. 돌아가세요......싫어요! 싫다니까요......아니에요......절대 그렇지 않아요.......만나기 싫어요......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제쪽에서 연락 드릴께요.......아, 안돼요! 그래서는 안돼요!......제발 그런 짓일랑은 하지 말아요......아, 알겠어요. 그럴께요. 그 장소로 나갈께요.} 애라의 얼어붙은 손가락 마디에서 송수화기가 풀썩 떨어져나갔다. 그것은 꼬불꼬불 감아져 올라간 스프링 같은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시계추마냥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제위치에 갖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래?} {자기를 만나주지 않으면 큰 소란을 피우겠대요.} {그래서 어쩐다고 했어?} {팔래스 호텔 커피숍에서 2시간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하필 왜 그렇게 먼 장소에서?} {제 집에서 가까운 곳이에요.} {그리로 불러내어 단단히 단속할 모양인가 보구나.} 윤애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얼굴을 감싸쥐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선 자세로 한참동안 그녀를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었다. {니 결심만 굳다면 잘 된 일이지 뭐야. 이 기회에 네 의사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밝히는 거야.} {고백은 어렵지 않아요.} 그녀는 내 품에서 떨어져나갔다. 눈물샘이 말랐는지 울음은 그쳐 있었다. 볼과 코끝에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그럼 뭐가 문제지?}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아빠가 이곳을 안 이상 제가 여기에 묵는 것을 가만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예요. 아빤 한 번 결심하면 꼭 하고 마는 성미예요.} {그건 나중 일이야. 일단 만나서 네 의사를 밝혀 보는 거야. 내가 동행할께.} 며칠 밤을 같이 지샌 덕에 꽤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속된 말로 그녀의 빼도 박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를 두고 나 몰라라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동행을 반색했으나 내심 크게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새삼 윤애라가 양동수라는 사내에게 연결된 고리는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만큼 무르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쩜 그녀는 이미 잘 길들여진 개처럼 그 사내에게 순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녀가 진정코 그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내 집에 머무르건 아니면 다른 곳에서 새생활의 터전을 잡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먼저 나와 있었다. 그는 쥐색 체크무늬 저고리에 붉은 벽돌색 가디건, 와이셔츠 역시 붉은 색 계통을 받쳐 입었으며 깔끔하게 핀을 꽂은 넥타이는 그 반대로 코발트빛의 파란색이었다. 전체적으로 맵시 있는 신사의 풍모가 풍겨났으나, 그것은 첫눈에도 건강한 멋은 아니었고, 어딘가 해지고 닳을대로 닳은 듯한, 순진하고 어리석은 영계들이나 후리는 데 이용될 뿐인 그런 약삭빠른 인상이었다. 10분만 대면하고 있어도 천박한 본성이 전염될 것 같은 그런 타입의 사나이였다. 우리는 긴장한 채 그와 마주보고 자리를 잡았다. 그는 처음부터 나의 합석에 언짢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신은 뭐요?} {애라의 후견인이에요.} 나는 준비했던 대꾸를 했다. {뭐, 후견인? 얼어죽을......다 큰 처녀애한테 무슨 후견인이 필요하단 말이오? 애라도 성인이오.} 양동수의 말투는 아까 인터콤을 통해 대화를 나눌 때와는 사뭇 달랐다. 말투뿐만 아니라 표정에도 점잖고 예의바를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의 상황 변화가 본성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애라는 제가 여기 함께 있길 원해요.} 내 말에 양동수는 애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뜨겁게 부어지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외면했다. 그는 배신감을 삭히느라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채 담배를 뻑뻑 빨아대다가, {우리 둘만이 할 얘기가 있으니 당신은 나가줘요. 제3자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관여할 일이 아니란 말이오.} 라고 했다. 나는 애라가 이 남자 앞에서 왜 이렇게까지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 짜증이 났다. 사내가 나를 궁지로 몰아붙일 때면 당사자인 자신이 적절히 나서줘야 나도 덤으로 할말이 생기게 된다. 헌데 그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먼산바라기를 할 뿐 아무 저항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 할 얘기가 뭔지 알고 있어요. 애라한테 대충 전후사정은 들었어요. 애라는 양선생님과 더 이상 동거를 원하지 않고 있어요.} 나는 수세를 면하기 위해 직설적으로 나갔다. 그 말에 양동수의 인상은 잔뜩 찌푸려졌다. 그는 다시 애라를 죽일 듯이 노려본 다음 말했다. {애라가 그쪽한테 뭘 어떻게 말했든 그건 여전히 내 사생활이오. 그러니까 서로 점잖은 체면 상하면서까지 언성을 높이지 말게 되길 바라오. 그래도 내 뜻을 모르겠소?} {제가 온 건 선생님 사생활을 왈가왈부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이 문젠 애라의 의사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젠 무슨 문제?} {선생님은 애라가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고 애라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문제지요.} {꽤나 잘난 체 하시는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번지수가 틀렸어. 애라가 나를 거부하는 건 일시적으로 기분이 뒤틀린 데 불과해. 누구나 감정이 상하면 무슨 말이라도 앞뒤 재지않고 쏟아낼 수가 있는 법이거든. 그런 약점을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부추겨서 애를 혼란에 빠뜨린 당신은 질이 나쁜 여자야. 안 그러니 애라야?} 느물대는 그의 말투에는 윤애라를 단숨에 제압해 버리는 어떤 무시못할 마력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꼼짝없이 숨통을 조인 듯 윤애라는 쥐죽은 듯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녀가 조금도 반발을 하지 않는 데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열불이 터져 나라도 꽥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봐. 애라가 동의하잖아.} 양동수는 그녀의 소극적인 반응에 우쭐해져서 윽박지르듯 말했다. {애란, 겁을 집어먹고 있어서 그럴 뿐이에요. 양동수씨의 요구에 따를 의향이 있어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잔뜩 주눅든 표정을 보시고서도 모르시겠어요? 혹시 눈이 삐신 거 아녜요?} 나는 갑자기 무슨 용기가 백배했는지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겁도 없이 나오는대로 주절댔다. 더 이상 예의를 갖춰 말할 것도 없었다. {뭐야? 아니 너 어디서 굴러먹던 계집애야? 입 찢어졌다고 꼴리는대로 씨부릴 거야? 콱 썅!} ㄸ밖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불쾌감을 느끼리라고는 예상했으나 이처럼 거칠고 모욕적인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양동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오른손을 벽돌격파를 하는 시늉으로 번쩍 치켜들어 나를 내려치려다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어금니를 앙다물며 손의 힘을 제풀에 스르르 풀었다. 나는 비명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수단이었다. 다행히 그가 중도에서 동작을 멈췄으니 나도 비명을 내지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양동수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우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의 흥분은 절제의 한도에까지 다다른 듯했다. 그를 더 자극시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 하지 못했다. 마침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으므로 나는 얼른 커피 세 잔을 시켰다. 하지만 양동수는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윤애라의 겨드랑이를 잡아채며 일어섰다. {나가자구! 저 미치광이한테는 신경쓸 거 없어. 집으로 가서 얘기하자.} {아빠, 미안해요......저, 전 언니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것은 애라의 가냘픈 입에서 최초로 아주 희미하게 새어나온 말이었지만, 양동수에게는 꽤나 충격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윤애라의 조그만 몸짓을 거의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삐뚤어지기는 했으나 그 만큼 그의 신뢰와 애정은 절대적이었던 것 같았다. 일그러진 그의 기묘한 얼굴과 눈빛에서 나는 한 가닥 '사랑의 끈'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아찔한 느낌으로 동요했다. 혹시 내가 이들 사랑의 방해꾼은 아닌지. 사랑은 모세혈관처럼 아주 섬세해서 습관이라는 외양에 의해 덮혀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두꺼운 육질에 가려 그 존재조차 까마득해진 채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좀처럼 의식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때 그것은 두통을 일으키듯 의식된다. 그 통증 앞에 당사자는 경악한다. 자신을 추동(推動)해 왔던 전에너지가 오직 사랑의 힘이었다는 인식이 그를 순간적으로 마비시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양동수의 표정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양동수의 얼굴에는 연민과 애욕의 잔잔한 느낌이 사라지고 즉물적이고 가증스런 공포와 분노의 감정이 서서히 떠올랐다. {너......너, 지금 뭐, 뭐라고 했지?} 그는 더듬거렸다. {아빠, 용서해주세요. 하지만......더 이상 아빠와 살고 싶지 않아요.} 매우 천천히 말했으나 애라의 발음은 정확했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내부의 갈등이 잠재워진 평온한 모습이었다. 양동수는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경악은 그의 얼굴을 서투른 진흙 반죽처럼 일그러뜨렸다. 호흡조차 정지된 듯 조용하기만 하다. 눈동자는 충혈되어 핏발이 섰다. {나쁜 년!} 손바닥이 윤애라의 뺨에 떨어졌다. 젖은 걸레로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고개가 획가닥 젖혀지며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졌다. 윤애라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자유가 육체적 쓰라림을 담보로 요구한다면 기꺼이 그런 비참한 처우도 감내할 용의가 돼 있다는 완강한 태도였다. 두 번째의 손찌검은 더 매섭게 얼굴 위를 훑고 지났으나, 윤애라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양동수는 금세 너그러워지며 회유책으로 나왔다. {애라야, 우리 이러지 말자. 사람들 많은 데서 낯부끄럽게 이게 무슨 추태야? 우리 조용히 집에 가서 얘기하자.} {싫어요! 전 언니랑 남겠어요. 갈테면 혼자 가세요.} 언니라는 소리에 순간적인 방심에서 깨어난 나는 뒤늦게야 폭력을 나무라고 나섰다. {아니, 연약한 여자애를 이렇게 개패듯 후려쳐도 되는 거예요? 완력으로 밀어붙인다고 멋대로 될 성 싶느냔 말이에요?} {내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넌 아가리 닥치는 게 신상에 좋아.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일이야.} 양동수는 위협을 주듯 흡뜬 눈을 부라렸다. 그러며 윤애라의 팔목을 거칠게 잡아채더니 강제로 밖으로 끌고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웬 낯선 사내가 다가왔다. {양동수씨 그 손 놓으시오.} 나는 언뜻 보기에 종업원이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달려왔나 했는데, 다름아닌 곽웅혁이라는 사내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은 톤에 전혀 윽박지르는 투가 아니었음에도 어딘지 쉽게 거부못할 힘이 배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양동수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다. 키뿐만 아니라 체구도 양동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양동수는 움찔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행색을 내리훑더니 얕잡아볼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위축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누구요?}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이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얘기합시다.} {대체 정체가 뭐요?} {자, 앉읍시다. 잠깐이면 돼요. 잠깐이면 소란을 피울 것도 없이 모든 게 깨끗이 해결됩니다.} 곽웅혁은 애라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양동수는 뻔히 보면서도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탁(茶卓)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애라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날라져온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나는 보리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자, 이걸 보시오.} 곽웅혁은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양동수 앞으로 내던졌다. {이게 뭐요?} {내용물을 꺼내 혼자 조용히 읽어봐요. 거기에 당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나와 있을 거요.} 양동수는 의혹의 눈길로 곽웅혁과 편지봉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국 편지지를 꺼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보았다.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동안그의 인상은 차츰 분노로 일그러져갔다. 다 읽고 났을 때 편지지를 신경질적으로 거머쥔 양동수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곽웅혁의 얼굴엔 만족스런 미소가 나타났다. {어쩌겠소? 그래도 애라양을 데려가겠소?} {당신 누구야? 애라와는 어떤 관계지?} {아아, 조용.} 곽웅혁은 입술 위에 집게 손가락을 갖다대며 말했다. {쓸데없는 질문은 삼가해요. 지금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나도 바로 행동에 옮기겠소. 자, 어쩔 테요?} 믿을 수 없게도 그 말 한 마디에 양동수는 씩씩댈 뿐 끽 소리조차 못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저만치 멀어져가서야 그는, {비열한 놈! 두고보자!} 라고 소리쳤다. {내 지시대로 따르면 아무 탈이 없을 거요. 그럼, 안녕!} 곽웅혁은 유유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흔들던 바로 그 손으로 애라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안으며 말했다. {괜찮니?} {고마워요, 아저씨.} 윤애라는 감사했으나 왠지 마음으로부터는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큰 봉변을 당할 뻔 했습니다. 헌데 아까 양동수 씨에게 보여준 것이 뭐죠?} 나는 그게 몹시 궁금했다.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앞으로 차차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죠. 그럼 전 이만......} 그는 주저없이 일어났다. {차라도 한 잔 드시고 가셔야죠. 이렇게 훌쩍 가버리시면 저희가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나는 윤애라를 대신해서 예의를 갖추었다. {보답은요? 천천히 흥분을 진정시킨 다음 돌아가세요. 애라도 잘 있구.} 곽웅혁은 그윽한 눈길로 윤애라를 내려다보았는데, 그녀가 고마웠다는 인사만 했을 뿐 눈길조차 주지 않자 몹시 낙담하는 기색으로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의 심정이 어떨까를 생각했다. ----사랑에 가슴앓이를 하는 불혹의 사내! 어떤 기분과 느낌으로 그는 세상을 사는 것일까? ----그의 끈질겨 보이는 열정이 비범하고 기이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윤애라에 대한 어쭙잖은 애정이 진정 사랑이라고 불리울 자격이 있는 것일까? 험프리보가트를 닮은 곽웅혁이라는 사내가 윤애라에게 보이는 애정에 대한 나의 관심은 안정된 일상(日常)을 되찾으면서 차츰 잊혀져갔다. 팔래스호텔 커피숍에서의 소동이 있은 사흘 후 윤애라의 옷가지와 살림도구들이 4톤 타이탄 트럭에 실려온 것으로 양동수와의 관계는 깨끗이 청산된 셈이었다. 곽웅혁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알고 싶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양동수가 거짓말처럼 윤애라에게서 손을 끊은 것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곽웅혁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윤애라는 그것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곽웅혁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마저 씻은 듯이 사라졌는데,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애초부터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질만한 건덕지가 없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윤애라는 퍽 행복해 보였다. 전미경과 표동표와도 잘 어울렸다. 특히 전미경과는 뗄 수 없는 단짝처럼 지냈다. 나는 그녀에게 굳이 그들이 나와 함께 살게 된 동기나 망상증에 대해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접촉이 잦다보면 하나씩 자연스럽게 알게 될 때가 오리라 믿었던 것이다. 나의 믿음은 그녀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얼마간 유효했다. 그런데 어느날 깊은 밤 서로가 불유쾌한 경험을 겪고 나서부터 그녀는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전후사정은 대충 이러했다. 나는 온종일 테라코타와 씨름을 하느라 몹시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때론 침대에 누웠어도 너무 지친 나머지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그날 새벽이 바로 그러했다. 머리꼭대기에서 발끝세포 하나에까지 녹아내릴 듯이 노곤한데도 잠은 쉬 찾아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채기를 한 시간 여---- 새벽 3시쯤 된 것 같았다. 비몽사몽간에 나는 누군가가 내 육체의 성감대를 뜨겁게 더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꿈이거나 착각이 아닌가 했는데, 부드러운 손놀림이 배위에 머물렀다가 차츰 아래로 훑어내려갈 때 그 느낌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누, 누구야?} {언니, 놀라지 말아요. 저예요. 애라예요.} 어둠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니가 이 시각에 여길 왜 왔지?} 나는 손을 더듬어 침대머리의 스탠드를 켜며 말했다. 불빛에 윤애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침대 한 귀퉁이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상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음영이 드리워진 큰 유방은 도발적이리만치 선정적이었다. 그녀는 탄탄하게 물이 오른 젖가슴을 자랑하듯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언니, 우리 함께 자요.} 그 음탕한 목소리는 징그럽게도 내 몸위를 애벌레처럼 기어갔다. {아니, 너......그건 뭐지?} 나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길고 딱딱한 물체를 가리켰다. {이건......흥분시키기 위한 도구예요.} {뭐야? 아니 너 그럼 내 하체에 그걸......저리 가! 썩 거져! 더럽단 말야!} 나는 그녀의 귓방망이를 올려친 후 비명을 내지르며 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욕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잠그고는 살이 익어 터질 것같은 뜨거운 샤워물에 온몸을 내맡겼다. 그것도 모자라서 쑤세미 같은 뻑뻑한 타월로 몸 구석구석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밀어댔다. 다음날 나는 윤애라를 당장 내쫓으려고 결심했다. 구역질나는 행위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침 일찍 그녀의 방을 찾았을 때 나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은 온통 자신이 가져온 색색의 화려한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녀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서커스의 광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짙은 화장이었다. 내가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듯 묻자 그녀는 태연스럽게 자신은 변신(變身)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왜 변신을 해야 하는지를 묻자 자신은 쫓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그날 오전 내내 추적망상(追跡妄想)에 시달렸다. 지난 번에 곽웅혁이라는 사내가 밖에서 지키고 있을 때보다 더 심하게 공포로 몸을 떠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연기경력이 있는 그녀가 내쫓기지 않기 위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숨막히는 표정이 3일간 변치 않음을 보고나자, 나는 추적망상의 본질이 동성애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추적망상이란 동성애적인 욕구에 대하여 자기방어를 하는 형식인 것이다. 그녀가 곽웅혁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근본적으로 그러한 것으로 여겨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의식속에서----상대는 반드시 남자다----자신의 여성에 대한 성적인 관심을 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 그런 방어기제를 뛰어넘을 만큼 동성애적인 욕구가 강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압구정동에서 누군가에게 쫓길 때(그 상대는 곽웅혁일 수도 있고 그녀가 상상한 인물일 수도 있다)많은 남성들을 제쳐두고 여성인 나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물주인 양동수와의 관계를 속시원히 청산한 것도 이성애를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녀의 병증의 다음단계는 나르시시즘으로 퇴행을 보일 차례였다. 왜냐하면 동성애적인 대상선택은 이성애적인 대상선택보다 나르시시즘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기도취는 스스로 변신이라 이름하였듯이 끊임없이 화장을 하고 하루에도 10번 이상이나 새옷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추적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나르시시스트들의 전형적인 정신상태가 표현된 것이기도 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만이 현실성을 가지는데, 그밖의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회색이나 무채색이며 자신만이 화려한 색상을 지닌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의 현실로부터 괴리되려는 노력, 일종의 자기내부에의 유폐----바로 그것이 오렌지족 윤애라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끊임없이 패션에 관심을 가지며 하루가 멀다하고 쇼핑에 열을 올리고 머리모양을 전날과는 180도로 바꾸고, 물이 흐려졌다는 핑계하에 항상 변덕스런 철새처럼 카페를 옮겨다니고, 한 번 입거나 본 것에 대해 금방 싫증을 내고, 선정적인 옷차림을 즐겨하며, 호사(豪奢)를 일삼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하는 삶은 그 자체가 성적인 도착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같았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 호사를 일삼는 것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동의어였다. 그것은 영어의 럭서리어스(Luxurious)라는 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했다. 더구나 그녀의 쾌락은 변태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변태성을 의식할수록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압구정동의 호사는 그런 그녀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윤애라의 불행은 그녀가 줄기차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음으로써 변신을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녀를 식별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녀의 삶의 허구성은 무의미한 변화를 시도하려는 헛된 노력----오로지 성적인 도착성에 기인하는----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압구정족 일반에도 해당된다. 뛰어난 패션감각이 압구정족이 갖춰야 할 제1의 조건인데, 그네들의 거리낌없는 주장은 마치 의상을 통해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기대가 전제 돼 있다. 그들은 매일 다르게 치장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미안하게도 바로 그 점이 그들의 엄청난 착각인 것이다. 의복의 단 하나의 가능성은 어떤 양식(쟝르)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 인격이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멋에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오해의 산물이다. 그들이 표현하려는 것은 오직 그들의 부류이며, 기성세대들과의 단절을 통해 자신의 참신성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신세대란 적절한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개개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 전체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고유명사로서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일반명사로사만 존재한다. 그들은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다만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은 지난 30년간 아버지 세대가 후일의 안락과 쾌락을 위해 주린 배를 참으며 은행에 저축해 둔 욕망의 응어리에 불과하다. 유행은 비록 삽화적이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언제나 어떤 종류의 욕망을 선명하게 폭로하는 법이다. 수입된 똥꼬치마에는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과 자신은 너무 섹시하니까 빨리 건드려 달라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분출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돈과 섹스뿐이라면 무엇을 근거로 압구정족은 자신을 참신한 신세대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돈과 섹스 만큼 진부한 것이 또 있는가? 그에 비해 동성애를 욕구하는 윤애라는 그 어떤 오렌지족보다 더 개성적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개성은, 비록 병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변신이나 출중한 패션감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개성은 오히려 신경증적인 언어인 의상과 얼굴화장----화장은 얼굴의 의상이다----을 통해 드러난 레즈비언의 동성애적인 욕구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5. 회화를 통한 정신치료 내가 압구정족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돈과 욕망의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겉보기에는 변화가 잦지만 진정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허약한 정신세계를 재빨리 알아본 데 있다. 그들은 데생실력이 모자라 은근짜로 유별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포스트모던한 아티스트들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굉장히 떠들썩하지만 내부가 텅 빈 자기의식이 없는 인간들이다. ----형태 없는 모습, 색깔 없는 그림자 마비된 생명, 움직임 없는 제스처 T.S.엘리어트의 시에나 어울릴 그들은 오늘도 오프너로 <욕망의 통조림>을 까는 데만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통조림이 새로운 것이라고 좋아라 떠들어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5년 전엔 듣보지도 못한 레떼르가 붙은 통조림일 뿐이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버드와이저는 낯설지만 OB의 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크리스찬 디올은 세련될지는 몰라도 태평양화장품의 립스틱과 같은 분홍색이다. 페스티바(Festiva)라는 딱지를 붙여야 프라이드를 탈 때 프라이드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품들의 비교에서 나는 욕망의 충족은 국산품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거나, 욕망의 충족은 절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욕망이 수동적인 한 결코 새로운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자발적 의지를 가져야 하며, 새로운 욕망을 원하는 사람은 기꺼이 그것이 새로운 곤궁의 시작임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애라의 욕망이 어떤 오렌지족의 그것보다도 더 새롭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녀가 동성애를 욕구함으로써 더불어 그것이 수반할지도 모를 고통을 받아들인 데 있다. 그 고통의 증거는 그녀에게 생겨난 추적망상증이다. 상상컨대, 일반적인 오렌지족이 새로운 욕망에 뛰어듦으로써 지불하는 수고는 특수형 콘돔을 새것으로 바꾸기 위해 500원짜리 동전을 구입하거나 정액으로 더럽혀진 스캉달 팬티를 아무도 몰래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는 정도일 것이다. 반복하거니와 오로지 아버지의 지갑에서 나오는 그들의 수동적 욕망에는 고통과 곤궁이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신세대의 경험이라고 황홀해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이기는커녕 고루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예술가를 자처해온 나로서는 과연 어떤 새로운 욕망에 참여할 수 있을까를 반성했다. 그것은 당연히 창작을 통한 욕망의 발산일 거였다. 회화에 있어 내가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는 비늘조각처럼 부서지는 눈부신 빛이나 늦가을의 황금빛 들판,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광활함과 같은 따위였다. 그 속에서 인간은 조그맣게 왜소화되며 자연과 빛속에 투영된 세계만이 주조를 이룬다. 나는 그 궁극적인 목표와 이상의 전형을 인상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에서 찾곤 했다. 런던 테이트 화랑 소유의 <빛과 색----괴테의 색채론>이라는 1843년경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그 즉시 내 예술인생의 미래를 결정했을 정도였다. 그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태양을 화폭에 크게 그려놓은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다만 중앙부분에 형체가 뚜려하지 않은 나체의 여인상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역시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조금은 해괴해 보이는 사람의 무리들이 뒤엉겨 있다. 색채는 좌측이 어둡고 우측으로 갈수록 차츰 밝아진다. 20세기의 시각에서 보면 원자탄의 광선에 노출된 비참한 인간들의 군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면 언제나 자유로움과 풍성한 여유를 만끽하곤 하였다. 동시대의 들라크르와의 그 여백없는 빽빽한 작품----<사르다나팔르>의 죽음이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을 보라----을 대할 때 느끼는 숨막힘과 답답함 같은 것이 깨끗이 해소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앵그르 또한 관능에 집중하는 힘은 있으나 숨통을 조이기는 마찬가지다. 그에 반해 터너는 인간이나 인간의 육체에서 해방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빠른 속도로 인간사의 추악함에서 자연의 풍경으로 달아난다. 거기엔 밝은 빛이 있다. 그리고 인간을 압도하는 바다와 노을과 안개가 있다. 비평가 존 러스킨에 의하면 터너의 최고 걸작은 1840년에 그린 <노예선>이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 작품의 초점도 역시 햇빛에 있고 폭풍에 거칠어진 파도는 그 반사를 받아 요란한 색채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그 평가가 어쨌거나, 내가 언제나 황홀해 하는 것은 노란색과 오렌지색을 배합한 하늘의 풍경이다. 그의 하늘은 장엄하고 숭고하며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놀라운 손길이 느껴지는 그런 하늘인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느끼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자연으로 도피하는 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과연 나의 새로운 욕망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 앞에서----그것은 터너가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나는 조각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서양에서 조각은 가장 보수적인 예술이라 불리워진다. 조각을 할 때 기본적으로 다뤄야 할 재료의 성질상 그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또한 조각은 그리이스 예술의 엄청난 영향력 밑에 있기 때문에 좀처럼 인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회화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념과 사실을 배척하고 근원적인 게쉬탈트의 형태----예술의 비인간화이다----를 추구할 때도 조각은 여전히 인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추상조각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곤잘레스조차 인간의 생물학적 연관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자코메티의 <광장>은 네모난 판에 5벌의 젖가락을 꽂아놓은 것처럼 단순화 돼 있지만, 여전히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는 인간적인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여, 나는 굳이 추상조각을 본뜨기보다는 평범한 조각가들이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본능적인 인본주의를 따르기로 했다.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리이스인들이 도달했던 세계관에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감히 신적이고 숭고(崇高)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하여진다. 중세에는 그런 욕망 자체가 금기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리이스의 조각은 그 일을 수행하였고 또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것이 공통적으로 인정된 견해다. 숭고한 것은 낭만주의 이래로 [유한속의 무한]이라는 말로 집약되어 왔다. 더 비근하게는 우리가 여고시절 배운 적분(積分)에서도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난다. 폐곡선으로 둘러싸인 면적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골머리를 쥐어짜며 y= f(x)dx로 표현되는 공간의 무한분할을 시도하는 것이다. 수업중에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학생이 수학선생님에게 묻는다. ----시간속에 한정된 인간이 어떻게 무한분할을 시도할 수 있는 겁니까? ----쓸데없는 일에 관심 갖지 말고 문제나 풀어. 그런 건 시험에 안 나와. ----'리미트(Limit) x가 무한에 접근할 때'라는 것을 인간은 어떻게 인식 하는 겁니까? ----헛소리 말라니까! 나의 알고 싶은 욕망은 그렇게 선생님의 무지와 완고함에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후 3년이 지나 미대에서 아폴론 류의 그리이스 조각품을 접했을 때 같은 의문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감성적인 단편(斷片)속에 어떻게 전체(무한)가 나타날 수 있는가? ----극히 한정된 전경(前景)에 어떻게 압도적으로 위대한 것이 나타날 수 있는가?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비감성적인 것이 어떻게 직관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으로도 대두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내 손을 거친 형체 위에 표현되어야 할 것이므로, 현실에서의 내 주된 관심은 진흙을 다듬어 섭씨 800도의 가마에서 여하한 잘 구워내느냐 혹은 석고의 건조처리를 얼마나 수완있게 하느냐 하는 따위였다. 요즘은 대리석이나 브론즈로는 작업을 통 해보지 못했다. 내가 테라코타(Terra-Cotta)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초가을 아버지의 손을 잡고 [권진규전(權鎭奎展)]을 보고 난 직후인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당시 나는 내가 관람한 것이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테라코타 작가----고 권진규 씨의 작품은 전부가 테라코타이다----의 작품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 낯선 경험이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만지작거리던 점토조형에 흥미를 가지는 계기가 되어 오늘까지도 손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들어 내가 테라코타에서 특별히 기대하는 게 또 한가지 있다. 테라코타의 수공작업(手工作業)에는 어린시절의 흙장난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본능적인 즐거움이 있는데,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감정을 통해 전미경, 표영표, 윤애라의 망상증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인 것이다. 그에 비해 석고작업은 전적으로 내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나는 실물 크기의 인물상을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먼저 모델이 취할 자세에 따라 몇 개의 주형으로 나눌지를 주의깊게 설계한다. 기본적으로는 머리, 상체, 하체로 나눠지지만 굴곡이나 섬세한 표면처리가 요구될 때는 6개 정도로 나눠 작업한 적도 있었다. 주형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이드로스톤이라 불리우는 산업용 석고에 적신 천을 모델의 신체 각 부위에 감아서 만드는데, 신체의 형태와 양감 혹은 옷을 입었다면 그 질감이 사실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모델의 적극적 협조는 필수적이다. 더구나 석고를 온몸에 뒤집어쓰는 고역을 치뤄야 하고, 숨을 내쉬거나 발끝 하나 움직이는 데도 조심을 해야 하는 세심한 주의력이 요구된다. 언젠가 한 번은 모델이 되어준 대학 동료가 작업 중도에서 복통을 일으켜 작품을 망친 적도 있다. 몸매가 늘씬하지 못했던 그녀는 배의 군살을 내보일 수 없다며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석고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런 웃지 못할 우를 범했던 것이다. 테라코타도 마찬가지이지만, 내가 석고작업을 하는 것을 본 친구들은 내 작업의 목적이 뭐냐고 묻곤 한다. 나는 물론 [의자에 앉아 쉬는 남자]나 [빗자루를 든 청소부] 혹은 조형에 간단한 배경장치를 가미함으로써 현대인의 평범한 일상성을 도모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표현하려는 주제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이 내 궁극적인 목표일 수는 없다. 나는 다만 기초실력이 미흡하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기 때문에 테라코타와 석고작업을 통해 보다 완벽한 경지로 나아가고자 한다. 조각분야에 관한 한, 나는 그리이스의 누드에 전적으로 마음이 쏠려 있다. 내가 그토록 감동해마지 않았던 태양신 아폴론 계열의 작품도 이에 속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현존하지 않는 아테네상을 기어이 내 두손으로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싶은 욕심도 있다. 누드에 대해서는 아직 일반 감상자들의 오해가 깨끗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반인들은 벌거벗는(naked) 것에 대한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단순한 나신(裸身)과 누드(Nude)의 차이를 종종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이스 예술에 있어서 누드란 단지 알몸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균형잡힌 건강한 육체를 재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전적으로 재구성된 이미지다. 하지만 아무리 재구성된 이미지라고는 하나 예술가 혹은 작품 그 자체가 저속하기를 쉽게 그쳐버리거나 관능성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며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존속해왔다. 그렇긴 해도 또 그와 상반된 주장도 공감을 얻고 있다. 즉, 누드는 예술의 주제가 아니라 BC 5세기에 그리이스인들이 창안한 예술형식이라는 것이다. 이 언명이 전적으로 옳다면 소설이 시보다 더 관능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빈트가 맞지 않아 보이듯이, 누드가 다른 예술작품보다 더 관능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대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지 예술가의 개인적인 믿음이거나 미술사가의 편의적인 분류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보편타당할지 모른다. ----누드는 저속하고 관능적이긴 하지만 또한 하나의 이념(理念)이며 기하학의 축복을 받을 만큼 신성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관능성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인 이념이라고 했다. 그는 또모짜르트의 <돈 지오반니>----'돈 지오반니'는 '돈 후안'의 이태리식 번역이다----는 음악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형식을 통해 가장 추상적인 이념인 관능성(돈 후안의 바람끼)을 다뤘기 때문에 그 작품은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격찬했다. 관능성이 추상적 이념이라는 전통은 전적으로 그리이스적인 것이다. 그리이스인들은 음악을 제외할 경우 가장 추상적인 예술양식으로 평가되는 건축조차 인간의 신체적 비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팔과 다리를 뻗음으로써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딱 들어 맞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랜 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원속에 인체를 접합시키기 위해서는 두 다리를 벌려야 하며 그렇게 할 경우 두 다리를 합쳤을 때보다 신장이 1/14쯤 짧아져야 한다'고 했다. 벌거벗은 인간 신체의 기하학적 구조와 원! 양자의 대비는 누드가 지금도 물질(matter)이 이데아(form)로 변용(變容)되는 완벽한 예임을 보여준다. 누드는 저속한 성적 흥분을 야기시키나 그것은 하나의 이데아이기도 하다. 그것은 원을 보는 그리이스인들의 눈이 수학적 통찰로 끝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원을 바라보며 집중과 평정과 완성에 대한 자신들의 욕구가 성취된 것으로 느낀다. 이때 신은 원으로 정의된다. 신이란 중심이 도처에 있고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무한한 원이다. 시야를 그리이스에서 떠나 서양의 장구한 지적 전통으로까지 넓혀 보면, 정사각형 또한 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각형을 살아 있는 형태로 본 휘트먼(Whitman)은 이렇게 말했다. ----신성한 정사각형을 찬미하라, 사각형에서, 변들에서, 오래되고 그리고 새로운 사각형에서--- 정사각형의 아주 신성한 것에서, 견고하고 네 변이 있는 것에서 (그 모두는 불가결한 변이다)...... 그 변으로 보아 나는 여호와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뚫고, 원과 정사각형이라는 완벽한 기하학의 형상을 통해 신으로까지 뻗어려 나가려는 노력----이 그리이스인의 놀라운 욕구야말로 <새로운 욕망>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하나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이스인의 시각에는 인간과 신 사이를 경계짓는 어떠한 불연속성이나 논리적 단절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신념은 수학적 기하학적 사유란 곧 신의 사유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인데, 중세에 들어서면서 왜 이런 사상에 불경스럽다는 철퇴가 가해진 것일까? 그 최초의 희생자는, 이미 그보다 훨씬 오래 전 구약성경에 적힌대로, 스스로 전능하기를 원했던 루시엘이라는 천사였다. 그는 교만에 빠져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다 결국 저주를 받아 지옥의 왕 사탄이 되고 말았다. 천사는 왜 신이 되기를 바라면 안되는 것일까? 천사의 솔직한 욕망은 대체 왜 저주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으며 창조가 행해질 때 각 개체에 확고한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 주어졌다. 그로 인해 어떤 개체든 주어진 논리적 형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 루시엘은 바로 그 숙명을 탈피하려 했던 죄로 응징을 당한 것이다. 창조의 전체 모양은 연속적이 아니다. 각 단계마다 계단상의 굴곡이 있는데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계단을 뛰어넘어 윗계단으로 올라설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위계질서이다. 나는 어린시절 떡갈나무숲을 거닐면서 이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떤 적이 있었다. 숲을 거닐 때마다 매번 나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으면서도, 나는 떡갈나무들이 비명을 내지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은 쉽사리 거두어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디즈니랜드에서나 나무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논리적 형식은 주어진 삶의 형식(Life form)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하나의 심각한 의문이 떠오른다. 누구든 삶의 형식을 벗어날 길이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새로운 욕망이 가능한 것일까, 또 무엇을 원하든 삶의 형식 안에서라면 대체 진부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인가? 이 의문을 재삼 반추할 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을 통해 종교적 열반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다소 황당무계한 상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 용감하게 애욕의 흐름을 끊어(截流而渡) 모든 욕심을 떠나라. 바라문이여,(無慾女梵) 모든 지어진 것, 없어지는 줄 알면(知行己盡) 나지도 죽지도 않는 진리에 들어가리(是謂梵志) ****** 불가에 의하면 세속의 잡다한 욕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열반에 들 때만이 인간은 윤회(輪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윤회란 중생이 성도수업(聖道修業)의 결과 해탈을 얻기까지 번뇌, 유견(謬見), 업(業)등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일이란 뜻이지만, 그 의미를 축소해 일상에 빗대어 보면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을 탈피하지 못하는 진부한 욕망의 노예가 된 삶의 상태라고도 해석될 수가 있을 법하다. 예술이 절망에 기초한다는 것은, 내게는 일상사의 진부한 삶을 타파할 비전을 좀처럼 찾지 못할 때 예술가가 느끼는 자기학대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그리이스의 누드에는 지상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천상의 삶을 욕구하는 인간의 의지가 나타나 있어 나를 매료시킨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존재방식이며, 이카로스(Ikaros)가 밀납으로 만든 비행 날개를 타고 태양에 접근하다 추락한 것처럼 나 자신도 죽음을 불사하고 눈부신 광휘속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헌데...... 이런 불길같은 욕구, 때론 현학성에 빠지는 우를 범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더듬는 나의 정신적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논리적 형식이나 삶의 형식이라는 숙명이 가능하다면 심리적 형식(Psychological form)에 갇힌 숙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20세를 넘으면 더 이상 신체적 발육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믿으면서도, 인간의 심리 상태도 어느 순간 그와 유사하게 고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오래된 편견이 있다. 그 편견은 19세기말과 20세기에 들어와 수많은 위대한 심리학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심리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신체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외형적 부피를 갖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유래된 것 같다. 그 막연한 생각이란 무지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멀리 돌이킬 것도 없이 전미경, 표영표, 윤애라가 바로 그 예들이다. 내가 오갈 데 없는 그들을 받아들여 집에 묵게 한 것은 자선적인 차원에서 보양원(保養阮) 노릇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얼어붙은 표정에서 측은한 마음을 느낀 것은 사실이나 도움을 베푼다는 순수한 열성이 앞선 것은 세 번 아니었다. 나는 파리에서 귀국한 순간부터 알지 못할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왔다. 정체 모를 막연한 그것은 심리 불안증을 유발시켰다. 이제 고국에서 혼자, 그것도 이혼녀라는 낙인이 찍힌 가운데 매사를 처리해야 하는 부담 이상의 무엇이 항상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허영심에 들떠 서둘러 개인전을 가지려 했던 것도 그런 불안한 감정과 무관하지 않았던 듯싶다. 대체 그 무엇이 나를 쫓기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나를 괴롭히는 실체를 알고 싶었다. 내가 심리분석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 전부터이지만 그 지식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 보려는 욕구를 느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헌데 그런 욕구를 의식하는 자체가 불안에 무방비로 노출 된 나의 심리를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더 큰 불안에 사로잡히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자기를 스스로가 분석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나는 숨을 죽이고 출발점을 생각했다. 분석하는 자기와 분석되는 자기...... 만일 분석하는 자기가 왜곡돼 있다면 분석되는 자기가 왜곡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분석하는 자기가 왜곡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분석된 자기가 진정한 나라는 보장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관념에서부터 혼란을 일으킨 나는 의식적인 자아(ego)와 자아(self)를 구분하는 융의 지침에 따르기로 했다. ----자아(self)의 의식화란 거의 불가능하다. 자아의 전체성에는 항상 무의식적인 자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자아는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양자를 포함하고 있는 전체성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자아는 우리들 인생의 목표이다 융은 여기서의 자아(self)는 일종의 원형(Archetype)이자 전본체(全本體)이며 서양 문화권에서는 <그리스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융과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굳이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 내가 결국 도달하려는 목표는 의식적인 자아(ego)가 알지 못하는 불안의 요소가 합일의 상징인 자아(self)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여하한 그것을 밝혀내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그것이 의식화되는 범위 안에서만 의식에 알려질 것이므로, 아직 <전인미답의 밀림>을 얼마나 속속들이 파헤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었다. 나의 이런 희망을 더욱 부채질 한 것은 인식될 수 없는 자아(self)가 인식되기 위해서는 4로 분열, 전개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이었다. 1년이 4계절로 분할되는 것, 인식이 사고(思考) 감정(感情) 감각(感覺) 직관(直觀)으로 나뉠 수 있는 것, 수평선을 네 천체의 방향으로 나누는 것 따위가 다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리이스인의 누드에서 정사각형과 원의 기하학적 형상을 통해 신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발견한 것과 흡사했다. 원이 무의식의 차원이라면 정사각형은 의식의 차원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원의 면적이 파이알제곱으로서 파이의 값이 무한히 떨어지지 않는 반면, 정사각형은 한 변의 길이만 측정이 되면 면적은 변의 곱하기로서 당장에 산출이 가능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이 보인다. 내가 4라는 숫자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를 깨닫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후 나는 뭐든지 4가지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고 말았다. 우선은 내 무의식에 대한 탐구에서 누구도 내게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외곬수적인 가정 하에 다음과 같은 4가지 방침을 정했다. ----자기 자신보다 나은 스승은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을 남이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한 대답을 알고 있을 수 없다 ----스승 또한 스스로를 가르칠 뿐이다 하지만 자기가 스승이 되어 스스로를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하고 다뤄야 할지부터가 막막하고 난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를 짓누르는 원인 모를 불안감은 가셔지기는커녕 한층 더해만 갔다. 내가 전미경을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지만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내 집에 머물게 한 것은 그녀의 망상증에 대한 연구가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기심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되었다. 드러난 것과는 달리 내심 나는 표영표와 윤애라가 꼭 나와 함께 생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알 수 없게도 나는 그들과의 만남에 운명적인 상징성을 부여하고 싶은 미신적인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 내 불안한 심리를 저울질하는 야릇한 쾌감에 떨고 있었다. 윤애라도 내 집에 묵게 되리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4라는 숫자에 다시 한 번 미혹되었다. 그때의 감정과 흥분의 빛깔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숫자를 더 보태는 양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마지막 한 명을 더 채움으로써, 마침내 오래 꿈꾸어오던 것에 점안(點眼)을 하기라도 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종지부를 찍는, 아마도 숙원이 달성되는 순간이어서 생애 최고의 전율을 느낄 듯한, 다만 유쾌한 쾌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포속에 오히려 쾌감이 스며든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는 기대로 달아올랐다. 나는 그런 감정을 상상속에서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었다. 서둘러 상대를 택함으로써 일을 그르치거나 절정에 빨리 도달함으로써 아쉬움을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상대를 천천히 머리속에 그리면서 3명의 망상환자들을 돌보는 데도 성의를 다했다. 나는 그들의 병을 치료할 몇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들에게 약을 조제해 와 먹이는 일 외에도 하루에 한 번씩 마음을 평온케 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일----바하의 <무반주 파르티나>나 베토벤의 <현악4중주>는 망상증 환자에게 특효가 있다----그리고 간단한 대화와 그림그리기를 통해 증상을 치료해 볼 셈이었다. 일개 무명의 화가에 불과한 내가 정신병자들을 치료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앞뒤 재지않고 과욕을 내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회화를 통한 정신치료의 근거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단어, 구, 문장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심상(心象), 공상(空想), 꿈(夢) 및 다른 종류의 회화적 표상으로도 생각한다; 미술(美術)만이 욕망이나 좌절과 같은 부조리하고 초 이성적인 실체를 [형태]로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예술이 무의식에 봉사할 수 있다는 것----무의식적인 욕구를 회화로 표현시킴으로써 치료에의 실마리를 잡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매일 회화적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 망상증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전단계가 있다. 그것은 망상환자들의 특징을 고려할 때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단계다. 망상환자들은 극단적으로 일반화된 원칙으로 스스로의 생활을 얽어매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것은 삶의 풍부한 유동 자체가 그들에겐 불안을 유발시키는 인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온갖 행동을 추상적 공식으로 다루길 원한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미경, 표동표, 윤애라도 그런 증상을 나타냈다. 전미경이 가장 불만인 것은 우리의 치료가 작년 10월이나 11월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녀는 만일 그때부터 치료가 이뤄졌으면 치료기간이 두 해에 걸치게 되어 대칭력이 생기기 때문에 자신의 병이 벌써 낳았을 거라고 말했다. 표영표는 자기방의 침대를 정중앙에 옮겨 놓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이따금은 줄자를 갖다달라고 법석을 떨곤 한다. 윤애라에게 주차를 시켜보면 그녀는 차를 주차선의 정중앙에 놓기 위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1시간을 주차에 시간을 낭비한 적도 있다. 이들의 이런 조직화는 행동뿐만 아니라 사고에도 드러난다. 그들은 결국 톱니바퀴처럼 빠져나갈 틈이 없는 논리적인 사고의 피해자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느슨한 감을 주는 유비적(類比的) 사고방식을 주입시키는 일이다. 점성술이나 사주팔자 같은 것도 다 유비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연상(聯想)을 통해 말 이어가기를 해보는 것이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다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길면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다 높은 것은 백두산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아니면 이런 식도 좋다. ----바다 삼천포 애인 미스코리아 화장품...... 바다에서 항구도시인 삼천포로의 연상은 객관적이지만, 삼천포에서 애인으로 넘어가는 단계엔 특수한 개인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삼천포에 가서 애인과 서대회를 먹었다면 얼마든지 그런 연상은 가능하다. 또 그 애인은 미스코리아 뺨치게 예뻤고 그 미스코리아는 화장품 선전에 나왔고...... 망상환자들이 연상을 통해 말을 이어가는 것은 운동선수들이 운동을 하기 전에 몸을 유연하게 푸는 것과 같은 행위다. 그것이 끝나면 회화실로 들어가 단순한 도형들을 단위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현실과의 생생한 접촉이 상실된 그들은 평소 기하학적 관념에 탐닉하게 되는데, 도형을 통한 그림그리기는 그런 기분에 만족감을 주기에 적합한 방법인 것이다. 게다가 이 방법은 그들이 연상놀이를 통해 혹시 불안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배려에서 채택된 것이기도 하다. 이 단계를 거쳐서 안정감이 확보되면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회화에 착수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특별히 고안된 프로그램에 따르도록 되어 있다. 제1단계에서는 풍경화나 정물화로 소재를 제한한다. 자연의 스케치가 인성을 순화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이 증오하고 있을 인간들을 피함으로써 조심스럽게 문제의 핵심이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제2단계에서는 각자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되어 있다. 초상화에는 자신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선명하게 폭로될 수 있을 것이므로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제3단계에서는 부모를 그리도록 되어 있다. 어떤 심리적 동요도 없이 부모상을 그려낸다면 한결 치유에의 밝은 전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과정을 거치지만 각자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몇 가지의 특별한 방법이 보태진다. 이를테면 표영표의 경우는 김일성씨를 그려보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때 만일 그가 김일성씨를 계속 크게 그린다면 그의 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림에서 대상을 크게 그리는 것은 그 대상이 위대하거나 두려운 느낌을 가질 때 행해지기 때문이다. 윤애라를 위해서는 내가 직접 그녀 앞에서 누드모델이 되어줄 작정이다. 만일 그녀가 여전히 탐색하는 눈으로 내 알몸을 받아들이다면 치료기간은 더 연장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미경의 경우도 유사한 적절한 방법을 강구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그들이 사용하는 물감이나 크레용의 색상, 붓의 크기, 도화지 사용법 같은 것이 체크될 예정이다. 유감스럽게도 치료가 시작된 이후 지난 2주 동안 지정된 시간에 맞춰 작업을 한다는 것과 연상놀이 그리고 도형을 단위로 한 그림그리기 정도만 실행에 옮겨졌다. 학교수업을 받듯 지정된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을 가장 못참아한 사람은 예상대로 윤애라였다. 그녀는 채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내 처사가 부당하다고 대들었다. {대체 우릴 뭘로 취급하는 거예요? 유치한 말장난이나 하고 그림 나부랭이를 그려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비록 우린 갈 데가 없지만 이런 처우는 곤란해요!} 나는 그녀에 맞서지 않고 다만 1시간 이내에 내 집을 떠날 건지 아니면 내 지시에 따를 건지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했다. 그녀는 울며 방을 뛰쳐나갔으나 다음 날 밤에도 그녀는 내 집에서 잠을 잤다. 다행히 반발은 크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 2시간 그들을 잡아놓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 두었다. 외출도 허용했으나 귀가시간은 저녁 8시로 한정했다. 그렇게 한 것은 강제성을 띠기 위한 의도여서가 아니라 3명을 관리 보호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너무 늦은 귀가는 서로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망설인 대목은 과연 용돈을 주는 것이 바람직할까 하는 문제였다. 나는 그들이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길만이 그들이 건강한 인간으로 사회에 복귀하는 첩경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바램과는 달리 누구도 돈을 스스로 벌어쓰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의 보호에 퍽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따뜻한 보호가 그들을 퇴행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며 나는 결국 그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기로 했다. 전미경과 표영표는 외출이 거의 없어 돈의 양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 적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 번도 외출을 거르지 않는 윤애라는 돈이 적다며 언제나 툴툴거렸다. 그녀는 사치를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성미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옷을 사야 한다고 땡강을 부렸다. 나는 그때마다 설득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녀가 입을 수 있는 쓸만한 내 옷을 빌려주는 것으로 요구를 무마시킨 적도 있었다. 그녀는 치료 프로그램에 참가한 후에도 생활의 기본적인 패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빈둥거리거나 방안에 틀어박혀 드래곤볼이나 서극 감독의 홍콩영화에 매달려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숨가쁘게 전화를 걸어 외출을 일삼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러나 망상증만 아니었다면 저렇게 태평스럽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샘나는 장점이 많은 아가씨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V.나보코프의 소설 '어두운 방(camera obskura)'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고트 피터즈 같은 인상을 느끼곤 했다. 마고트는 3마르크 반을 화대로 받고 하룻밤에 일본인 둘을 상대하는 천박한 여자이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어리석은 알비누스에게는 이런 모습으로 비쳐진다. ----아무리 보아도 매혹적이기만 한 그녀의 얼굴, 타는 듯한 뺨, 체리빛 브란디로 빛나는 입술, 엷은 고동색의 큰 눈에 있는 천진난만한 엄숙함, 그리고 왼쪽 눈 바로 밑의 부드러운 곡선에 있는 솜털이 난 작은 사마귀......이 여자를 쳐다보면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그래도 난 쳐다볼 거야. 눈밑의 솜털이 난 작은 사마귀를 빼놓고는 윤애라도 마고트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라도 한 번만 보면 흠뻑 빠져버릴 매력적인 여자였다. 내가 남자였대도 그녀를 품어보기 위해 알비누스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따금은 양동수의 심정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윤애라는 다시 많은 남자들과 교제를 튼 것 같았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만도 하루에 10여통은 좋이 되었다. 나는 그런 사생활까지 파고들어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날이 갈수록 귀가시간이 자꾸 늦어지는 것과 과연 그녀가 여러 남자를 오가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무절제한 생활이 향후 그녀의 망상증 치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염려될 뿐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만나고 다니는 남자중에 양동수는 끼어있지 않은 듯했다. 나는 가능하면 그녀가 과거에 맺었던 인연에 연연해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가 치료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면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오염된 과거를 깨끗이 청소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사생활은 동성애뿐만 아니라 난음(亂淫), 황음(荒飮), 대마초 끽연, 노름, 심지어는 마약이나 흥분제가 침투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키치(Kitsch) 세대인 그녀에게 저속한 것에의 애착은 일상적인 취미에 가깝고, 그런 방탕하고 자유로운 허용심이 동성애에도 관용을 보인 것이라면 독버섯의 자양분이 되는 무위도식의 생활 자체가 무엇보다도 청산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내가 곽웅혁의 전화를 받고 심히 못마땅했던 것은 윤애라가 외출한 후 오후 내내 그런 우려에 사로잡혀 있은 탓이었다. {애란, 나가고 없어요. 그리고 한 말씀 드리겠는데요, 앞으론 이리루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어디로 외출을 했죠? 강남인가요?} 그는 내 말은 안중에도 없이 물어왔다. {곽선생님, 제 말뜻 모르시겠어요? 애라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해요. 애란 지금 안정이 필요해요.} {제가 방해가 됐나요?} {아직까지 방해가 되진 않았지만 곧 그럴려고 해요. 더구나 애라는 선생님을 만나기를 꺼려 하고 있어요.....애란 아주 심각한 것 같던데 전혀 그런 내색을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나는 대놓고 면박주기가 뭣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워낙 서둘러 수화기를 내리는 바람에 탐색할 시간은 없었지만, 얼른 느끼기에는 기분이 언짢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실례를 범한 것이 아닌가 괜스리 마음이 졸여졌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남몰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연중에 그가 석고모델이 되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격과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감정이 지속되어 왔었다. 이건 성적인 관심이 아니라고 나 자신을 타이르면서도 그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잉글리드 버그만을 껴안던 험프리보가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애라에게 그가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질투 감정이 아니었다. 윤애라가 자극되어 또 흥분이라도 하면 이제까지의 치료과정이 말짱 도로묵이다 싶었다. 더구나 그는 윤애라가 동성애를 욕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가 윤애라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날 밤 나는 윤애라가 늦는다는 전화도 없이 10시가 넘도록 귀가하지 않길래 걱정이 되어 집밖에 나갔다가 그를 만났다. 5월에 접어들면서 싸늘했던 밤공기는 한풀 꺾인 듯 부드러워져 있었고 비가 오려는지 습기가 느껴질 만큼 밖으로 드러난 살갗은 눅눅했다. 골목길은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슴푸레한 보안등이 두 집 간격마다 을씨년스런 빛을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위로 던져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 개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손수 짠 털실 가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양손을 엇갈려 겨드랑이에 찌른 채 대문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기를 20여 분---- 나는 아까부터 누군가가 숨어서 나를 굽어살피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어딘가 어둠속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두 눈을 인광처럼 번득이며 나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골목길 모퉁이에 주차된 차가 어쩐지 수상해 보였다. 나는 주저하며 그리로 다가갔다. 담벼락에 바싹 붙은 차의 형체가 차츰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훅색 프린스였다. 내가 앞범퍼의 2미터 전방까지 다가섰을 때 운전석 도어가 열리며 검은 그림자가 내려섰다. 나는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누, 누구시죠?} {놀라지 마세요. 접니다. 곽웅혁이라는 사람입니다. 왜, 아까도 전화했었죠.} {아, 네......헌데 여긴......} 그러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뻔한 질문을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애라를 보러 왔습니다.} 잘라진 내 말꼬리를 미루어 짐작한 그가 말했다. {요즘 통 안보이시더니요?} 나는 약간 빈정대는 투가 되었다. {애란 늘 이렇게 늦나요?} {가끔은요.} 그는 담배갑을 꺼내고 호주머니를 뒤져 성냥갑을 찾아냈다. 알맹이 하나를 집어든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구부리고, 두 손으로 성냥불을 가려서, 등뒤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했다. {제게도 한 대 주시겠어요?} 내가 요구했다. {거북선이라 독할 텐데요.} {아니요. 상관없어요.} 내가 말하자 그는 몸을 펴고서 담배갑을 내보였다. 내가 한 대를 뽑아들자 그가 성냥불을 내밀었다. 나는 급하게 담배를 빨았다. 그는 성냥개비를 휙 어깨 너머로 내던졌다. 성냥개비는 작은 별똥처럼 어둠속을 떨어져 가다가 지면에 닿아서야 꺼졌다. 나는 어둠속에서도 그가 빛바랜 청바지에 딸기색 쉐타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애라의 나이에 맞춰 의상을 고른 듯했다. 나는 막상 그를 대하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혀가 입천정에 달라붙은 듯이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임유진씨는 제가 마뜩찮겠군요?} 그가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제 이름은 애라에게서 들은 건가요?} 나는 반문했다. {아니요. 문패에서 봤습니다. 대단한 저택이더군요.}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헌데 제 물음에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거짓없이 말한다면 그런 점이 없진 않아요.} 그가 솔직하게 나오니까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제가 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그렇게 불량스러워 보입니까?} {보기에 따라서는요.} {나이 차이가 많기 때문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저 보기처럼 그렇게 고리타분한 여잔 아니에요.} {그럼 저를 그 아이에게서 떼놓으려는 의도가 뭐죠?} {애라가 그러길 원하기 때문이에요.} {그 아이가 제게서 전화가 오면 만나기 싫어한다고 전하라고 하던가요?} {구체적으로 그런 말은 없었어요. 하지만 제 느낌은......아니 제 느낌이 중요하진 않겠죠. 반복하지만 애란......} 그때였다. 그는 느닷없이 실례합니다는 말을 남기고는 나를 비켜서 우리집 대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만치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애라였다. 곽웅혁은 피던 담배를 집어던지고 그녀를 불러세우더니 뭔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웬지 둘 사이에 끼어들 마음이 나지 않았다. 대화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애라는 거부하듯 도리질을 했고 곽웅혁은 크게 손동작을 취하며 설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애라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담너머 이층 발코니를 올려다보며 집안의 동정을 기웃거렸다. 내가 나와주었으면 하는 눈치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곽웅혁이 조그만 물건을 건네는 것 같았고 애라는 그것을 받기를 거부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애라는 그를 비켜나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곽웅혁은 팔을 잡고 늘어지며 행동을 저지했다. 곽웅혁은 자꾸 조그만 물건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려고 기를 썼지만 애라는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다. {쥬리아, 받아줘. 다른 뜻은 없어. 이건 내 조그만 정성일 뿐이야.} {싫어요! 받지 않겠다니까요!} 기어이 고함이 터져나왔다. 나는 담배를 발로 비벼끈 다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애라가 그제서야 나를 보고는 반겨왔다. {언니, 이 사람 어떻게 좀 해줘요.} 그녀는 오른 팔목이 단단히 붙들린 상태였다. {아, 아파요! 이 손 놓으세요.} 그녀가 곽웅혁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떼를 쓰며 엄살을 부렸다. 곽웅혁은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체념하듯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넌 집에 들어가 있어.} 내가 말하자 애라는 비틀린 팔목을 움켜쥐며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곽선생님,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죠.} 나는 곽웅혁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이거 밤늦게 송구스럽군요.} 그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열적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담배갑에 집어넣었다. {좋습니다.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둠속에서도 그의 안색은 핏기가 없이 창백하고 메말라 보였다. 퀭한 눈만이 숯불처럼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제 대신 이걸 좀 전해주시죠.} 그는 은박지로 잘 포장된 작은 물건을 내밀었다. 주먹 반 크기만 했다. 열십자로 묶어 위에서 매듭지어진 금박 끈이 꽃술처럼 바람결에 나풀거렸다. {이게 뭐죠?} {전해주시면 압니다.} {아까 보니 받지 않겠다는 것 같던데요.} {그러니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왜, 어렵겠습니까?} 그는 내민 손을 나에게 바싹 들이밀었다. 남자의 손치고는 아주 길고 섬세한 손이었다. 약지에 무늬없는 금반지가 껴 있었다. {좋아요. 전해주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장담은 못하겠어요. 애라가 끝내 싫다면 다시 돌려드릴께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나는 서둘러 말했다. {말씀하시죠.} {애라를 얼마나 알고 계시죠?} {글쎄요.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알건 웬만큼 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만일 곽선생님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그래도 애라를 여전히 변치 않는 시선으로 대할 수 있는가요?} {무슨 뜻이죠?} 나는 애라의 망상증과 동성애를 떠올리고 있었다. 입이 근질거렸으나 나는 좀 더 신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제 생각에......그 보다도 내일 시간을 낼 수 있으세요?} {언제쯤?} {정오쯤요.} {가능해요.} {그럼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뵐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합시다.} {미술관으로 들어가시면 정중앙에 백남준씨의 거대한 비디오 작품이 있을 거예요. 그 작품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휴게실이 있어요. 거기서 12시반에 뵙도록 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주셨으면 해요. 다른 게 아니라 내일 거기에는 저 말고도 3명이 더 가게 돼 있어요. 물론 애라도 포함돼 있구요. 애라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약속해요.} 그는 아무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그가 차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애라는 샤워중이었다. 욕실문 앞에 그녀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켠에 걷어치우고 나서 욕실문을 두어 번 노크하며 말했다. {커피 마실래?} {뭐라구요?} 그녀는 타일 바닥을 때리는 물소리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커피 마실 거냐구?} 나는 크게 소리쳤다. {타 주면 좋구요. 언니 난 블랙으로요.}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가 가스불에 커피보트를 올린 다음 후드의 스위치를 올려 공기정화 팬이 돌게 했다. 그리고 식탁의 의자를 꺼내 앉으려는데 미경이가 다가왔다. {언니 저두요.} 그녀는 해바라기 무늬의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내리닫이 잠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너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니?} {잠이 안와요.} 그녀는 잠옷의 펑퍼짐한 아랫단을 추스르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또 두통이 온 거야?} {아뇨. 투통은 다 가셨어요.} {영표는?} {자는 것 같아요. 언니, 이 옷 어때요?} 그녀가 쫙 펴보인 것은 하늘색의 짧은 미니스커트였다. {내일 입으려구?} {애라가 권해준 거예요. 이쁘죠?} {이쁘긴 하다만 너무 짧지 않니? 그리구 아직은 그걸 입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애라는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잖아요.} {애란 아직 철부지여서 그래. 넌 애라보다 2살이나 위구 너대로 개성에 맞게 입어야지 애라를 따를 필욘 없어.} {하긴 그래요.} 그녀는 그 옷을 냉큼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전미경은 언제나 귀가 얇았다. 그래서 뭐든지 줏대가 없이 우왕좌왕하는 경향이 있었다. 요즘들어 애라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따금은 애라가 혹시 성적인 유혹을 보내는지 넌지시 알아볼 때도 있었다. 다행히 아직 그런 낌새는 없었다. {언니, 물 끓어요.} 그녀의 말에 내가 일어서려 하자 그녀는 만류하며 자신이 커피를 타겠다고 했다. 나는 샤워가 늦을지도 모르니 애라 것은 놔두라고 말했다. {영표는 미술관에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눈치던데?} 날라져온 커피 향내를 음미하며 내가 말했다. {오빤, 외출하기가 싫은가봐요. 그리고 미술픔을 한가하게 감상하는 건 유한계급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는 짓이라며 내키지 않는댔어요.} {내일 외출은 꼭 미술감상을 하기 위한 게 아냐. 바깥 바람도 쐬고 맑은 공기에 머리도 식힐 겸 해서 나가는 거지. 과천은 앞뒤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울 근교치고는 오염이 덜한 곳이야. 하루 나들이로야 그곳만한 곳도 드물지. 미술관이 정 ㅅ음 동물원이나 서울랜드에 가서 노는 것두 괜찮구.} {아무튼 내일 아침에 제가 다시 한 번 설득해 볼께요. 그리구 전 이만 올라갈래요.} {왜, 마시고 가지 않구?} {올라가서 마실래요. 음악 듣다 내려왔거든요.} 미경이가 자기방으로 올라가고 나서 10분쯤 지나서여 애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탕에서 나왔다. 그 동안 나는 두 잔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도끼빗을 들고 현관으로 나가 머리카락을 빗으며 물어왔다. {그 사람 갔어요?} {그래 갔어.} {순순히 물러나던가요?} {그래.} {역시 언니라니까!} {무슨 소리야?} {제가 전에도 그랬잖아요. 그 사람 당해낼 사람은 언니밖에 없다구요.} {흰소리 작작하구. 어서 이리 와봐. 머린 아직 덜 빗은 거야?} {다 빗어가요. 잠깐만요.} 나는 그녀가 마무리를 하는 동안 그녀를 위해 블랙커피를 타 식탁에 놓아 두었다. 그녀는 말아올린 뒷머리에 머리핀을 꽂으며 다가와 앉았다. {식기 전에 마셔.} 내가 말했다. {고마워요.} 애라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으로 스푼을 집어들어 커피를 서너 번 크게 휘저었다. {오늘은 또 왜 늦은 거니?} {친구들이랑 어울리다 깜박 잊었지 뭐예요.} 그녀는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내 기분을 살피느라 슬쩍슬쩍 탐색의 시선을 던진다. {부득이하게 늦는 일이 있을 땐 일찍 좀 전화해 주면 어디가 덧나니?} {어서 들어오라고 야단을 칠 게 뻔한데요 뭐.} {우리 둘만 생활하는 게 아니잖니. 영표와 미경이 이목도 생각해 줘야지. 그리고 그 이전에 서로가 약속한 규칙이야. 자꾸 멋대로 규칙 어기면 그땐 가만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야.} {또 그놈의 18번!} {뭐라구?} {아, 아니에요. 앞으론 어기는 일 없을 거예요. 맹세해요.} {좋아, 믿어 주겠어.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는 용납못해. 알아듣겠니?} {아유, 알았어요. 그 성깔 못당한다니까. 블랙커피 한 잔 값치고는 되게 비싸네!} 그녀가 넋두리를 해댔지만 나는 더 이상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애라는 천성적으로 밝고 건강한 아이였다. 억누르는 힘에 반발하는 왕성한 기질을 대할 때면 나는 그녀가 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표영표와 전미경의 성격이 내향적이고 폐쇄적인데 반해, 윤애라는 구김살이 없고 사람들 사귀기를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의 전형이라 할만 했다. 따라서 그녀의 어디에 그렇게 어둡고 음침한 망상증의 병소(病巢)가 생겨날 수 있었는지 한두 번 곤혹스러워 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호두의 생김새처럼 연질의 상처받기 쉬운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외피가 딱딱하게 각질화되어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각질을 으스러뜨려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녀의 속성을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거 받아 그 사람이 주고 간 거야.} 나는 곽웅혁에게 건네받은 포장된 조그만 네모상장사를 내밀었다. {아니, 언니! 그러고보니 순순히 돌려보낸 게 아니라 그 사람 꾐에 넘어간 거로군요!} {말이 지나쳐.} 나는 떳떳할 건 없었지만 그런 비난을 들을 만큼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님 뭐예요?} {오해마. 내가 가운데서 뚜쟁이 노릇을 하기 위해 이런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절대 그런 건 아냐. 다만......} {다만 뭐죠?} 애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따져보란 말이야. 내가 보기엔 그 남자 니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어물쩍 포기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아까 대문앞에서 너랑 실랑이를 벌일 때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어.} 나 자신이 동요하고 있었다. 1시간 전만 해도 곽웅혁이라는 사내의 빈번한 출현은 애라의 병증에 해로울 것이란 판단이었는데, 이제는 그와 자연스럽게 교제하는 쪽이 애라에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더러 뭘 어쩌란 말이에요? 억지로 애교스런 미소라도 지으며 그 남자를 만나주란 말인가요?} {이성(異性)으로 대해 주라는 얘긴 아냐. 내 생각에는 그냥 친근한 아저씨로 부담없이 만나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입으로 얘기했듯이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은 아니라면서? 그럼 큰 문젠 없지 않겠니?} {전 그 남자의 끔찍한 눈빛이 싫다니까요.} {과민반응이야. 내가 보기엔 멀쩡하기만 하던걸.} {언닌, 가까이서 그 남자의 눈빛을 들여다보지 못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마음에 드셨다면 언니나 만나세요.} {애라야!} 나는 소리치며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녀가 움찔했다. {미안해요, 언니. 제가 실언한 건 사과드려요. 하지만 정말......} 잠시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가로놓였다. 나는 그녀가 강요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언니가 만나라면 만나겠어요.}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볼멘 소리를 냈다. {만나는 것을 의무감으로 느껴선 안돼. 내 얘기는 자연스럽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쯤해 두세요.} 애라는 금세라도 소리를 버럭 내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나는 내가 너무 심하게 굴었던 것이 아닌가 후회스러웠다. {그만 올라가 볼께요.} {그래, 좀 쉬어.} 그녀는 갑자기 피곤함을 느낀 듯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거 가져가야지.} 나는 선물을 건네주며 말했다. {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그 사람이 아까 널 쥬리아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둘이 있을 땐 언제나 그렇게 불러요. 그 남잔 그게 좋대요. 왜요?}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그만 올라가 자.} 그녀는 선물을 받아들고 맥없이 돌아섰다. 나는 애라가 잠자리에 든 후에도 1시간 이상이나 식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껍데기만 남고 실체는 빠져나간 듯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반쯤은 애라의 동의를 얻어냈으면서도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내키지 않아 한다는 기분 때문이 아니었다. 내 느낌은 그 이상의 무엇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안, 흥분, 떨림, 전율, 까닭 모를 쾌감, 후회, 두려움, 낯설음, 이질감, 4에 대한 관심, 환희, 죽음, 어둠, 비명, 노출감, 행복, 아버지, 어머니, 숭고한 것, 누드, 알몸, 새로운 욕망, 눈부신 빛, 권태로운 바다, 투신(投身) 같은 관념들이 어지럽게 밀려들었다가 곧 사라져갔다. 그것들이 사라져간 뒤미처 나는 잿빛의 혼탁한 물안개속에 갇혀 몸부림을 쳐댔지만, 나의 외침은 공허한 울림으로만 메아리쳐 돌아올 뿐이어서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웬 기분일까? 나는 자못 의아했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어도 그런 감정의 과장과 뜬금없는 동요는 쉬 진정되지 않았다. 이제 공허감은 실질로 채워졌으나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뭔가 아주 흥분할만한 일이 있었는데 잠시 딴전을 피우느라 깜박 잊어버린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을 기억해내기만 하면 시름과 근심이 씻는 듯이 가셔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이상한 기분은 꿈자리로 이어졌다. 나는 꿈속에서 난생 처음 사지가 뒤틀리는 듯한 오르가즘을 느끼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천길 아래 단애밑으로 곤두박질치는 아찔함을 맛보는가 하면, 기껏 오랜 각고끝에 완성을 본 작품들을 찢어발기고 부숴뜨리는 난행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침에 식은땀으로 뒤범벅이 된 베개에서 머리를 쳐들었을 때 아련해진 꿈얘기에서 앞뒤가 요령있게 제대로 이어지는 대목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악몽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길몽을 꾼 것 같기도 하였다. 다만, 시트를 걷어젖히고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려 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곽웅혁...... 애라는 어제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조반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활기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심 그녀의 심사가 뒤틀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밝은 모습을 대하자 나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기분좋게도 영표도 미술관에 함께 가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보았다. 오늘의 외출을 드러내놓고 기뻐한 사람은 미경이였지만 나도 그에 못지 않게 즐거웠다. 우선은 이렇게 넷이 같이 외출을 하는 게 처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팀웍이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확신 때문에라도 나는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였다. 최소한 우리들끼리만이라도 가슴을 여는 교감을 통해 공감대를 마련한다면, 조만간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봄직한 터였기 때문이다. 과천에 이르는 동안 나는 차안에서 얕은 머리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뒷좌석을 차지한 미경이는 아까부터 애라에게 달라붙어 뭔가를 보여달라고 추근댔는데, 둘이 속삭이는 얘기가 들려왔다. {좀 보자니까. 얘가 평소답지 않게 왜 이리 뻐기구 그래.} {별거 아니라니까.} {별거 아니니까 보여줘도 상관없잖아.} {언니두 참 별꼴이야! 남의 것에 왜 그리 쓸데없는 염탐이 많아.} {움직이지 말구 가만 있어봐. 움직이지 말라니까. 햐! 이거 다이아잖아. 댓 캐럿은 좋이 되겠는걸. 니 손에 꼭 어울린다 얘. 근데 너 이거 어디서 났니? 어제까지도 없었잖아.} {글쎄, 언닌 알 거 없다니까.} {너 애인 생겼니?} {......} 나는 보지 않아도 그것이 곽웅혁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중년으로 접어든 불혹의 사내가 꽃띠 처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선물공세로 나오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선물치고는 액수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최근에 애라의 먼지 풀썩이는 주머니 사정과 비싼 동네 압구정에서 길들여진 사치와 허영심을 고려할 때 무더기돈으로 환심을 사려는 곽웅혁의 시도는 시기적절한 것으로 보여졌다. 그 남자에게 보이는 가시돋힌 냉담한 반응과는 달리 의외로 애라는 금전의 위력앞에 노출되면 무기력하게 허물어질지모른다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다. 턱없이 부풀려진 상상인지는 모르나 그녀가 이제껏 곽웅혁을 따돌려 온 것도 헤프게 보이지 않음으로써 주가를 올리기 위한 전략차원의 일환이었지 않았나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다이아반지에 관해서는 일체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싫다는 걸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한 내가 누구보다도 책임의 장본인이라는 계면쩍음과 오늘 아침 애라의 밝아진 표정과 다이아반지를 끼고 나온 것으로 볼 때 이제와서 돌이킨다는 것은 나에 대한 신뢰감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값비싼 반지를 선물하는 곽웅혁의 진심이 뭔지를 알고 나서 대처해도 늦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랜드 뒤쪽, 물오른 나뭇가지마다 초록 잎새들이 고개를 내민 청계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서울랜드앞 주차광장에서 샛길로 빠져들어 꼬불꼬불 감아돌아간 근사한 드라이브코스를 따라 올라가자 거북성이라는 대형간판을 내건 한식집이 나오고 곧이어 약수터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들자 바로 미술관 입구였다. 우리는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올려 허공에서 물안개를 일으키는 분수대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관객은 붐비지 않았다.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백남준씨의 비디오아트였다. 1003개의 텔레비전을 피사의 사탑처럼 쌓아올려 만든 것으로 TV마다 끊임없이어지럽게 화면이 바뀌어지고 있었다. 개선문이 보이는가 하면 정경화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이 잠깐 비췄다가 사라지고 88올림픽 개막식과 화려한 부채춤이 등장하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기하하적 도형이 크로즈업되었다가 팽팽 돌며 후경으로 빨려들곤 했다. 나는 이 작품을 대할 때면 정보의 홍수속에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삶을 숨김없이 그대로 반영한 것 같아 알 수 없는 긴장을 느끼곤 하였다. 단편적인, 상호간에 아무 연결도 없는 조각들이 대부분 관심밖으로 밀려나지만, 그러나 웬지 그것들을 무심히 흘려보내기에는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할 것 같은 기분으로 바라볼 감상자들을 떠올리면서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자아의 해체를 생각하였다. 아니 그 전에 대체 자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의 축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딱딱한 실체를 가진 것인가? 나는 본질적인 실체를 믿지 않는다. 자아란 경험의 총체에 불과하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로 표현될 뿐인 것이다. 는 각각 각자에게 일어난 사상(事象)들이다. 나는 왜 하체가 짧을까, 머리가 나쁠까, 서른을 갓 넘었는데 대머리가 되었을까, 남편은 왜 한 가지 체위만 고집할까, 옆집은 왜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을까, 그 친구는 왜 요절했을까----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개인을 형성한다. 그 외에 개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우리 문단에 영향력이 있는 어떤 평론가가 자아는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적어도 그 분이 본질주의자라면 끝나지도 않을 논쟁을 시작할 필욘 없겠다. 하지만 적어도 자아가 경험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라면 할말이 있어진다. 각자를 구성하는 경험중에 자기를 반성하는 혹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 그것이 특별한 이유는 다른 모든 경험이 외부적 시선에 결부된 것이라면 이 경험은 시선이 내부로 돌려져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지 내부로 시선이 돌려져 있다고 해서 다른 사상(事象)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경험은 아니다. 다만, 기능적으로 내성(內省)에는 다른 경험들을 총괄하는 역할이 주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성은 외부적 경험을 떠나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도 그것이 먼저 생겨난 상태에서 경험이 후차적으로 밀려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전제에서 볼 때 자아가 해체되어간다, 라는 것은 외부에서 쏟아지는 정보량이 너무 많아 현대인은 내성의 기회를 좀처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세대만 해도 농한기의 농부들은 화롯불 앞에 앉아 군밤을 까먹으며 인생(총괄하는 기능을 가진 자아의 비전이다)과 자신에 대해 돌이켜 볼 수 있었다. 헌데 요즘은 어떤가? 따로 농한기라는 게 없다. 그것은 흔히 바빠졌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고 마음의 고향을 상실했다는 문학적인 수사가 덮씌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한 가지다. 우리의 눈은 밖으로만 쏠려 있는 것이다. 나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벌써 11시 52분이었다. 바삐 서둘러야만 했다. 나는 휴게실로 그들을 안내해 가볍게 허기부터 때우자고 말했다. 그들은 찬성했다. 우리는 발코니로 나가 파라솔이 붙은 원탁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켜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12시 20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끌고 회랑으로 옮겨갔다. 몇 점의 서양화를 감상하는 척 하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혼자 빠져나왔다. 휴게실로 돌아왔을 때 곽웅혁은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내가 다가가 마주앉자 그가 물어왔다. {아니요. 방금 마셨어요.} {그 아이는요?} {집식구들이랑 회랑을 돌고 있어요.} {여기 처음 와봤는데 경치가 제법 볼만하군요.} {경치는 그만이지만 한국 최고의 문화공간치고는 삭막한 느낌도 없지 않아요. 전 여길 자주 와보게 되는데도 친숙하다는 느낌을 거의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쩐지 딱딱하고 절제된 분위기가 강해요.} {건물이 최근에 새로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덕수궁의 구미술관은 담쟁이덩쿨로 덮어 있다보니 웬지 모르게 장구한 역사와 전통의 맥박 같은 것을 느끼게 되죠. 하긴 덕수궁 자체가 개인을 압도하는 면은 있지만요.} 이런 정도로 인사는 끝난 셈이었다. 나는 양해를 얻은 다음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고 본격적인 얘기에 들어갔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제가 이렇게 뵙자고 한 것은 애라 때문이에요. 애라는 당분간 우리집에 머물 예정인데, 그러다보니 제가 본의아니게 보호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넘겨집진 마세요. 둘 사이를 간섭하겠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다만 알 것은 알아야겠기에......} {어제 선물은요?} 그는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주눅들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무덤덤한 태도를 대하자 나만 맹랑해진 꼴이 되고 말았다. {전해줬어요.} {내팽개치지 않던가요?} {받지 않겠다고 떼쓰는 걸 제가 설득시켰어요.} {고맙군요.} {헌데 왜 그렇게 비싼 것을 주셨죠?} {별다른 뜻은 없소. 그 아인 웬만한 것엔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죠.} {반지를 주신 걸 보니 일종의 구혼의 표시인가요?} {아, 아닙니다. 구혼이라뇨? 당치않아요. 그건 생일 선물이었소.} {생일선물?} {어제가 그 아이의 생일 아니던가요?} 나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최근 몇 년간 독신으로 지내다보니 생일 같은 기념일엔 아예 무감각해져 있었다. 미리 챙겨 따뜻하게 배려하지 못한 나의 부주의에 화가 났다. 애라가 얼마나 섭섭했을까. 그런데도 한 마디 내색조차 없던 그녀가 대견스러웠다. 헌데 이 남잔 꽁생원마냥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을까? {대체 애라에게 뭘 바라는 거죠?} 나는 이 남자의 정체가 알고 싶어졌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그는 까닭없이 수심에 가득찬 얼굴을 하며 말했다. {글쎄요......나 자신도 그 이유를 알고 싶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이 무슨 방자하고 같잖는 대꾸인가. {절 놀리시긴가요? 그런 무책임한 언변으로 얼버무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무슨 대답을 해도 임유진씨는 만족하지 않을 거요. 한 뼘 에누리조차 없이 솔직하게 말한 거니까 더 따져들 거 없어요. 그 얘긴 이쯤해 둡시다. 그보다도 어제 애라에 대해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하신 거 같은데 그거나 들어봅시다.} {곽선생님이 마음을 열지 않는 한 그 얘긴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네요.} {아니 그만 일에 화가 난 거요? 허허허......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게 지금의 내 솔직한 느낌이라니까요. 허나 더 이상 추궁하면 나도 불쾌해져요. 이제 됐소?} 그는 사뭇 진지해졌다. 아니 그럴 것도 없었다. 그의 빈틈없는 얼굴엔 낙천가의 유들유들함이라든가 뻔뻔한 유쾌함 같은 표정은 애초에 섞여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나는 아까부터 그의 눈빛이 끔찍하다는 애라의 말을 염두에 두며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매서운 눈매와 꿰뚫는 듯한 시선이 상대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할 소지는 있으나 그렇다고 소름이 끼친다거나 오싹함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유려한 인상이었다. 얼굴 자체가 작고, 가늘고 밋밋한 눈썹, 사뿐히 내려뻗은 콧잔등, 얇고 파리한 입술은 하나같이 날아갈듯이 날렵한 모양새였다. 이마는 넓지도 좁지도 않게 적당했으며 부드러운 물결처럼 웨이브가 진 머리카락은 단정히 빗어넘겨져 있었다. 안경을 안 썼어도 지적인 분위기가 한눈에 역력했다. 나는 그가 최소한 돈에 혈안이 된 소규모 자영업자나 장사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그 점에 관해선 더 이상 입밖에 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애라나 저나 선생님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는 점은 인정해 주셔야 해요. 우선 뭘로 호구책을 삼고 계시죠?} 나는 피던 담배를 양은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는 남은 커피를 홀짝 입안에 들이부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딱이 하는 게 없소.} {그럼 전엔 뭘 하셨죠?} {그걸 꼭 밝혀야 하겠소?} 그는 탐탁치 않다는 듯 되물어왔다. {저희가 선생님을 신뢰 하느냐 마느냐 하는 건 전적으로 선생님의 태도에 달려 있어요. 자신을 자꾸 감추려 든다면 우린 뭘 보고 선생님을 믿을 수가 있죠?} 그는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때 휴게실이 왁자하게 시끄러워졌다. 스무 명 남짓의 육덕좋은 40대 아줌마들이 단체관광을 왔는지 알록달록한 나들이 차림새로 떼지어 들어왔다. 깔깔대는 질펀한 웃음소리, 떠들썩한 대화, 끌리는 발소리, 우렁차게 불러대는 소릴 같은 걸로 넓지 않은 휴게실은 금방 도떼기시장이 될 판이었다. {나가는 게 좋겠소.}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우리는 어수선해진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백남준의 거대한 비디오 작품이 어지럽게 화상을 번쩍이며 우리를 막아섰다. {이게 그 유명한 백남준씨의 작품인가요?} 그가 말했다. {작년은 그 분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해였어요. 자신의 둘도 없는 스승이자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존 케이지가 사망했고 자신은 어느덧 환갑을 맞았거든요. 그래서 개인전이 성대하게 치뤄졌었는데 와보시지 그러셨어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작품 제명처럼 TV수상기가 정말 많군요. 대체 이게 몇 개나 될까요?} 그는 고개를 들어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 맞춰봐요. 보시기에 대충 몇 개나 될 것 같아요?} {5백개? 6백개?} {그것보단 많아요.} {그럼 8백개?} {1003개예요.} {뭐라구요?} 그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이 왼손을 말아쥐어 귀에 갖다대었다. {1003개요.} 그러자 그의 반응이 놀라웠다. {젠장! 더럽고 비열한 작품이군! 이건 순 미친 짓이야!} 그는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듯이 말했다. {이런 오탁(汚濁)된 작품을 국립미술관의 상징물로 세워놓다니 대한민국의 미술정책 수준을 한눈에 알만하군. 대체 누가 이따위 불결한 작품을 이곳에 세우자고 결정한 거야? 보는 눈중에 중고등학생들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미친 짓이야! 정말 다들 미쳐버렸어! 아무렴, 눈귀가 제대로 박혀 있다면 이런 파렴치한 짓을 멋모르고 할 수야 없지!} 나는 그가 갑자기 흥분해버린 까닭을 알 수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작품 둘레에 처진 난간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1003이라는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요?} {그, 글쎄요.} 나는 알듯도 했으나 윽박지르는 듯한 그의 물음에 얼른 떠오르지가 않았다.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군! 그건......돈 후안이란 바람둥이놈이 스페인에서만 정복한 여자의 숫자란 말요.} 그러고보니 나도 생각이 났다. 1003이란 숫자가 약분이 불가능한 기수(奇數)라는 것은 단순히 양적인 한정을 뛰어넘어 무한수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다익선이란 무한수에 가까울수록 좋은 것이 된다. 헌데 그게 무슨 대순가! 백남준이 TV수상기의 갯수로 암암리에 성적인 메세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 그가 이토록 날뛰고 욕설을 퍼부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일까?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되려 나의 무감동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유진씨는 아무렇지도 않은가요?} {남이 만든 작품의 주제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잖아요.} {그럼 내가 흥분한 것이 웃기는 짓이란 말인가요?} 그는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일순 섬ㅉ함을 느꼈지만 동요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비약할 필욘 없어요. 다만 전 곽선생님이 보이시는 민감한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이 영문제명의 꼬라질 봐요! 더 모어 더 베터(The more, The better)라니......이게 더러운 수작이 아니면 그럼 뭐란 말입니까? 많을수록 좋다니요. 파트너를 하루에도 서너 명씩 바꿔가며 데리고 노는 것이, 그리구 오입을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 돼먹잖은 짓이 아니란 말입니까?} {성(性)이 예술의 주제가 된 건 2천년도 더 넘었어요. 여성의 누드를 즐겨 그렸던 르느와르는 한땐 동네북보다도 못한 존재였지만 이젠 누구도 그 위대한 예술가를 비난하지 않아요. 역사는 우여곡절을 ㄲ고 시비의 저울질을 당하면서도 성에 대해 관대해지는 쪽으로 발전을 거듭해왔어요. 저도 듣고보니 이 비디오 구조물이 바람둥이의 상징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성토하듯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시대에 형편없이 뒤떨어진 감각 아닌가요?} {유진씨는 도덕적 타락과 역사의 발전을 혼동하고 있군요.} {곽선생님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아니 뭐 좋아요. 의견의 차이란 흔히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어쨌든 백남준씨를 두고 이 자리에서 마냥 논쟁할 시간이 없어 유감이에요. 전 곧 애라가 있는 곳으로 가봐야 해요. 우리 다른 곳으로 옮겨서 아까 하던 얘기나 마무리를 지을까요?} 그는 끝내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에서 거두어들이지는 않았지만 내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우리는 회랑으로 옮겨가 천천히 걸으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게 곽선생님의 전직에 관한 물음이었던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그는 [동양여자]라는 제명을 가진 대형 유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림의 여자는 거꾸로 누운 자세로 가슴께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붉은 피는 흰 블라우스와 얼굴을 적셔 윤곽의 구분이 모호해진 상태였다. 여자의 눈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기보다는 검은 아이샤도우로 인해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파란 매니큐어가 칠해진 기다란 손톱은 찌를듯이 감상자의 시선을 향해 솟아 있었다. 곽웅혁의 눈길은 여자의 손톱에 얼마간 머물렀다가 내쪽으로 향해졌다. {난 의사였소. 정신병환자들을 치료했었소.} 그의 목소리는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공허하게 울려왔다. 정말 뜻밖이었다.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마주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자수정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헌데 왜?} {그럴 일이 있었소. 한두 해쯤 쉬었다가 다시 복귀할 셈이오.} 왜 그런지 그는 그 말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으며 벽에 걸린 작품들을 감상했다. 아니 스쳐 지나쳤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나는 그의 저조해진 기분을 탐색하는 한편으로 정신분석의인 그에게 애라의 망상증을 알려주는 일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었고, 그는 그대로 작품을 건성건성 훑고 지나칠 뿐 마음은 멀리 딴 곳을 더듬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이 남자가 무척 외로운 사람임을 쉬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빛깔은 칙칙한 잿빛에다 피처럼 진한 붉은 색이 가미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나는 곧 내쪽에서 성의를 보일 차례였으므로 주저하고 있었다. 내가 망상증에 대해 이 남자에게 말한 사실이 애라에게 알려지면 애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것은 아주 미묘한 문제였다. 애라는 내가 고자질을 했다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내가 망상증을 폭로하려는 의도 또한 심리적으로 되짚어봐야 할 미심쩍은 요소가 잠재해 있었다. 혹시 나는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남자의 접근이 애라의 치료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구실로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저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남자가 진짜 정신과의사라면 내가 함구한다고 하더라도 조만간 증세를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정신과의사라는 사실이 나의 고자질에 명분을 세워준 것처럼 애써 미심쩍음을 지워버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제 그가 애라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줄 작정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아아, 더러운 것들......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의 입에서 신음처럼 그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을 쫓았다. 거기엔 알몸의 여자가 모로 누워 오른손바닥으로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림은 유화이면서도 사진과 구분이 안 갈 정도의 세필화였고 특히 체모는 한 가닥 한 가닥에 신경을 썼을 만큼 사실적이었다. 체모는 쑤세미가 뒤엉긴 것처럼 거칠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가닥가닥이 얼키고 설키는 가운데 공기가 들어차 부풀려진 그것은 풍성하고 푹신한 느낌을 주었다. 누드를 바라보는 곽웅혁의 얼굴은 벌겋게 달라올라 팽창할대로 팽창해 있었다. 그는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그림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아, 안돼요! 그림을 훼손해선 안돼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가 돌아다보았다. {이건 죄악이오! 우리 모두를 타락시키는 죄악이란 말이오!} {그래도 작품에 손을 대선 안돼요. 그 작품을 망쳐놓는다고 변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선생님만 붙들려 가서 곤혹을 치르게 될 뿐이에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회랑 입구쪽에 의자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이 지긋한 관리인이 보였다. 관리인은 책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서도 이따금 고개를 들어 회랑을 살피기를 잊지 않았다. {젠장!} 그는 양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다가 나를 비켜나 출구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곽선생님!} 내가 불렀으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때였다.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애라였다. {언니, 여지껏 어디서 뭘 한 거예요? 화장실에 갔다 온다면서 왜 이리 오래 걸려요?} 그렇게 핀잔을 주듯 묻던 애라의 시선이 내 어깨 뒤로 저만치 달아나 꽂혔다. {저 사람은......곽선생님 아니에요?} {아, 아냐. 설마 그 남자일라구.} 나는 얼른 부인했다. {아녜요. 제 눈이 틀림없어요. 저길 봐요.} 애라는 목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살피며 말했다. {어디?} 나는 관심이 있는 척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막 출구 모퉁이를 돌아가는 곽웅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데.} {지금 막 사라졌어요.} {비슷한 사람을 착각한 거겠지.} {아니라니까요.} {고집부릴 거 없어. 영표와 미경이는 어딨지?} {우리들 여ㄱ어요.} 어느새 영표와 미경이가 와 있었다. 영표는 미경이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밝게 웃고 있었다. 미경이도 그게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언니, 저 잠깐만요.} 애라는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잠깐만 갔다 올께요.} {애라야, 어딜 가니?} 만류하는 나의 손짓에 아랑곳없이 애라는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낭랑하게 낭하에 울려퍼져나갔다. 영표와 미경이가 놀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서양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쟤, 어디 가는 거예요?} 미경이가 물어왔다. {아마 아는 사람을 본 모양이야. 신경쓸 거 없어. 우린 구경이나 하자구.} 나는 영표와 미경이를 앞세우고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아나가는 데 열중했다. 1시간쯤 지나자 우리는 회랑을 다 돌았다. 그러나 애라는 2시가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미술관을 나왔다. 화창하던 날씨가 비라도 내릴 듯이 어두워져 있었다. 분수대에서 30분쯤 더 기다렸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남의 L백화점에 들러 각자 하나씩 필요한 물건을 샀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애라의 몫으로는 생일선물을 겸해서 나날로그 손목시계를 하나 골랐다. 애라는 집에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정을 알리는 시보와 함께 나타났다. 왜 그런지 나는 그녀에게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왔는지 묻고 싶지 않았다. 문을 따주고는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곧바로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녀의 발소리가 10분쯤 거실에 머물렀다가 조용해졌다. 그녀에게 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누구야?} 내가 말했다. {언니 저 애라예요.} {여태 안 올라갔었니? 왜, 자지 않구?} {들어가도 돼요?} {왜?} {언니, 화났어요?} {아냐, 들어와.} 나는 손목시계 상자를 얼른 침대밑에 감추었다. 애라는 문을 조금 열고 얼굴만 디밀어 빠꼼히 들여다보더니 주뼛대며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니 입에서 그런 얘기도 나올 때가 있니?} 나는 웬지 이죽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다신 안 늦을 께요. 미안해요.} {알았어. 그만 올라가. 나 피곤해.}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냥 돌아섰다. 나는 그녀가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목시계 상자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6. 살인광의 전력(前歷) 5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과천 현대미술관에 다녀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만개한 빨간 장미가 정원 담벼락을 수놓듯 뒤덮어갔다. 튜울립과 라일락도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는지 10년 묵은 행운목이 노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려 2층 발코니를 화사롭게 장식했다. 나는 이따금 한가할 때면 웃자란 잔디를 깎거나 호미질로 막힌 물꼬를 트거나 정원수를 다듬는 일에 취미를 붙여갔다. 집안에 몇 군데 손볼 곳도 생겨났다. 문턱과 거실바닥이 맞닿은 틈새와 나무기둥에 흰개미가 들끓어 왼종일 석유를 주사하는 난리법석을 떨기도 하였다. 그 일로 거실에는 일주일 내내 고약한 석유냄새가 진동했다. 말라죽은 포도나무 대신 그 자리에 석류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 연평균 기 온이 0도씨 이상이 되는 남도지방이 재배의 적지이지만 석류알의 불타오르는 빛깔이 아름다와 고사를 무릅쓰고 심은 것이었다. 그 작업은 영표와 미경이가 도와주어 한결 수월하게 끝낼 수가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집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장마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정화조와 지하실도 일찌감치 점검을 했다. 평소엔 집안의 소소한 일에 거의 관심이 없거나 기껏해야 품을 파는 일꾼을 사들여 작업을 내맡기곤 했었는데, 나는 갑자기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부지런을 떨었다. {아가씨, 요즈막엔 왜 그리 부지런을 떤대유? 때빼고 광내면 뭔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남유?} 하루는 파출부 아줌마가 그렇게 농을 걸어왔다. 듣고보니 찌르르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나는 가사에 한 번도 재미를 붙여본 적이 없던 터였다. 전 남편과의 불화도 반쯤은 집안 청소가 안되었거나 개수구가 막혀 있거나 하는 따위로 시작되곤 했었다. 나는 과천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갑작스럽게 변화가 생겨났음을 상기했다. 그것은 자존심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뭔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피하려는 감정을 숨기기 위한 방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당장 집안 일을 걷어치웠다. 그리고 방안에 틀어박혀 내 감정의 은밀한 곳을 탐색하는 데 열중했다. 곽웅혁이라는 사내로 인해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애라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바로 그런 감정이야말로 질투의 본성인지도 몰랐다. 애라는 요즘 외출을 했다 하면 쇼핑꾸러미를 한아름 싸들고 들어왔다. 누가 사주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만 했다. 눈치로 보아 만나는 상대도 주로 곽웅혁에게 한정된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쁘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발뺌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녀가 돈이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믿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아왔지만 징그러운 벌레 보듯 대하던 사람을 다이아반지 하나에 하루아침에 만나주기까지 하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혹시 곽웅혁이 정신분석의의 능력을 발휘해 애라의 심리를 휘어잡은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갔다. 궁금증이 일어, {너 곽선생님 집에 가봤니? 대체 뭐하는 사람이래?} 하고 물어보면 애라는, {아냐. 그 사람 집에 내가 뭣하러 따라가? 직업엔 관심 없어. 물주 노릇을 하니까 쬐금 만나주는 거지 뭐. 언니 말대로야. 부담없이 만나주니까 나도 마음이 편해. 충고 고마웠어.} 라고 쉽게 대답하는 거였다. 그럴수록 나는 조바심이 났다. 애라의 내숭도 내숭이었지만 대체 곽웅혁이 애라에게서 바라는 게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욱 알 수 없는 게 있었다.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다다익선>과 누드화를 감상하다 드러낸 그의 심상치않은 반응을 돌이킬 때 과연 그가 애라의 야한 옷차림을 보고도 가만 있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라의 옷차림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곽웅혁의 위선적인 인격을 들여다본 것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그런 중에서도 고무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미술관에 다녀온 날 이후로 영표와 미경이가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영표는 심심찮게 까탈을 부리거나 무뚝뚝하게 굴던 버릇이 덜해졌다. 그건 치료의 효과가 마침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둘 사이가 부쩍 가까와진 데에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서로 의지할 데가 없는 처지라 안 그래도 둘을 맺어주고 싶었는데, 나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반면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는 쓸쓸한 낭패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여느 독신주의의 찬미자들처럼 혼자 사는 것이 편하고 제격이라고 믿어온 바는 아니지만, 그런 삶도 한 번 이혼한 이상 애써 피해갈 필요가 있다고 보진 않았는데, 때아니게 나만 동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착잡한 회의가 찾아들면서 독신이 진저리나게 싫어졌다. 나는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시계추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망상증환자들을 집에 끌어모아 치료를 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였다. 숙식만 제때에 해결된다면 저들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잘 살아나갈지도 몰라. 저들을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야말로 나의 과욕이고 망상이야. 알 수 없게도 회의는 불안을 자극했고 불안은 성적인 욕구를 충동질 했다. 3년간 전화 한 통화 없이 소식을 끊고 지내던 전남편 소영식을 만나 그의 사진관 소파에서 성급한 정사를 치른 것은 섹스를 하지 않고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정사의 뒷맛은 찝질했다. {뜻밖인데, 파리에서는 영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지. 난 당신이 나를 이렇게까지 그리워하고 있는 줄은 몰았어. 그러기에 내가 뭐랬어. 애시당초 이혼 같은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집어치워요! 이만 일루 나를 다시 어떻게 해보겠다는 수작일랑은 꿈꾸지도 말아요.} 나는 팬티를 찾아 발을 꿰며 쏘아붙였다. 소영식은 자신의 거무튀튀한 남성을 덜렁대며 소파에 걸터앉아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근육질의 몸매를 뽐내기를 좋아했다. 정사 뒤엔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그의 떨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그 놈의 독사 혓바닥 같은 말투는 여전하군! 그렇담 오늘 일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거지?} {해석할 거 없어요.} 나는 섹스를 구걸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소영식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의 하나였다. 그의 징그러운 미소 뒤에는 그런 자신감이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대낮처럼 환한 방에서 정사에 응하는 사내가 흔치는 않을 걸. 아마 대한민국에선 손을 꼽아야 할 거야. 나로 말하자면 그런 쪽으로야 당신의 영원한 종복인 셈이지.} 그가 낄낄대고 웃었다. {씨도 안 먹힐 공치사 말아요. 당신의 속셈이야 뻔한 거 아녜요. 사업자금 빌려다가 탕진하는 재미외에는 나를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그래도 요즘은 똥줄이 탈 정도로 돈이 궁했던 건 아닌가 보군요?} {그렇지도 않아. 얼만 전에 이쁜 사진모델 애를 하나 물었는데 워낙 사치스런 계집이라 돈 들어갈 구멍이 어지간 해야지. 안 그래도 당신한테 곧 연락할 참이었어. 이렇게 됐으니 잘 됐지 뭐야. 한 장만 꿔줘?}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릴랑은 말아요. 나더러 당신 난봉질하는 뒷돈이나 대주란 말예요? 내일 모레면 당신도 마흔이에요. 언제까지 철부지처럼 지낼 셈이에요?} {아니 이럴 거야?}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일 없다니까요.} 나는 마지막으로 스커트 자크를 올리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슴팍의 털이 빗질을 한 것처럼 아래로 쓸려 있었다. {서로 좀 돕구 살자구. 설마 당신 그 애송이에게 질투를 느끼는 건 아니겠지?} {웃기는 소리 작작해요.} {그럼 뭐가 문제야?} {나 허투루 내돌릴 돈 없어요. 강남 목 좋은 곳에 갤러리를 사들일 예정인데 거기 쏟아넣어야 할 돈이 웬만 해야 말이죠. 현금이라면 오히려 빌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사정이 정 그렇다면 반 장만이라도 돌려줘.} 그의 얼굴이 온순해졌다. {당신 그 낭비하는 씀씀이 버리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야 말로 그 훈계하는 버릇이나 고쳐. 어떡할 거야? 줄 거야 말 거야?}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반 장도 무리예요. 그 오분의 일이라면 몰라도.} {젠장! 껌값을 어디에 발라붙이라는 거야?} {싫음 관둬요. 나 갈께요.} {아, 아냐. 그럼 그거라도 돌려줘.} {한 가지 약속이 필요해요.} {또 뭐야?} {지난 번에 갚지 않은 잔금 있죠?} {그건 당신이 파리에 가는 바람에 못갚았을 뿐이야. 일부러 떼먹은 게 아니라구.} {알아요. 그 돈은 안 받겠어요. 대신 앞으로 저랑 거래할 때는 각서를 써줘야겠어요.} {아니, 날 못믿겠다는 거야?} {당신 인간성을 못믿는 게 아니라 당신의 헤픈 씀씀이를 못믿겠어요. 어쩔래요?} {알았어.} {내일 전화드릴 테니 그때 온라인번호나 알려줘요.} 다음날 나는 곧바로 돈을 부쳐주었다. 전화 통화에서 소영식은 돈이 작다고 투덜댔으나 나는 약속한 금액에서 한 푼도 더 보태지 않았다. 돈을 빌려 주었다는 각서는 조만간 찾아가 받을 테니 만약에 그때 허튼소리가 나오면 우리관계는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두었다. 인간 소영식이 아직도 내게 필요한 구석이 있다니, 나는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구좌에 입금을 시키고 은행문을 빠져나오는데 점퍼 차림의 젊은 사내가 바싹 다가왔다. {임유진씨 되시죠?} {네, 그런데요.} 나는 한 걸음 물러나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인상은 전체적으로 온순했으나 눈매만은 매섭게 생겨먹은 30대 사내였다. {전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신분증을 재빨리 내보였다가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실까요?} 나는 의아한 눈으로 잘 생긴 사복형사를 ㅎ어내렸다. 체크무늬의 쥐색 점퍼에 고동색 골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남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루 왼종일 바깥바람을 맞으며 싸돌아다녀야 하는 직업 특유의, 쓸리고 닿은 데가 많아 약간은 단정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곽웅혁씨 아시죠?} {그런데요.} 나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뜻밖이라 마음을 졸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 어디 조용한 데로 가실까요.} {전 곽웅혁씨를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에요. 안다고 할 것까진 없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도사렸다. {알고 있습니다. 윤애라양과 더 가깝다는 거.} 그는 조용히 바라보며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 되자 나는 형사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잘못 된 것일까. 나는 형사를 뒤따르며 바삐 머리를 회전시켰지만 신통한 이유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방에 마주앉았을 때 형사는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인동하라고 합니다. J경찰서 소속이죠.} {......} 나는 영문을 몰라 소극적으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차는 뭘로 드시겠습니까?} {괜찮아요. 별루 마시고 싶지 않아요. 어서 얘기나 해보시죠.} {얘기가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커피 어때요?} {좋도록 하세요.} 형사는 레지를 불러 커피 두 잔을 주문하면서 빨리 갖다달라고 재촉했다. 레지가 돌아가자 그는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얘기라놔서 차가 오면 시작하겠습니다. 방해받기가 싫거든요.} 그는 그 사이를 무료하게 기다리기가 싫다는 듯 담배를 태워물었다. 담배는 빨간 솔이었다. 나는 한눈에 형사가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제력을 보이고 있긴 했지만 그도 나 못지 않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커피가 날라져왔다. 그는 프림 두 스푼에 설탕 하나를 넣고 휘저었다.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설탕은요?} {아니에요. 전 블랙으로 마셔요.} {위가 튼튼한가 보군요. 전 위장병이 좀 있어서 사실은 커피와 담배를 하루속히 끊어버려야 하는 건데......} 형사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곽웅혁씨를 안 게 언제부텁니까?} {아마 한 달 남짓 됐을 거예요. 아니 한 두 달쯤 됐을 것 같네요.} {일전에 팔래스 호텔에서 만난 적도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형사가 앞으로 무슨 말로 나를 놀래킬지 더럭 겁이 났다. {만나서 무슨 말을 했죠?} {개인적인 용무는 없었어요. 애라에게 문제가 좀 생겨서 따라나갔다가 거기서 양동수라는.....} {네, 좋습니다. 저도 양동수씨를 만나봤으니까 그 얘긴 안 하셔도 좋습니다.} 그는 내 말허리를 잘랐다.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을 푹 놓으세요. 전 지금 임유진씨를 추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러니 할 수 없이 묻는 겁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전부터 곽웅혁씨에 대해 들은 바는 없습니까?} {전혀요.} {신문에서 보거나 소문을 들은 적은요?} {글쎄요. 요즘 별루 매스컴을 접할 시간을 갖지 못해서......} {1~2년 전쯤엔 어땠습니까?} ? {그땐 서울에 있지 않았어요. 파리에서 귀국한 지 채 1년이 안돼요.} {아, 그러셨군요.....} 형사는 수긍이 간다는 듯 머리를 끄덕거리다가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다시 몇 번을 접고 접은 신문쪼가리를 펼쳐들어 내보였다. 그것은 아주 오래돼 색이 누렇게 바랜데다 손끝에 길들여져 테두리가 너덜너덜해진 신문이었다. 신문에 난 타이틀은 이러했다. ----대구 <로이드>의료원 정신과의사 곽웅혁씨 살인혐의로 구속 그리고 타이틀 아래에는 곽웅혁이 의자에 묶인 채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검찰은 곽웅혁씨가 지난 85년부터 91년까지 10~12건의 살인을 자행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해 은밀히 수사를 해온 바, 이번에 결정적인 혐의를 잡고 특수살인죄를 적용해 그를 기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기사를 채 다 읽기도 전에 호흡이 가빠와 냉수를 쭈욱 들이켰다. {미, 믿을 수가 없군요. 곽웅혁씨가 살인마라니......} 그러고서도 떨려오는 심장을 가눌 수가 없어 허둥대며 담배를 찾아 빼물자 형사가 라이터 불을 들이밀며 말했다. {겁먹지 마시고 침착하세요.} {이 기사가 정말 사실인가요?} 나는 끝까지 믿을 수가 없어 말했다. {물론 사실이구 말구요.} {헌데......} 나는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어떻게 곽웅혁씨는 지금도 버젓이 세상에 나돌아다니고 있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곽웅혁씨는 끝내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구속적부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고 말았죠. 하지만 사건담당 형사로서 전 낙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으니까요. 심증은 확고했지만 물증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죠. 그렇다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를 방치해 둘 수만도 없었습니다. 일단 잡아넣고 기자들을 불러 매스컴에 터뜨린 겁니다. 큰 물의가 뒤따랐지만 우리로서는 최선이었습니다. 검찰 간부 하나가 나서서 좌천될 각오를 하고 대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정도도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 자신이 피해를 보면서까지 노렸던 것은 더 이상 곽웅혁씨가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사람에게 더 이상 진료행위를 맡길 수는 없다는 결론에서였습니다. 말이 좋아 '무슨 씨'지 그 놈은 영락없는 살인귀입니다. 여자들만 골라 죽이는 놈이죠. 수법도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죽이는데는 주로 면도날을 사용하지만 뒷처리는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화공약품으로 시체를 녹여대는데 그 마무리하는 솜씨가 일품이라 증거 하나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형사는 점점 흥분해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그가 커피를 들이킨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난 그 놈이 풀려나면서부터 쭉 뒤를 밟아왔습니다. 벌써 1년이 넘었죠.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그 놈을 포기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놈은 죽기 전까지는 냉혈(冷血)속에 흐르는 살의를 결코 스스로는 떨쳐버리지 못할 놈입니다. 뒤를 추적하다 보면 언젠가는 또 살인을 저지르겠지요. 난 그때를 기다려왔던 겁니다. 그런데 경찰에 불려와 시달림을 받은 후 한동안 몸을 사리며 움직임이 없었던 놈에게서 슬슬 반응이 나타난 겁니다. 드디어 하나의 목표물을 점찍었더군요.} {그, 그게 누구죠?} 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애라양입니다.} {왜, 하필 애라를......} {옷차림이 허술했기 때문이죠. 놈은 여자들만 골라 죽이지만 아무 여자나 죽이는 건 아닙니다. 그 놈은 화장이 짙거나 행실이 헤퍼보이거나 스커트가 짧아 성적인 감정을 도발시키거나 하는 여자들만 골라 죽여왔습니다.} {그래서......그랬군요.} 나는 그가 백남준의 <다다익선>과 누드화에 격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아니에요. 저 혼자 한 얘기예요.} 나는 그 일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다급한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애란 어쩜 좋죠? 그 자를 만나는 데 재미를 붙인 거 같은데......} 나는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다 듣고난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애라에겐 곽웅혁의 신분에 대해서는 당분간 알리지 않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애라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그건 염려마세요. 내가 둘이 만날 때는 언제나 따라붙고 있으니까요. 오늘 애라양은 외출을 안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너무 쉽게 장담하는 거 아녜요? 만약에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애라양을 굉장히 아끼시는가 보군요. 헌데......유진씨는 애라양과 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형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와졌지만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이인데 양동수씨와 결별한 애라가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우리집에 묵게 된 거예요.} {다른 두 명은요?} {제 뒤를 다 캐고다니셨군요.} 나는 형사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 두 명은 곽웅혁씨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전적으로 제 사생활에 속하는 문제예요. 제가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 협조를 좀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요?} {다른 건 없습니다. 수시로 나와 연락을 취해서 애라의 반응이라든가, 외출시간, 만나는 장소 같은 정보를 미리 빼내 알려주면 됩니다. 그러면 나로서는 대처하기가 무척 편하거든요. 24시간 내내 지키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구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애라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한 저로서는 섣불리 응할 수가 없을 거 같아요. 애라의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순 없잖아요.} {유진씨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좀더 시야를 넓혀 생각해봐요. 곽웅혁의 숨겨진 전력을 알려 교제를 끊게 만든다면 애라양은 그 즉시 안전해지겠죠. 그 뿐이라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곽웅혁 그 놈은 다시 딴 여자를 점찍어 죽이려 들 겁니다. 그것을 막지 않는 한 이 사건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순 없어요. 또 누군가가 그 놈의 잔인한 손에 희생되고 말 테니까요.} {그렇다면 애라를 미끼로 사용하자는 말인가요?}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사정이 어차피 과거에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됐습니다. 가능한 한 그 놈을 빨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일단 미끼를 던지고 그것을 물 때 잡아채는 수밖에 없는 거죠. 미수범이라 처벌은 크지 않겠죠. 속상하고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어쩌겠습니까? 놈이 계속 싸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게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형사의 말은 옳았다. 미끼가 누구이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기는 마찬가지 일 터였다. 애라가 재수없게 걸려들었다고 해서 형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선뜻 결정을 못내리고 있자 형사가 부추기듯 말했다. {도와주셔야 합니다. 죽은 여자중에는 16살 난 소녀도 포함돼 있어요. 그 아이는 결손가정에서 자라다 궁핍과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매질을 견딜 수가 없어 거리로 뛰쳐나왔어요. 그후 술집주인의 꾐에 빠져 방배동의 까페에서 호스테스로 일했는데 마침 그 근처에서 개업을 하고 있던 곽웅혁의 눈에 띈 겁니다. 어느날 소녀는 깜쪽같이 증발해 버렸어요. 소지품과 그 동안 벌어들인 돈을 저금한 통장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말이에요. 우리가 이 사실을 안 건 2년 후였어요. 우린 놈이 병원을 개업한 곳에선 이상하게도 증발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단서를 잡아 추적하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거죠. 하지만 누구도 그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녀의 증발은 유야무야로 끝나버리고 말았어요.} {정말 잔인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곽웅혁에 대해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의 내부에 그런 끔찍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부탁합니다.} 형사는 호소하는 눈빛이 되어 말했다. {글쎄요. 당장은 대답하기 어렵군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형사의 눈가에 낭패감이 스쳐갔다. {실망시키진 않을께요.} {그럼 믿어보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애라가 걱정되기는 커녕 곽웅혁의 과거에 대한 관심만 높아갔다. 나는 그가 흥분해 소리치던 과천 미술관에서의 일을 몇 번이고 머리속에 그려보았다. ----젠장! 더럽고 비열한 작품이군! 이건 순 미친 짓이야! ----이런 오탁(汚濁)된 작품을 국립미술관의 상징물로 세워놓다니 대한민국의 미술정책 수준을 한눈에 알만 하군. 대체 누가 이 따위 불결한 작품을 이곳에 세우자고 결정한 거야? 보는 눈중에 중고등학생이 한 두 명이 아닐 텐데......미친 짓이야! 정말 다들 미쳐버렸어! 아무렴, 눈귀가 제대로 박혀 있다면 이런 파렴치한 짓을 멋모르고 할 수야 없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군! 그건...돈 후안이라는 바람둥이놈이 스페인에서만 정복한 여자의 숫자란 말요. ----이 영문제명의 꼬라질 봐요! 더 모어 더 베터(The more, The better)라니...... 이게 더러운 수작이 아니면 그럼 뭐란 말입니까? 많을수록 좋다니요. 파트너를 하루에도 서너 명씩 바꿔가며 데리고 노는 것이, 그리구 오입을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 돼먹잖은 짓이 아니란 말입니까? ----아아, 더러운 것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형사를 만난 날 이후 곽웅혁은 어디에서나 내 주위를 어른거렸다. 애라를 볼 때뿐만 아니라, 혼자 조용한 방심에 젖어 있을 때, 심지어 꿈에서도 그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나는 그가 10명 이상의 여자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으면서도 더럽다느니, 오탁됐다느니, 불결하다느니, 돼먹잖았다느니 하는 등의 도닥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에 흥미진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이중적으로 생겨먹은 것인가, 남의 눈에 박힌 미세한 가시는 잘 들여다보면서도 자신의 눈에 박힌 황소 뒷다리만한 들보는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곽웅혁의 연쇄살인은 단순히 그렇게 해석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헤픈 기미를 드러낸 여자들만 골라 죽인 점, 놀랍게도 애라에게 성적인 요구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 성적인 메세지가 담겨 있는 어떤 대상물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어 하는 반응은 하나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논리적 비약과 결함은 없었다. 그의 신념은 적어도 위선적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그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상처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진짜 별안간 문득 그가 나의 4번째 망상환자이어야 한다는 확신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가 스페인에서 돈 후안이 집적댔던 여자의 숫자라고 비난했던 1003이라는 것도 내게는 합이 4 즉 <3+1>로만 여겨졌다. 이제 전미경, 표영표, 윤애라에다 그가 보태짐으로써 완전한 수인 4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망상증 탐구의 완성을 그에게서 보게 되리라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4라는 미신적인 숫자가 다시 한 번 나를 미혹시키고 있었다. 형사를 다시 다방에서 만난 날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한 것은 여전히 미신적인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협조를 하겠어요.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겠어요.} {무슨 약속을요?} 인 형사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 알고 싶어요. 곽웅혁씨에 관한 모든 것을요.} {알 수가 없군요. 다들 그 사람 얘기만 꺼내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화제를 바꾸자고 하는 판인데.} {어떻게 하실래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어렵지 않죠.} 인 형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거리다 이윽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장황한 설명을 요약하면 대충 이러했다. 경찰이 곽웅혁을 쫓기 시작한 것은 정은경이라는 여자의 끈질긴 집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양부모와 함께 LA에 살면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재원이 었는데, 어느 날 서울에 따로 떨어져 살던 언니로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한동안은 무슨 사정이 있겠지 싶어 그냥 견디다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걱정을 하던 차에 서울의 G경찰서로부터 언니가 실종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은경은 부랴부랴 서울로 날아왔다. 그녀가 받아든 것은 경찰이 작성한 몇 페이지의 실종보고서였다. 실종신고를 처음 낸 사람은 '로이드' 정신의료원 경리사원 Y모양이었다. 언니 정정숙과 함께 의료원에서 일했는데, 어느날 언니가 나오지 않아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불통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싶어 하루를 기다렸는데도 전화연락도 없고 의료원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다음날 오후에 세들어 살던 신림동에 찾아가 보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뭔가 불길한 조짐을 느꼈지만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이틀을 더 기다렸다. Y양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은 정정숙이 사라진 지 사흘 후였다. 경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실종신고는 하루에 10건 이상씩 접수될 때도 있다며 경찰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경찰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좀더 기다려봅시다.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닌데 자기몸 하나 제대로 건사를 못하겠습니까? 어디 잠시 여행을 떠났거나 심경에 변화가 있어 혼자 마음정리를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경찰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정정숙은 보름 동안 연락조차 없었다. Y양이 닦달을 하다시피 발벗고 나서자 경찰이 하는 수 없이 움직였다. 정정숙의 셋방은 평상 그대로였다. 그녀가 여행을 떠났거나 집을 오래 비우기 위해 나선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탐문수사가 시작된 지 하루만에 경찰은 정정숙이 병원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이 실종된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인신매매나 강도살인 둘중의 하나로 보고 수사를 펼쳤지만 좀처럼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얼마가지 않아 경찰의 수사는 활기를 잃고 시들해졌다. 정은경은 언니의 셋방에 머무르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어떡하든지 언니의 소식을 알아내지 않는 한 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양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당분간 서울에 머무르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언니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 뭔가 단서를 찾아내려고도 했으나 이미 경찰의 손길이 훑고 지나간 소지품에서 실종의 실마리가 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은경은 며칠을 전전긍긍했다. 실질적으로 경찰이 손을 뗀 사건에 자신이 뛰어들어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처음부터 과욕인 듯 싶었다. 어디서 어떻게 파고들어야 할지부터가 막막했다. 그러다가 하루는(그때 '로이드' 의료원은 이상하게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없었다)병원에서부터 셋방까지의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병원은 행정구역상 봉천동에 속해 있지만 신림동과 맞닿은 곳에 있어 버스로 두 정거장도 안되는 거리였다.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걸어서도 충분히 출퇴근이 가능했다. 정은경은 셋방과 병원을 왕복해 본 결과 한 가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 경찰의 추정과는 달리 언니는 납치되거나 타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 길은 행인의 행이 빈번해서 여간해선 납치나 폭행이 자행될 수 없는 장소였다. 언니가 퇴근할 시간대인 7시에서 8시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도 행인들이 발길이 좀처럼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언니는 실종 당일 7시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Y양과 병원앞에서 헤어졌다는 거였다. 정은경은 Y양을 불러내 따로 만나보았다. 그녀는 그때 인근 소형 백화점 서점코너로 옮겨가 카운터에서 일했는데, 병원이 갑자기 이사를 간 경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에요. 정숙이 언니가 새간호사로 들어온 지 열흘쯤 지났을 때 원장선생님이 우리를 불러놓고 병원을 동숭동쪽으로 옮겨갈 거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전 병원일에 싫증을 느껴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숙이 언니는 선생님과 같이 이사를 가는 것으로 약속이 돼 있었지요.} {언니가 실종되던 날 누구를 만날 거라는 말은 않던가요?} {아니요.} 그녀는 그건 이미 경찰에 가서도 열 번 넘게 진술을 했다고 덧붙였다. {언니가 최근에 자주 만나던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언니와 같이 지낸 게 한 달 남짓이라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어요. 셋방에 한 번 따라가 수제비를 같이 끓여먹은 게 고작인 걸요.} {혹시 사귀는 남자 얘긴 않던가요?} 머리를 가로젖는 Y양의 얼굴은 무지로 가득했다. Y양을 만나서도 신통한 단서를 찾지 못한 정은경은 셋방에 틀어박혀 거의 무위도식하다시피 생활을 했다. 그 동안 언니와 친하게 지내던 A대학 간호학과 동기생들을 만나봤으나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그 남자의 사는 곳이랑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조반도 거른 채 방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데 낯선 청년이 찾아와 문앞에서 언니 이름을 다소곳이 불렀다. 정은경은 그 청년을 방으로 불러들였고 곧 언니의 애인임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조형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청년은 언니의 실종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은경이 그간의 전후사정을 상세히 설명하자 조형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오늘 찾아온 이유는 가부간에 결판을 내기 위한 것이었노라고 했다. {언니에게 딴 남자가 생겼거든.} {그게 누구죠?} {그건 나도 몰라. 언니가 '로이드'의료원으로 옮긴 후부터 싸움이 잦아졌지. 아마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한 달하고 보름쯤 됐을 거야. 우린 그날 대판 싸운 다음 서로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한 후 헤어졌지. 난 옹졸하게도 정숙이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적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감정이 상한 건 정숙이한테 원인이 있으니 그녀가 먼저 자존심을 꺾고 들어오지 않는 한 결코 용서를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말이야. 헌데 어디 연락이 와야지. 그래서 오늘 이렇게 발걸음을 했던 거야.} {새로 사귀었다는 남자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나요?} {물어보지 않았어. 언니도 자기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거 같다는 언질만 줬지 구체적으로 말한 건 없구.} {그래도 눈치 같은 건 보였을 거 아녜요?} {글쎄......이따금 원장 얘긴 했었지만 설마 그 상대가 원장일라구. 유부남일 텐데.} {원장을 만난 적이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만나 뭐하게? 가끔 정숙이를 통해 얘긴 들었었지. 매사에 친절하구 성실한 사람이라구. 정숙인 좋은 원장을 만나 직장생활을 편하게 하게 될 것 같다면서 좋아했었지.} 조형일의 얘기는 Y양이 듣고 본 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정은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Y양을 다시 불러내 언니와 원장의 관계를 넌지시 물었는데, Y양은 펄쩍 뛰며 부인했다. {원장님은 그런 야비한 사람이 아녜요. 데리고 있는 부하직원을 꼬드겨 어떻게 해볼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사람속을 들여다본 것두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죠?} {평소 생활을 가까이서 접하다 보면 다 알 수가 있는 거죠. 오히려 정숙이 언닌 옷차림이 건전치 못하다고 크게 야단을 맞아 울기까지 했는 걸요. 원장님이 언니를 좋아했다면 그럴 수가 있겠어요?} {언니가 무슨 큰 실수라도 저지른 거예요?} {그렇진 않아요. 제가 보기엔 원장선생님은 보기 드문 고결한 인격자이셨어요.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한 느낌도 없진 않지만 젊은 사람들이 탈선하는 것을 안 좋아하셨거든요.} {언뜻 이해가 안 가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언니가 호되게 야단을 맞은 것은 치마 길이가 무릎 위로 올라오거나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다거나 하는 것 때문이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정숙이 언니가 치장하는덴 좀 유별나잖아요. 원장님은 그게 못마땅하셨든 거죠.} {알 수가 없군요. 그건 언니의 사생활이잖아요. 원장님이 간섭할 성질의 것이 못될 텐데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 따라서는 고리타분하게 느낄 수도 있다고 한 거죠. 하지만 원장선생님은 피부노출이 심하고 외모에만 신경을 쓰는 요즘 세대들이 타락을 해가는 거라고 믿고 계셨던가봐요. 제게도 매사에 순진하고 티없이 순결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뿐이 아니에요. 병원 대기실 출입구 맞은 편엔 '순결'이라는 해서체의 원훈(院訓)을 액자에 담아 걸어두셨고 보통 성인여자 키만한 성모마리아 석고상도 보란 듯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두셨어요.} {언니의 반응은 어땠어요? 원장선생님의 지적을 받은 후에 생활태도가 고쳐졌나요?} {네, 두 번째 야단을 맞은 후부터는 언니가 생각을 바꾼 것 같았어요. 속으로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굳이 원장선생님을 자극시키는 옷차림은 삼갔으니까요. 원색의 매니큐어도 바르질 않았구요.} {언니와 원장선생님 둘만 따로 만난 적은 없었나요?} {설마요. 원장선생님이 언닐 밖에서 따로 만날 이유가 뭐 있겠어요? 시키실 일이 있으면 병원에서 지시를 내리면 되는데요.} {하긴 사모님도 계실 텐데 언니와 그랬을 리가 없죠. 제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성급하게 넘겨짚었던 거 같아요.} 나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원장님은 독신이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서른 여섯쯤요.} {그런데 왜 여태 결혼을 안 했을까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정은경이 곽웅혁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만 7개월이나 지난 후였다. 그녀는 언니가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된 것은 아니라는 막연한 확신을 갖긴 했지만, 그저 육감적인 느낌일 뿐 달리 손쓸 도리가 없어 언니를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로이드의료원 곽원장을 개인적으로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것마저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왔었다. 언니를 더 이상 추한 여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심리도 곽원장과 만나는 것을 망설이게 한 요소였다. 또 만나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그런 낭패감이 밀려들면서 아예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도 언니로부터 소식이 없으면 LA로 도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은경은 라면을 끓여먹던 저녁식탁에서 '로이드'의료원에 대한 짤막한 기사와 부딪쳤다. ----H모씨(45세, 여)가 동숭동에 있는 '로이드'의료원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연행돼 즉심이 넘겨졌다. 경찰에 따르면 H여인은 로이드의료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아가씨에게 돈 50만원을 꿔주었다가 그 아가씨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됐다며 술을 마신 다음 병원 대기실에 들어가 기물을 때려부수며 20분간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흔히 '낙숫물'이나 '휴지통'이라는 타이틀로 알려진, 잠깐 세상동정을 엿보는 기사라 자세한 내막은 알 수가 없었지만, <간호사 아가씨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라는 대목이 정은경의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렸다. 우연이겠지. 설마......설마, 아니겠지......아닐 거야. 그러나 정은경은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득달같이 관할경찰서로 찾아갔다. 간신히 담당자를 만나 손바닥이 달도록 사정을 해 사건경위를 전해 들은 다음 행패를 부렸다는 아줌마의 주소를 알아냈다. 아줌마는 다행히 병원의 선처로 구속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밀집해 붙은 창신동의 퇴락한 슬라브집까지 찾아온 정은경을 툇마루에 걸터앉게 한 그녀는 자신은 문턱에 팔을 걸치고 앉아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무신 재미난 일이 터졌다고 예까지 찾아왔남? 낼로야 망신살이 뻗쳐서 남세스러워 죽갔는디.} {긴히 여쭤볼 게 있어서요. 돈을 꿔주었다는 간호사 아가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이웃이니께 왕래가 잦았던 게지.} {그 아가씨가 사라졌다는 건 어쩐 일이에요?} {모르겄어. 시상에 증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믿어줄라나 모르겄어. 그 전날엔가도 우리집 사랑방에 놀러와 딸년이랑 별지랄들을 다하며 밤새 화투패를 돌렸는디. 그래서 사람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겨. 인두겁을 쓰고도 지가 그럴 수가 있는겨? 성의를 배신으루 갚아도 유분수지. 고거 50만원 떼먹자고 석삼년 쌓아올린 인정을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놓을 건 뭐람? 더럽다니께. 진짜 더러워! 세상사 살아봐야 말짱 헛것이라더니 내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줄은 누가 알았남?} 끝도 없이 쏟아놓는 아줌마의 넋두리를 듣고서는 간호사 아가씨가 꾼돈을 갚기 싫어 도망을 간 건지 언니처럼 갑자기 증발한 건지 알 수가 없어 그 아가씨가 자취를 했다는 옆집을 방문했다. 뜻밖에도 그곳은 초상집으로 변해 있었다. 시골에서 부모와 남동생이 올라와 자취방에 묵고 있었는데, 반쯤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듣기로는, 자취를 하던 아가씨가 갑자기 실종되는 바람에 꼴이 이렇게 험악하게 되었노라고 설명했다. {신고는 했나요?} {그야 물론 했지. 여적지 꾸물거리고 있으면 우짤껴?} {경찰은 뭐래요?} {그냥저냥 알았다고만 하드만.} 실종사건에 대해 경찰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간 전국적으로 실종자로 처리된 수가 10만명 가량 누적되어 있어 더 이상 한정된 경찰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에 젖어 있기 때문이었다. 가정불화로 인한 가출과 밤늦게 귀가하다 불량배에게 납치되는 경우가 여성실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실종은 사후약방문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우니 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에도 관료조직의 타성이 붙어 있어 매사를 쉽게만 처리하려는 경향이 짙어 보였다. 경찰은 이번 두 건의 실종사건이 '로이드'정신의료원의 간호사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기묘한 일이었다. 하긴 원래 우연이라는 자체가 기묘한 일이 아닌가. 과민반응일지도 몰라. 괜한 일로 생사람 잡으면 어쩌려구. 하지만 만에 하나 우연이 아니라면...... 이런 가정을 과감히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함춘미라는 이름을 가진 실종된 간호사가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자관계도 복잡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나서였다. 정은경은 Y양의 말대로라면 함춘미양도 꽤 곽원장의 잔소리를 들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 번 그에게 의심을 두자 생각이 자꾸 그런 쪽으로만 휩쓸려갔다. 알 수 없게도 곽원장의 노한 얼굴과 핏발이 선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정은경의 의혹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로이드'의료원이 다시 대구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며칠 후 알게 되면서였다. 그렇게 빈번히 이사를 다녀야 할 까닭이라는 것이 혹시 도피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정은경은 담당 형사반장을 만나 자신의 신분과 '로이드'의료원의 간호사가 8개월 전에도 실종된 사실을 밝히고 곽웅혁 원장을 조사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형사반장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데데하게 나왔다. {무슨 근거루요?} {같은 병원에서 간호사가 연달아 실종됐다니까요. 그것으로두 충분히 조사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8개월이나 간격이 있는 사건이에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에요. 우연이란 건 드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아요. 실종된 아가씨 두 명이 그 의료원 간호사였다는 단서만으론 조사를 할 수가 없소.} {직무유기 아닌가요?} {아가씨, 말 조심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껄여대는 거야! 우린 이미 당일 병원관계자 알리바이를 다 조사했어. 곽원장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귀가한 걸로 증명됐단 말야.} {그 분은 혼자 사는 걸루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형사반장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정은경을 노려보았다. {아마 알리바이가 증명이 됐다는 건 곽원장의 입을 통해 확인한 것일 거예요. 제3자가 같이 있었다고 참고인 진술이라도 했다면 저도 순순히 물러나겠어요.} 그러자 형사반장은 말문이 막힌 채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심기가 몹시 언짢아진 것 같았다. 그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아가씨, 그쯤해 두시고 저나 잠깐 봅시다.} 정은경은 하는 수없이 그 형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형사는 정은경을 복도 구석의 자판기 앞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커피를 뽑아 그녀에게 권한 다음 말했다. {옆에서 엿들으니 언니도 실종되었다는 것 같은데.....아, 참!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인동하라고 합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는 인 형사가 어떻게 정은경을 만났고 그후 대구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를 듣고 있는 동안 열병을 앓고 난 후처럼 멍하기도 하고 설명이 부족해 미진하게 느꼈던 점을 캐묻지 않고는 한시라도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얘기를 마쳤을 때 나는 마치 스크린 위에 재빠르게 전개되는 영화의 장면을 추체험(追體驗)하듯, 그렇게 한 기이한 인간의 잔혹한 인생역정을 막 들여다 본 후라서인지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차올라오는 감정의 갈피를 잡느라 한동안 침묵에 빠져 있었다. {믿어져요?} 인 형사는 그런 나를 두고 놀리듯 물었다. {전 결과에 흥미를 가졌던 건 아니에요.} {무슨 뜻이죠?} {연쇄살인은 이미 외신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잖아요. 게다가 화성사건도 TV에서 밀착취재를 한 적도 있구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사람의 정신상태예요. 몇 명을 죽였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하는 이유 말이에요.} {살인마에게 그런 동정을 보낼 가치가 있을까요?} {동정을 보내자는 게 아니에요. 우린 흔히들 결과가 너무 엄청날 때 원인으로부터도 시선을 돌려버리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 외면이 무지를 낳고 다시 유사한 일이 반복될 때도 똑같이 당황하고 마는 바보꼴을 보일 때가 빈번하잖아요.} {일종의 탐구정신인가요?} {그렇게 봐주면 좋구요.} {정말, 나로서는......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인 형사는 의혹의 시선을 끝까지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나는 따갑게 부어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아까 말씀 도중에 잠깐 곽웅혁씨의 어머니가 창녀였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그 얘기나 더 들려줘요.} {글쎄요. 그쪽 방면은 주로 심리학을 전공했던 정은경씨의 아이디어였죠. 우리가 함께 곽웅혁의 뒷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가졌던 대목은 그의 성장기였소.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거의 영등포 역전의 창녀촌에서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소. 어머니가 창녀와 포주생활을 합쳐 대략 20년간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모양이오. 난 의사의 과거치고는 좀 특별하다는 생각 정도에 머물렀었는데, 아마도 그의 어두운 과거가 살인을 저지른 직접적인 동기일 거라고 정은경씨가 말했던 거죠. 그녀는 심리학 일반에 정통해 있었기에 마침 곽웅혁이 죽인 아가씨들이 한결같이 피부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었거나 성적인 타락을 보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쉽게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었던가봐요. 물론 불감증 환자로 가장해 곽웅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막연한 추정에 불과했지만, 몇 번을 만난 후부터 그런 확신이 굳어지게 되었죠. 그후 우리의 수사는 그녀의 조언에 절대적인 힘을 빌었던 거죠. 그녀는 곽웅혁의 증상이 편집적 망상증이라고 진단했었소. 자신이 믿는 바를 세상에 적용해 뜻대로 관철시키려는 놀라운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했소. 만일 그가 정치인이었다면 온갖 곤란과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을 개혁할 사람이라더군요. 하지만 그의 심성은 어려서 창녀촌에서 살면서 보고 느꼈던 바 때문에 심하게 성적으로 왜곡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될 뿐 더 이상의 것은 알기가 어려웠소. 다만 한 가지 그 자는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의 시신을 신주 모시듯 하는 걸로 봐서 그 성적인 왜곡이 어머니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죠.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의 어머니가 언제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소. 정은경씨는 그가 어머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지만, 우린 과연 자신을 길러준 생모를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느냐고 반대 의견을 개진한 적도 있었소. 어쨌거나 그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오. 헌데 문제는 우리밖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린 그의 정신감정을 의뢰할 셈이었지만, 공소제기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통에 그를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소.} {정은경씨는 지금 어떻게 됐죠?} {1년쯤 더 곽웅혁을 잡아넣으려고 기회를 엿봤지만, 허사로 돌아가자 미국으로 들어가고 말았소. 어때요? 이제 궁금증이 풀린 거요?} 165. {아니요. 전 그 사람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걸요.} {대단한 호기심이군요. 하지만 우리도 더 아는 게 없는데 어떡하죠?} {직접 물어볼 생각이에요.} {허허허......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그건 그렇고 제게 오전과 오후에 한 차례씩 하루에 두 번 정도 연락을 주세요. 저도 필요하면 수시로 연락을 드릴께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애라양의 동태만 파악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약속을 했으니 그건 염려마세요. 헌데......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건데......} 나는 과연 이걸 입밖에 내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인 형사는 주저함을 재빨리 알아채고는 말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보세요.} {절 이상한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약속하시겠어요?} 나는 이 물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문을 알리 없는 그는 쉽게 대답했다. {그럼요. 제가 왜 유진씨를 이상한 여자로 보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곽웅혁 그 사람을 우리집에 묵게 하면 어떨까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인 형사는 가는귀가 먹은 듯이 반문했다. 그러자 알 수 없게도 나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곽웅혁씨를 우리집에 묵게 하면서 치료해 보고 싶어요.} {치료라고 했습니까?} {네, 제 나름으로 터득한 방법이 있어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망상환자들을 다루는 덴 자신 있어요.} {한 마디로 어이가 없군요. 대체 지금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놈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연쇄살인귀예요. 그런 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뭘 어쩌자는 거죠?} {말 그대로예요. 치료를 해 보고 어요.} {치료요? 도대체 뭘 어떻게 치료를 한다는 거죠?} {사실은......} 나는 전미경, 표영표, 윤애라가 집에 묵게 된 경위와 그들의 망상증에 대해 차근히 설명해나갔다. 인 형사는 다 듣고 나자 나를 이해해 주기는커녕 만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나왔다. {곽웅혁을 그렇게 만만하게 봐선 안됩니다. 놈은 유진씨가 적당히 구슬려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녜요. 애라나 데리고 있다는 학생들 수준이 아니란 말이에요. 전 절대 그런 요구에 응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런 말일랑은 다시는 입밖에 내지도 말아요.} {그럼 저도 협조하지 않겠어요.} 나는 이처럼 충동적이다. 갑자기 떠올린 일을 오래 전부터 계획해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을 것처럼 강경하게 나갔다. {그건 아까 이미 저와 약속을 한 사항 아닙니까? 이제 와서 즉흥적으로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인 형사님이 제 안전을 걱정하시기 때문에 만류하신다는 거 알아요. 허나 한 번 냉철하게 생각해보세요. 곽웅혁씨가 아무 여자나 죽인 건 아니잖아요. 몸가짐만 주의하면 미경이나 저나 충분히 안전할 수 있어요.} {그렇긴 해도 그건 모험입니다.} {그럼 애라의 생명을 거는 건 모험이 아닌가요?} {......} 인 형사는 완전히 먹통은 아니었다.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움찔해 있다가 말했다. {하지만 곽웅혁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께요. 불가능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구요. 하지만 전 자신 있어요.} 과연 내 의도대로 될지는 곽웅혁을 만나봐야 알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일단 인 형사의 허락을 얻기 위해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좋습니다. 유진씨가 어떡하든지 곽웅혁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고 칩시다. 그리고 회화를 통해 망상증을 치료해 나간다고 칩시다. 그게 저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 거죠? 전 놈이 실수하는 현장을 덮쳐서 잡아가두기 위해 유진씨의 협조를 구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면 애초의 제 목적은 가운데서 붕 뜨고 마는 거 아닙니까?} {부인하지 않겠어요. 끝내 어쩔 수가 없다면 인 형사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제 마음대로 할 테니까요.} {유진씨 마음대로 하다니요? 다 된 죽에 코라도 빠뜨리겠다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전 애라에게 곽웅혁의 신분을 밝히겠어요. 그리구 곽웅혁에게도 인 형사님이 쫓고 있다는 얘길 전하겠어요.} {뭐야? 아니 당신 일을 단단히 망칠 셈이군! 내가 그 놈을 쫓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당신이 이제 와서 재를 뿌릴려는 거야?} 까딱하면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판으로 인 형사는 달아올랐다. 하지만 나는 속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되받았다. {흥분해 소리치시는 걸 보니까 제 뜻은 충분히 전달된 것 같네요. 어떡하실래요?} {당신 완전히 정신이 나간 여자야! 염병헐, 이거 손찌검을 할 수도 없구!} 나는 그가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인 형사는 자제력이 뛰어났다. 금방이라도 완력을 쓸 것처럼 들썩거리던 몸을 등받이에 척 기대더니 느린 동작으로 담배를 뽑아물며 말했다. {우리 쓸데없는 일루 피차간에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이 일은 유진씨가 나서서 설칠 자리가 아니란 말이오. 괜히 시퉁맞은 짓으루다 일 그르치지 말구 협조하면서 조용히 지켜보기나 해요.} {절 나쁜 여자로만 몰아붙이지 마세요. 인 형사님에게 억하심정이 있거나 재미루 방해를 놓고 싶어 이러는 거 아녜요. 정말 곽웅혁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치료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제발 그 말 같지 않은 소릴랑는 작작해요! 상대는 심리와 신경성 질환에 통달한 정신과의사예요. 누가 누구를 치료한단 말입니까?} {그 사람은 정신과의사이기 이전에 환자예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명심해야 해요.} {환자이기 이전에 살인마요. 검거가 우선되어야 하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그 사람은 아직 혐의자지 범인인 것은 아니잖아요.} {이거 점입가경이로군. 아니 내가 당신과 그런 문제로 입씨름을 하기 위해 여기 나온 줄 알아요?} 그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부벼끄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간신히 그의 손을 잡아 앉혔다.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인 형사님의 감정을 자극한 건 사과드려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빨리 말해봐요.} 그는 더 이상 허튼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성급해져 있었다. {전 인 형사님이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빨도 안 먹힐 소릴랑는 그만둡시다. 난 그만 가겠소. 그리고 분명히 경고해 두겠는데 협조를 하지 않는 건 상관않지만 훼방을 놓으면 재미 없을 줄 알아요.} 그가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가실래면 어서 가세요. 더 이상 붙잡고 부탁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말씀드려야겠네요. 인 형사님이 착각하고 계신 건 곽웅혁이 애라를 죽일 거라는 바로 그 믿음이에요.} {아니 끝까지 나를 놀리실 작정입니까?} 인 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인 형사님 말씀대로라면 왜 곽웅혁이 애라를 아직 안 죽였죠? 곽웅혁이 애라를 만난 건 꽤 오래 됐어요. 죽일 결심이었다면 벌써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구요.} {그래서요?}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에 흥미진진해진 표정이 나타났다. {제가 보기엔 곽웅혁은 애라를 사랑하고 있어요.}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그 이유라면 틀렸어요. 그 놈은 누구든 사랑할 사람이 아니오.} {저랑 내기할까요? 곽웅혁이 애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접근했는지 아니면 죽이기 위해 접근했는지.} {그 놈이 들으면 배를 움켜쥐고 3일 동안 웃어도 모자랄 소릴 거요.} 그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번져갔다. {인 형사님 말씀대로라면 왜 그가 애라에게 5캐럿짜리 다이아반지를 선물했을까요?} {설마......그게 사실이오?} {물론이에요. 제가 있지도 않은 거짓말로 얼버무린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그야......그야 애라에게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한 미끼였을 거요.} {웬지 그 말이 제게는 궁색하게 들리는데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제게 자기본명을 밝혔을까요? 누군가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모습을 여러 번씩 주위사람들에게 노출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본명도 서슴없이 가르쳐주고......과연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살인자의 심리일 수 있나요?} {그, 그럴 리가......} 인 형사의 표정이 드러나게 굳어졌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어디 갈 테면 가보라는 식으로 다리를 접어 꼬았다. 예상대로 인 형사는 털퍼덕 주저앉았다.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었다. 조바심이 나는 건 이제 그였다. {방금 한 말들이 진짜요?} 나는 약간 거만해진 태도로 고개만을 끄덕였다. {나를 놀리기 위해 꾸며댄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는 상기된 채 반복해 물어왔다. {그는 자신의 직업까지 제게 말했어요. 그렇게 못미더우면 직접 확인해 보시지 그러세요.} 그러자 낭패감으로 인해 그의 안색에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말의 기대에 의지하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놈은 애라를 사랑하는 건 아닐 거요.} {아니라고 단정지어 말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그 반대도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해요.} 그의 대꾸가 없었기에 나는 위로하듯 말했다. {곽웅혁이 우리집에 머무르는 동안은 바깥의 여자들은 안전할 거예요.} {......} {어떡하실래요?} {......} {곽웅혁이 끝내 거부한다면 그땐 인 형사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를께요. 다시는 약속한 말을 뒤집는 일도 없을 거구요.} {자신있소?} 그가 이윽고 입을 떼었다. {자신있어요.} {좋아요.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놈의 심리상태나 한 번 살펴봅시다. 과연 녀석에게 사랑할 마음이 생겼는지......대신 하루일과는 꼭 내게 보고해야 하오. 약속하겠오?} {약속해요.} {또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줘야 할 게 있소.} {뭐죠?} {곽웅혁이 입주하게 된다면 그 전에 우이동 집을 한 번 구경하고 싶소.} {문제 없어요. 다만......표영표란 학생이 주사파인 것에 대해 눈감아주셔야 해요.} {난 정치나 이데올로기엔 관심없소.} {그럼 제게 보름의 시간을 주세요. 그 안에 그를 입주시키지 못하면 손을 들겠어요. 참! 곽웅혁씨가 묵고 있는 곳을 아실 테죠?} {요즘 놈은 일정한 주거를 갖고 있지 않소. 호텔과 여관을 전전하고 있오.} {제겐 잘 된 셈이군요. 그 만큼 설득하기가 쉬울 테니 말이에요. 헌데 지하실에 모셔놨다는 뼈가 앙상한 어머니의 시신은 어떡하구요?} {경찰에서 풀려나자마자 화장을 시킨 걸로 알고 있소.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아무튼 알겠어요. 애라를 통해 내일 당장이라도 그 자를 만나보겠어요.} {다시 충고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성적인 자극이 느껴지는 옷은 절대 삼가시오. 그리고 애라든 당신이든 곽웅혁을 만날 때는 내가 항상 곁에서 지키고 있다는 걸 명심해요.} 곽웅혁에 대한 나의 느낌은 차츰 복잡한 양상을 띠어갔다.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감정의 변이 또한 잦아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특별히 의식적인 변화를 내부에서 감지하지는 못하였다. 애라를 축으로 한 질투의 감정은 그가 살인귀라는 사실로 인해 영향을 받을 것이지만, 알 수 없게도 둔감할 정도로 무덤덤하고 무감각한 기분이 한동한 나를 지배했다. 나는 그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의 끔찍한 전력(前歷)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면서 전혀 공포의 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곽웅혁은 전미경, 표영표, 윤애라와 동격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건 그의 편집광일 뿐이었다. 그의 편집광은 공격적인 특성이 현저할 뿐이지 다른 편집광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않는 확고부동한 신념에 어떡하든지 세상을 깎아 꿰어맞추려는 기도(企圖)는 편집광의 흔해빠진 특징에 불과했다. 그는 살인이라는 가장 비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이라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 어이없는 망상이야말로 편집광환자가 자신을 지탱해나가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목표는 정해졌다. 곽웅혁을 만나 담판을 지으면 그만이다. 그깐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사람 하나 설득하는 일이 무에 어려우랴. 그렇게 자신에 넘쳐 있는 한편으로 걱정 또한 얕잡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곽웅혁이 사람 사귀기를 극도로 꺼려할 것이 분명했다. 혼자 고독하게 지난 10여년을 버텨오며, 더구나 은밀한 살인의 쾌감을 느껴온 자가 공동의 주거터전에 거부감을 드러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의 갑작스런 제안 또한 의뭉스럽게 받아들일 염려가 있었다. 따라서 접근은 천천히 단계를 밟아 이뤄져야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그럴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밖에도 곽웅혁을 순조롭게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선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개중에 애라의 반응은 반드시 신경을 써야할 대목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인 형사와 헤어져 귀가한 날 저녁 넌지시 애라의 의중을 탐색했었다. {식탁에 수저 한 벌이 더 늘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언니두, 그게 어디 내 마음 갈피대루예요? 개줄을 당기면 개가 따라갈 수밖에요.} {어째 빈정대는 거 같다.} {빈정대긴요. 언니가 하자는대로 한다는 거죠.}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고맙구. 요즘 곽웅혁씨와는 어떻니?} {그냥저냥해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구 와인도 마시구 남들처럼 이따금은 영화관람도 하구요. 자주 만나다 보니 그 아저씨 그런대로 괜찮은 구석이 있어요. 돈을 많이 쓰면서 생색도 안내구 은밀한 요구도 없구 내가 원하는 건 가급적이면 다 들어주려는 기색이 역력해 귀여운 거 있죠. 한 가지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 나이에 야한 걸 아주 못참아하는 성미예요. 한 번은 샤론 스톤 주연의 '원초적 본능'을 보러 시네하우스에 가자니까 펄쩍 뛰면서 그런 저질스런 영화를 봐선 안된다구 30분이나 왕설교를 하는 거 있죠. 하품이 나오고 허리가 비꼬여 얼마나 혼났다구요.} 애라는 언제나 저 모양이다. 천진난만하긴 하지만 가볍고 경박스럽기까지 하다. {네 옷차림에 대해서는 말 않디?} {왜요, 진작에 옷차림이 허술하고 스커트 길이가 짧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길래 '그럼 안 만나면 그만이지 웬 간섭이 그리 많아요'라고 따끔하게 쏘아붙였더니 그 다음부터는 꿀먹은 벙어리예요.} {너 재주두 비상타. 그 남자 오금을 저리게 만든 걸 보니.} {오금저리게 만들어 뭣에 달이게요? 재미없구 시들해지면 낼 당장에라도 엉덩이를 차줄 건데요 뭐.} {그러다 크게 욕보지.} 나는 곽웅혁의 살인전력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애란 여전히 반농으로 받아넘겼다. {은제 내가 좋아서 만났나요? 지가 안달이 나서 보채구 또 언니가 떼밀다시피 하니까 마지못해 만나준 거지.} 그러며 애라는 곱디 고운 순백의 열손가락을 부채살처럼 쫙 펴 형광등에 번쩍이는 금붙이를 얄밉상스럽게 과시하는 거였다. 못보던 금반지였다. 또 곽웅혁이 사준 것일까. 나는 묻고 싶은 욕구를 꾸욱 눌러참았다. {너 그 남자가 우리집에 묵으면 어떻겠니?} {그 남자라뇨?} {곽웅혁씨 말야.} {아저씨가 여기에 묵겠대요?} 애라는 화등잔처럼 밝아진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목소리도 한 톤 높게 격앙돼 있었다. {만일에 말야.} {하필 왜 그런 가정을?} 눈초리가 어둠속을 더듬듯 긴장했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건 안돼요.} {왜?} {아저씨와 함께 살게 되면 내 사생활이 다 탄로나잖아요.} {그런다구 대수로울 거 있니?} {싫어요, 난.} {꺼려하는 핵심이 뭐야?} {딴 거 없어요. 사생활이 자유롭지 않을 거 같아 그래요. 사람 만나는 것두 신경쓰이구.} {곽웅혁씨가 들어오게 되면 뒷뜰 별채를 쓰게 될 거야. 또 전화 때매 그런다면 네 방에 따로 넣어줄께.} {언니, 근데 증말 아저씨가 여기 들어오겠대요?} {그건 나중 일이야. 그렇게 싫어?} {싫어요.} {혹시 너 물주를 떼일까봐 그런 거 아니니?} {......} 애라는 내심이 들켜서인지 얼굴이 빨개지며 대답을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봐. 허물잡자구 이러는 거 아냐.} {부인하진 않겠어요. 남자 친구 많은 거 아저씨가 알아봐요. 아마 곱게 보진 않을 거예요.} 애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내가 한 달에 얼마씩 대줄께.} {액수가 수월치 않을 텐데요?} 돈 얘기에 애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애저녁에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이제 곽웅혁과 나 사이에 양다리를 걸쳐놓고 쥐어짤 수 있는 데까지 저울질을 할 거였다. {백이면 되니?} {짜지만 언니가 주는 거니까 사양하진 않겠어요.} 애라는 선심을 쓰는 척 하며 다시 곽웅혁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저씨가 왜 갑자기 여기엘 들어온대요?} {그건 니가 직접 물어봐.} 나는 이런 방법으로 곽웅혁을 뒤에서 휘저어 놓을 셈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될 터이니까. {아저씨도 우리들처럼 하루에 2시간씩 언니 강의를 받나요?} 애라는 내 치료법을 '강의'라고 표현하길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이 병치료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글쎄, 어쩌면......} 애라는 많은 것을 캐묻고 싶어 했지만 나는 교묘한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궁극적인 대답은 곽웅혁에게 있는 것처럼 떠넘겼다. 그렇게 애라의 궁금증을 유발시킴으로써 오늘 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시키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저녁 외출에서 돌아온 애라는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언니, 아저씨가 그러는데 자신은 금시초문이라던데?} {뭐가?} 나는 관심이 없는 척 돌아서서 커피보트를 잔에 기울이며 대꾸했다. {여기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될 거라는 거 말예요.} {그래 뭐래?} {뭐라긴요. 자신은 그런 말 입밖에 낸 적이 결코 없다던데요.} {커피 마실래?} {블랙으루요.} {알아, 니 식성.} 나는 향내가 사르르 퍼져오르는 커피 두 잔을 들고와 식탁에 내려놓고 애라와 마주앉았다. {다른 말은 없디?} {아뇨.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면서 언니에게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 하던데요.} {오해는 무슨!} {그럼 아저씨가 나한테 거짓말 한 거예요?} {아니, 아직 확실히 결정난 일이 아니어서 그랬을 거야. 나중에 일이 뒤틀리면 그것도 우습잖니. 너무 보채지마. 곧 가부간에 매듭이 지어질 거야.} 애라는 시원하게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 불만족한 얼굴을 했으나 내가 단단히 못을 박아두어서인지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이런 정도로 장애물 하나는 제거된 셈이었다. 애라의 불만이 예상보다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실 애라가 죽기 살기로 반대했다면 나로서도 그녀를 설득하기가 용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당사자였다. 곽웅혁을 만나기 전에 나는 그를 기사화했던 오래 전의 신문을 찾아내 복사해 두었다. 왜 그런지 그 기사가 꼭 한 번은 필요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애라를 뚜쟁이로 내세워 만나는 루트를 포기하고 대신 인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곽웅혁이 묵는 숙박지를 알아냈다. 김포가도에 약간 못미처 위치한 고급 모텔이었는데, 곽웅혁은 열흘째 그곳에 머물고 있으며 외출이 없는 날은 길 건너편 '보헤미안'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적당한 날을 잡아 모텔 주차장에서 오후 5시쯤 그의 흑색 프린스를 확인한 다음 '보헤미안'을 찾아갔다.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리던 비끝이라 손님은 별로 붐비지 않았다. 손님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식사에 열중하며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입구가 잘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정하고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위스키와 팝콘 안주가 날라져 왔을 때 문득 항상 지켜보고 있겠다던 인 형사 말이 떠올라 주위를 세심히 둘러보았지만 인 형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은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위스키 두 잔을 말끔히 비워낸 지 10여분 후, 그러니까 정확히 6시 정각에 곽웅혁은 홀로 들어섰다. 체온이 떨어져서인지 흰 와이셔츠에 고동색 털실 가디건을 받쳐입고 하의는 간편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앉을 곳을 물색하느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가 나를 보지 못하게 얼른 머리를 떨구었다가 내 옆을 지나친 다음 제대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가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가는 동안 나는 담배 한 대를 맛있게 음미해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엘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가 앉은 자리의 옆통로를 스치면서 슬몃 알은 체를 했다. {어머, 곽선생님 아니세요?} {누, 누구......} 그러다가 그는 흰 와이셔츠 단추 틈새에 끼어 가슴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테이블 냅킨으로 입가의 음식찌꺼기를 훔치면서 일어났다. {아니, 여긴 어쩐 일루?} {근처에 볼일을 보고 가던 중에 배가 출출해서 들렀어요.}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시나리오였다. 곽웅혁은 잠깐 경계의 눈초리를 번득였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아, 네......} {잠시 앉아도 되겠죠? 안 그래도 한 번 뵈었으면 했는데.} {그러시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홀을 한 번 휘익 둘러본 후 자리에 앉았다. {누구 찾는 사람 있으세요?} 내가 짓궂게 묻자 그는, {아, 아닙니다.} 라고 더듬었다. 나는 마침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함박스텍을 시켰다. {저도 식전이라서요. 선생님은 제게 신경쓰시지 마시고 어서 드세요.} 그러나 곽웅혁은 입맛을 잃었는지 물을 한 모금 쭈욱 들이킨 다음 아예 나이프와 포크에서 손을 떼었다. {이러시면 제가 민망해져서 싫어요.} 나는 그렇게 두어 번 더 식사를 권했으나 그는 한사코 사양하면서 채 1/5도 못먹은 접시를 한쪽으로 밀쳐두며 말했다. {제쪽에서도 기회를 보아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마침 잘 됐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듣자니까 제가 댁에 머물게 될 거라고 했다던데 그건 무슨 얘기죠?} {애라에게서 우이동 집안 사정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나요?} {전혀요. 그 아이가 별루 내색을 안했고 저로서도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윤 없을 거 같아서요.} 나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이동집엔 저말구 세 식구가 더 살아요. 그중에 물론 애라도 포함돼 있구요. 우리 넷은 전에는 각기 전혀 모르던 사이였는데, 얼마 전부터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되었죠. 아마 애라는 우리가 같이 살게 된 이유를 전혀 짐작 못하거나 또 안다 해도 선생님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그 애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어요. 혹시 제가 왜 애라나 다른 친구들을 우이동집에 살게 했는지 짐작해 보셨어요?} {글쎄요. 근데 그게 제 물음과 관계가 있나요?} {물론이에요.} {통 짐작이 안 가는데요.} {전 선생님의 의술을 빌리고 싶어요.} {의술을 빌리다뇨?} {말 그대루예요. 선생님은 정신과의사였으니 그 방면의 노하우를 제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이용하고 싶어요.} {그들이 환자들인가요?} {그래요.} {그 아이두?} 곽웅혁은 바싹 긴장했다.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나는 지난 번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애라의 망상증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과는 달리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벼, 병명은?} 그는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편집적 망상증이에요.} {보이는 증세는요?} {의상을 자꾸만 갈아입음으로써 자신이 새롭게 태어난다고 믿고 있어요.} 나는 차마 동성애에 대해서는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병원에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병원에서 약은 타먹이구 있어요.} {편집증이라면 약물요법만으로는 부족할 텐데요?} {그래서 제 나름으로 치료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이 도와주시면 한결 나을 거 같아 애라에게 그런 얘기를 내비쳤던 거예요.} {유진씨의 치료법은 어떤 겁니까?} {의학적으로 공인된 건 아니에요. 일종의 회화를 통한 치료라고나 할까요. 아동들의 경우엔 상당히 발전된 이론들이 많아요. 물론 회화만으로 완치를 바라긴 어렵지만 문제점의 본질을 꿰뚫는 덴 다른 치료법보다 빠를 수가 있어요. 제가 애라나 다른 아이들에게 그 방법을 적용하게 된 것은 그들이 유아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는 점에 착안했기 때문이에요.}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데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회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고나 할까요. 흰 도화지 위에선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것도 누구나 자유롭게 표현할 수가 있거든요. 자신의 마음을 전적으로 도화지 위에 그어지는 붓의 움직임에 둠으로써 구속의 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맛볼 수가 있는 거죠.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편집광 환자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한두 가지의 관념에 얽매여 질식할듯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회화를 통해 그런 관념들을 파괴하거나 적어도 유연하게 할 수가 있는 거죠. 예를 들자면 무의식 상태에서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도 부모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어요.} {흥미로운 시돈데요. 효과는 어느 정돕니까?} {글쎄요. 처음 시도하는 것인데다 아직은 시행착오가 많아서 성공여부를 성급히 단언해 말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애들이 저와 더불어 생활하면서 표정이 밝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기대치에는 반도 못미쳤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부탁드리는 건데 선생님께서 우이동집에 들어오셔서 그애들을 돌봐주시지 않을래요?} {아뇨. 난 그럴 입장이 못됩니다.} 그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보수 때문이라면 섭섭치 않게 해드리겠어요.} {보수 때문이 아니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애라 때문인가요?} {......} {애라 때문이라면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안 그래도 요전에 곽선생님의 입주 얘기를 잠깐 비췄는데 크게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어요.} {반드시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니오. 어쨌든 난 입주해서 그들을 돌볼 수는 없소.} {제가 애라의 병증에 대해 숨김없이 까발린 게 부담을 드린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오. 그렇지는 않소. 결국 알게 될 건 빨리 알수록 좋은 법이오.} {그럼 앞으로두 애라를 계속 만날 건가요?} {물론이오. 그 아이가 편집광이라고 해서 물러나는 건 비겁하고 남자답지 못한 짓이지 않소.} 그때 마침 함박스텍이 날라져왔으므로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나는 식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카푸치노나 한 잔 갖다달라고 웨이터에게 요구했다. {드시지 않구요?} 그가 말했다. {저두 식욕을 잃었어요. 선생님을 뵙는 순간 기대가 컸었는데......}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얘긴 그쯤해둡시다.} 그는 담배에 라이터불을 붙이며 말했다. {내게도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거니까.} 얼굴표정뿐만 아니라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은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재빨리 어떻게 할 것인지를 궁리했다. 지금 물러난다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어떡하든지 구실을 대어 나를 피해다닐지도 몰라. {그 피치못할 사정이라는 게 혹시......} {혹시 뭐요?}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들었다. {혹시 이것 때문 아닌가요?} 나는 기다렸다는듯이 악어가죽 핸드백에서 신문기사를 복사한 종이쪼가리를 꺼내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어 살펴보더니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걸 어떻게 구했소?} {신문에서 복사했어요.} {내 물음은 어떻게 알 게 됐는냐는 말이오.} 그가 종이를 찢어발겨 재떨이에 집어던졌다. {어쩐지 선생님의 용모가 눈에 익다 싶어 곰곰히 기억속을 더듬어보니 우연찮게 떠오르던 걸요.} {놀라운 기억력이군. 벌써 1년도 지난 일인데......그 아이도 이 기사를 읽었소?} {아뇨. 애라는 아직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이 기사를 복사해 와 내게 보이는 저의는 뭐요?} {전 성질이 암상궂고 고약해요. 뭐든지 뜻대로 안되면 파토를 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미죠. 전 선생님이 우이동집에 들어와 도와주시길 바래요.} {끝까지 거절한다면?} {애라도 그 기사를 읽게 될 거예요.} {젠장! 내가 그런 얕은 공갈에 넘어갈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오?} {흥분하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봐요. 제 욕심이 지나친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누굴 괴롭히자는 공갈은 절대 아니에요. 선생님이 애라와 사귀는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라를 언제까지 저런 상태로 내버려둘 셈이죠? 곽선생님은 애라의 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지 않나요?} {원한다고 해도 유진씨가 택한 식의 방법은 싫소.} {왜죠?} {난 당신의 정체를 모르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소리요? 당신은 내 과거를 죄다 알게 됐잖소.} {정확히 말하면 곽선생님의 과거가 아니라 신문에 난 곽선생님의 과거겠죠. 전 곽선생님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건 아무 것두 없어요. 어쨌든 전 개의치 않아요. 과거에 세상이 곽선생님에 대해 뭐랬든 어떤 평가를 내렸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지 않나요? 그리고 기사 어디에도 선생님이 유죄판결을 받았다던 대목은 없더군요. 제겐 그것으로 충분해요.}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요?} {정체랄 것두 없어요. 전 그저 평범한 화가예요. 조각두 좀 하구요. 역시 화가이신 아버지는 남미여행중이시구 어머닌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혼을 한 적이 있구 아이는 없어요.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놓으셔서 전 꽤 부자예요. 세 명의 편집적 망상환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아까 말했구......갑자기 제 자신을 소개하자니 좀 어색하네요.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성실히 대답해 드릴 테니까요.} {나에 관한 기사를 처음 봤을 때 기분이 어땠소?} {약간 흥분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두렵다거나 공포의 감정은 아니었어요.} {내가 진짜로 여자를 죽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소?}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그 순간 나는 이 남자가 역시 여자들을 죽였구나 하고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전혀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안 했었어요. 그런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다면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올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내 대답에 만족한듯 보일락 말락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떡하시겠어요? 제 요구를 들어주시겠어요?} 나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듯 감겨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좋소. 당장은 확답을 못드리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소. 일주일쯤 후에 연락을 드리겠소.} {그럼 곽선생님만 믿겠어요. 참, 지난 번에 양동수씨를 애라에게서 떼어놓은 것은 어떻게 된 거죠?} {그야 어려울 것두 없었소. 양동수 그 자는 아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다 경제적으로는 아내의 내조 없이는 독립이 아예 불가능한 못난이오. 내가 아는 한 그 아이와의 관계가 폭로되면 그 즉시 무일푼으로 쫓겨날 신세요. 내가 그날 팔래스호텔 커피숍에서 건네준 쪽지에는 아내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전화번호와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었소. 그리고 그 밑에 점잖은 투로 협박문구를 써 넣었을 뿐이오.} {알만하군요.}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며 말했다. {아깐 식욕을 잃었었는데 갑자기 배가 몹시 고파지는데요. 곽선생님이 반쯤 허락을 하시니까 생기가 돌아서 그런가봐요.} {드시죠. 난 가보겠소.} {더 드시지 않구요?} {아니오. 난 됐소.} 그가 일어났다. 나도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그럼 살펴가세요.} 그가 계산을 치르고 출구를 빠져나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카푸치노가 왔다. 나는 이번에는 카푸치노는 거들떠보지 않은 채 소스로 양념된 쇠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집엘 돌아와서야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뿔사,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알 게 되었느냐는 그의 물음에 '용모가 눈에 익어 기억속을 더듬다가......'라고 대답했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철두철미 내 뒷조사를 할 것이고, 아니 이미 내가 그 신문기사가 화제거리로 세인의 입끝에 오르내릴 무렵 프랑스에 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드레 내내 꼬박 토끼눈을 하고 기다리면서 내가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며 걱정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낭보가 날아들었다. {결정했소. 댁에 들어가겠소.} {고마워요. 정식 입주는 일주일 후쯤으로 해요. 그 전에 묵으실 방을 깔끔히 단장해 놓을께요.}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기쁘기 그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웬지 너무 쉽게 승락을 얻어낸 것 같아 께름칙한 뒷맛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과연 애라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고 싶지 않거든 내 말에 순순히 따르라는 공갈이 제대로 먹혀든 것일까. 애라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그토록 간절한 것일까. 적어도 그는 남의 의사에 좌지우지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내 말에 따르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속셈을 캐낸들 무슨 소용에 닿으랴.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내 관심의 영역권밖이었다. 그가 내 집의 식객으로 들어오는 것만이 중요했다. 곽웅혁은 4번째 나의 망상증 환자여야 했다. 그것으로 나는 족했다. 물론 그는 정신과의사의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나는 그를 환자로서 탐색할 기회를 충분히 갖게 될 터였다. 나는 목수와 미쟁이를 사 방내부를 새단장하는 동안 약속대로 인 형사를 불러들였다. 그는 탐색하는 눈으로 집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나서, {소학교 운동장만한데 대체 이게 몇 평이오?} 하고 물었다. {과장하지 마세요. 250평밖에 안돼요.} {그렇다고 '밖'이라는 말은 좀 듣기 거북한데요.....헌데 곽웅혁이 거처할 방은 어디죠?} {이리루 오세요.} 나는 그를 뒷뜰로 안내했다. 거기엔 붉은 벽돌로 단단히 지은 방 두 칸짜리 별채가 있었다. 마침 알미늄 샷시집에서 나온 일꾼이 창틀에 올라서서 커튼을 설치하고 있었다. 인 형사는 휑댕그렁 비어 있는 방을 둘러보고 나서 건너편 방을 가리키며, {저기엔 누가 묵고 있죠?} {표영표란 학생이에요.} {아, 주사파라는 그 학생.} {네.} {지금 방에 있소?} {아니요. 오늘은 다 외출을 시켰어요. 그래야 안내를 해드리기 편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요는 안채가 금남의 집인셈이로군.} {젊은 남녀가 거실과 욕실을 함께 쓰면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있어서요.} {미군 콘셋막사 같은 저건 뭡니까?} 인 형사는 키가 2미터쯤 자란 노가주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뒤쪽을 가리켰다. {작업을 하는 창고예요.} {작업실은 집안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저기엔 완성된 작품을 보관하거나 방안에서 다루기 힘든 대형작품을 만들 때 쓰곤 하죠.} {안을 좀 들여다봐도 될까요?} {잠겨 있을 텐데요.} 그는 그곳으로 다가서다 주먹만한 놋쇠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좋아요. 구경은 이쯤해둡시다. 헌데 애라양은?} 그는 갑자기 자신의 방심을 깨달은 것처럼 긴장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루쯤 미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까 친한 여자친구 전화를 받고 나갔어요.} {곽웅혁은 모레 들어오는 건가요?} {네, 오후 2시쯤 오겠다고 했어요.} {알겠소. 그럼 난 이만......} 이날 저녁 식탁에 온식구가 둘러앉았을 때 나는 곽웅혁이란 사람이 입주하게 될 것임을 선언했다. 애라는 이미 나와의 약조가 되어 있었으므로 침묵으로 일관했고 미경이는 내가 하는 일이면 두말않고 따르겠다고 한 반면, 영표는 처음부터 마뜩찮다는 태도로 나왔다. {누님, 그 자는 뭘 하는 사람이죠?} {그 사람 과거를 알 필욘 없어.} {혹시 경찰이나 경찰의 끄나풀 아닌가요?} {절대 그렇진 않아. 같이 어울린다고 해서 피해를 줄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해.} {하지만 어떤 수상한 과거를 가졌는지도 모르면서 집안으로 끌어 들인다는 건 저로서는 좀......} {영표씨, 텃세 그만부리고 언니 말이나 더 들어봐요.} 애라가 적절하게 나서주었다. 그녀의 일격에 영표는 더 이상 군말않고 사그라들었다. 나는 곽웅혁이란 사람이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와 똑같이 호흡할 것이며 결코 특별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란 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이번엔 미경이가 말했다. {그럼 우리와 똑같이 그림공부도 하나요?}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내가 너희들에게 하듯 이래라저래라 하기 힘든 면면들이 있어. 하지만 아마 곧 그렇게 될 거야.} 식사를 끝내고 영표와 미경이가 각자 자기방으로 돌아간 다음 애라와 단둘만이 남게되자 내가 말했다. {넌, 진짜 불만 없겠지?} {없어요.} {괜히 나중에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가슴에 나 몰래 묻어둔 얘기 있음 지금 기탄없이 꺼내놔봐.} {나 아저씨 들어오는 거 상관 안 해요. 언니나 돈 준다는 거 잊지 말아요.} {그건 영표와 미경이에겐 비밀루 해야 돼.} {나두 그만한 눈친 있어요.} 7. 탐색의 기록들 며칠만 지나면 곽웅혁이 입주한 지도 벌써 석달이 채워진다. 어느덧, 계절은 훌쩍 뛰어넘어 여름 말미로 접어들었다. 아직 찌는 듯한 한낮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지만 아침 저녁으로 목덜미가 선득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곽웅혁의 깊은 내면의 심리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친숙해져 있었다. 나는 그가 왜 그토록 <순결>의 관념에 집착하는지를 탐색해왔다. <사탄>이 미경이에게 <위대함>이 영표에게 <변신>이 애라에게 고착된 관념이듯이 <순결>은 곽웅혁의 온생활을 지배하는 듯했다. 그는 항상 세상이 타락하여 순결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온누리에 함박눈의 잔치가 벌어져 어디를 둘러봐도 티없이 맑은 흰빛이 아닌 한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외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해 오는 성적인 메세지와 기호들로 인해 곤혹을 겪고 있었다. 코카콜라병의 완만한 곡선이 여성의 잘록한 허리선을 상징하고 지갑(purse)이 외음부를 의미하고 드레스가 거세불안을 은폐하기 위한 옷이라는 것에 고민하고, 불평을 늘어놓고, 화를 내고 또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적인 상징에 쾌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나는 그를 면밀히 관찰해 오면서 강렬한 인상을 느낀 날이면 잊지 않고 일기형식으로 메모를 남겨 두었는데, 석달째에 이르자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단편조각들이 맞춰져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갖춰가듯 그의 편집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나름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여태껏 깎듯이 정신과의사 대우를 해주었던 태도를 바꿔 그를 편집광환자로만 다룰 작정이다. 이런 결심을 굳힌 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메모들을 한 번 더 무미건조하게 훑어내렸다. 6월 7일 (화창함) 마침내 곽웅혁(알파벳 G로 약칭)이 입주했다.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풍전야의 어린애마냥 턱없이 들떠 있었다. G의 소지품은 단촐했다. 라면박스 4상자와 여행용 가방 2개가 고작이었다. 4톤 타이탄 트럭이 대문앞에 부려놓은 짐을 옮기는 것을 내가 영표를 시켜 도와주려 하자 G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학생, 내 짐에 손대지마! 나 혼자두 충분히 할 수 있어.} G는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면서도 끝까지 소지품에 타인의 손이 닿는 것을 꺼려하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나는 짐이 다 옮겨졌을 때 구슬땀을 후둑후둑 흘리는 그에게 냉콜라를 대접하며 물었다. {다리가 아프세요?} {가벼운 관절염이오.} G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진료를 받아보시지 그래요?} {병원엔 이미 다녀왔소. 약도 먹고 있으니 걱정말아요.} 저녁식사를 겸해 식구들과 가벼운 상견례를 한 후 G는 바쁜듯이 자기방으로 가버렸는데, 미경이는 G가 아주 차가운 사람 같다고 촌평(寸評)했다. {성격이 내성적인가 봐요. 무표정한 얼굴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렵구요.} 영표가 불만을 드러내듯 덧붙였다. {오늘은 이사하느라 피곤해서 그럴 거야. 다들 봤잖아. 몸도 부실한 거.} 나는 G가 겉돌지 않도록 너희들이 못마땅한 게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누차 당부했다. 애라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6월 8일 맑음 ----이 사람은 자신만의 은폐된 공간을 갖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야. 도어록이 장치된 문에 따로 웬 쇠자물통이람! 나는 밤사이 묵직한 자물통을 달아놓은 G의 방문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집안을 두루 안내하며 당분간은 정신과의사의 신분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G는 쉽게 동의했다. {뭐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좋지요.} 6월 10일 흐렸다 갬 오후 3시, G 외출. 애라도 조금 후 외출. 그들이 압구정동 모 카페에서 만나고 있다는 첩보연락이 인 형사에게서 왔다. 그들은 저녁 7시경 10분의 간격을 두고 가각 따로 귀가. 나는 머리속이 휭허니 비워진 것처럼 하루종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6월 11일 보슬비 내리던 날 G가 내 치료법을 보고 싶다며 처음으로 회화실에 들어왔다. 마치 중고등학교 미술시간 같은 지루한 분위기에 G는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저애들이 그린 그림을 당신이 살펴보는 것으로 병이 치유가 될까요?} {물론 당장에 눈에 띄는 효과를 기대할 순 없겠죠. 하지만 여기 이 그림들을 봐요. 미경이가 그린 풍경화인데 한 달 전에 그린 것과 오늘 그린 것과는 완연히 차이가 드러나잖아요. 그애는 차츰 밝은 색상을 선호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마음속에 잠재된 어두운 구석을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 애를 쓰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치료의 자생력을 북돋아주는 조무사(助務師)일 뿐이에요.} 6월 14일 약한 바람 G가 들어온 지 꼭 일주일째다. G는 미경이와 영표와도 곧잘 어울렸다. G는 어딘지 사람을 금세 사로잡는 묘한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G가 하루 세 번 꼬박 먹는 약이 있어 궁금해 물었다. {무슨 약이에요?} {싸이피놀이라는 관절염 약이오. 일명 '악마의 발톱'이라 불리우는 아프리카 사막식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약이죠.} 오늘 밤 8시 50분 SBS에서 '악마와 세 여자'라는 타이틀의 영화를 방영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손이 닿는대로 뽑아들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펼쳐든 곳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혼잣말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너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물(水) 불(火) 바람(風) 땅(地)의 4대원소는 우리와 결탁하고 있으니, 끝내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싸이피놀과 TV속의 악마와 메피스토펠레스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며 인과적 사고다. 그러나 유비적(類比的) 사고에서는 세 사상(事象)이 하등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관련이 있다면, 대체 무엇이 어떻게 관련이 있단 말인가? 단지 '악마'라는 단어의 동일성이라면 그게 무에 대수로울 것인가. 나는 1시간쯤 몸을 뒤척이며 그 문제를 고심하다 따분한 나머지 이렇게 써놓고 메모노트를 덮었다. 전미경=水 표영표=火 윤애라=風 곽웅혁=地 4=死=파멸! 6월 15일 먹구름 낌 G는 전미경, 표영표, 윤애라에 대한 그간의 인상을 들려주었다. 그의 진단은 내가 처방해 온 것과 대동소이했다. 나는 그애들의 과거에 대해 상세히 조언을 했으나 애라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애라는 그에게 맡겨둘 셈이었다. 그래야 혹시 인 형사가 바라던 일이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6월 17일 쾌청 G의 방안을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으로 온종일 시달렸다. 다들 외출한 뒤 파출부 아줌마마저 찬거리를 적어주어 시장으로 내보냈을 때, 혼자가 된 나는 정원을 거닐다가 문득 별채 앞에 섰다.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창에 기울어져가는 햇살이 반짝이는 비늘처럼 부숴지고 있었다. 나는 이끌리듯 창문앞으로 다가가 발돋움을 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반투명의 커튼에 가려져 사물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창문 손잡이을 당겨봤다. 움직임이 없었다. 별채안으로 들어갔으나 방문은 예의 쇠자물통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낙담하며 돌아섰다. 관음증(觀淫症)환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며. ----하지만 언젠가 꼭 볼 기회가 있을 거야. 6월 20일 비 장대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아직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보도도 없던데 웬 물난리람! 채송화밭이 엉망이 되었다. 울타리 벽돌이 빗물에 휩쓸리며 채송화 뿌리가 파헤쳐졌다. 나는 우비를 입고 보수작업을 하다가 도저히 그칠 것 같지 않은 비에 신경질이 나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다들 자기방에 틀어박혀 무료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나는 사지가 노곤하고 피로해서 침대에 누워 시를 읽었다. ****** 나는 상처이자 동시에 칼! 나는 따귀떨기이자 동시에 뺨따귀! 나는 잘리는 사지이자 자르는 수레바퀴 그리고 사형수이자 사형 집행인! ('악의 꽃'중에서) ***** 끔찍해! 보들레르는 끔찍해! 어쩌다 그런 사람이 예술가가 되었을까? 6월 21일 갬 오후 내내 석고작업을 했다. 영표를 모델로 삼아 얼굴과 상반신의 주형을 뜨는데만 5시간이 걸렸다. 영표는 작업이 끝난 뒤 런닝셔츠에 팔을 꿰며 내일 한 번 더 수고를 해줘야겠다는 나의 요구에 체머리를 흔들며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전 두 손 들었어요. 숨 들이쉬고 참기가 힘들어 더는 못하겠어요.} {남자가 필요해. 너 말고 누가 있니?} {곽선생님이 있잖아요.} {하지만 그 분은......} {하여간 전 사양하겠어요. 석고냄새도 냄새지만 니비아크림 냄새가 지독해서 싫어요.} {그게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아무래도 전 알러지가 있나봐요.} 그리고는 도망치듯 작업실을 나갔다. ----G에게 부탁을 한다? ----그래, 그거 재밌을 거야! ----헌데 G가 여자인 내앞에서 상체를 벗어붙일까? 6월 22일 맑음 G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끝내 용기가 부족해 그만두었다. 인 형사와 잠깐 통화. 인 형사는 G가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 데 대해 의아해 했다. 나는 역시 G가 애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사랑? 글쎄요, 그 놈이 사랑을 한다는 것이 난 믿어지지 않소. 그게 대체 어떤 사랑일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애라에게만 예외를 두는 이유를 증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갤러리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중도금을 건네주고 계약서를 받음. 6월 24일 맑음 해파리냉채와 탕수육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후 가진 티타임 시간에 G가 이상한 소릴 했다. {난 어쩐지 우리의 만남이 불길하다는 느낌이 들었소.} {아니 왜......그런 안 좋은 느낌을 받았죠?} {당신의 그 핸드백 말이오.} {제 핸드백요?} {왜, 레스토랑 '보헤미안'에서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꺼냈던 그 핸드백이 있었잖소?} {아, 그거요......그게 어때서요?} {그거 악어가죽 아니었소?} {......?} {그걸 보는 순간 웬지 냉혹한 전율 같은 것이 등골을 오싹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소.} {선생님답지 않아요. 미신을 믿으세요?} 나는 G가 농담을 하는 걸로 가볍게 받아 넘겼다가 나중에서야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문제는 뱀이나 악어가죽 따위가 불길함을 상징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G가 겉보기와는 달리 나를 굉장히 의식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있었다. ----내가 그를 요모조모 탐색하고 있는 만큼 G도 나를 은밀히 탐색하고 있었던 거야 6월 26일 찌는 듯한 더위 마침 커튼이 젖혀져 있어 창문을 통해 G의 방안을 들여다보는데 성공했으나 돌아온 건 실망뿐이었다. 나는 내심 뭔가 쇼킹한 걸 기대했는데 하얀 석고의 소형 성모마리아상과 철제 조립용 책장만 덩그렇게 시야에 잡혀오자 허탈한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의 방안은 지극히 평범했다. 기껏 시선이 흥미롭게 쏠린 곳은 빽빽한 책장뿐이었다. 그 사이 언제 들여놨는지 책들이 바람벽 한 칸을 다 채우고도 남아돌았다. ----G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6월 27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나는 G에게 최근들어 재밌게 읽은 책이 있으면 한 권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G는 재미는 천박한 사람들의 취미이며 자신은 결코 책을 재미로 읽은 적이 없노라고 대꾸했다. 내가 다시 그럼 아무 책이라도 변통해 달라고 하자 G는 아무 책이나 읽어 뭣하러 시간낭비를 하느냐고 까다롭게 굴었다. 마지막으로, 감동적으로 읽은 문학작품이라도 빌려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더니 G는 마지못해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건네주었다. 나는 '양철북'을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어 그냥 도로 돌려주려다가 성의를 생각해 일단 받아두었다. 하루종일 그 책에 신경을 끄고 있다가 잠자리에 들어서야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심심풀이로 펼쳐들었는데, G는 재독 삼독을 했는지 책모서리가 손에 쓸려 닳아 있고 갈피 사이도 틈이 생겨 부피가 두터워져 있었다. G는 인상깊게 읽은 대목에는 붉은 사인펜으로 밑줄을 그어 다시 읽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놓았다. 나는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며 밑줄 친 부분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뜻밖에도 인 형사의 말대로 <순결>이라는 관념에 G가 고착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오스카르 마쩨라트) 브루노에게 [브루노, 순결한 종이 5백매를 사다줄 수 있겠지?]하면 그는 [하얀 종이 말이죠, 오스카르씨.]하고 대답한다. ----나는 순결하다는 말을 고집하면서 가게에 가서도 그와 같이 말해 달라고 브루노에게 부탁하곤 했다. ----당신은 참 좋은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순결한 종이를 달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점원은 몹시 얼굴을 붉히면서 내가 요구한 그것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6월 30일 흐림 나는 G에게 '양철북'을 돌려줄 때 하얀 A-4용지 500매를 곁들여 건네주었다. {이건 뭡니까?} G가 물어왔다. {순결한 종이예요.} {순결한 종이?} G는 잠시 의아해 했으나 이내 그 숨은 의미를 알아채고 맞장구를 쳐왔다. {헌데 왜 당신은 얼굴을 붉히지 않죠?} {전 그 여점원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이 하얀 종이가 순결하다는 보장을 어디서 받나요?} {A-4용지 꾸러미의 뒷면을 펼쳐봐요.} 나는 거기에 '이 용지는 순결합니다'라고 써놓았다. {......} 그것을 들여다보는 G의 얼굴은 실망으로 굳어졌다. {왜 그 용지가 순결한지 이해하시겠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명명(命名)했기 때문에?} {맞았어요.} {말도 안되는 소리요!} G는 반발했다. {순결의 엄격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아요.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내가 명명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당신이 뭐길래?} {그야 물론 용지에 대한 순결의 명명자죠.} G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었다. G는 내 웃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건 덤이에요.} 나는 따로 챙겨두었던 책 한 권을 내밀며 말했다. {V. 나보코프의 소설 '어두운 방(camera obskura)'이에요. 이게 제 취향이에요. 읽어 보시면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1/10쯤은 알게 되실 거예요.} 7월 2일 흐린 후 갬 인 형사와 만나 많은 정보를 교환했다. 인 형사는 아직도 G가 애라를 죽이려 하지 않는 것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소. 죽일 의도가 아니라면 놈이 대체 뭘 바라고 애라양에게 접근한 건지 말이오.} {사랑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럴 리가 없소. 내가 아는 한 놈은 한 번도 애라양에게 은밀한 욕구를 드러낸 적이 없는대두요? 혹시 집안에서 애라양의 손을 잡는 장면이라도 본 거요?}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그럼 무슨 근거루다 놈이 애라양을 사랑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거죠?} {전 그렇게 믿고 싶어요. 다만 G의 사랑방식은 우리와 다를 뿐이에요.} {육체적인 접촉이 동반되지 않는 정신적인 사랑이란 말이오?} {일단은 그런 가정을 해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순수하게 정신적이라면 애라에게만 예외를 둘 필요는 없잖아요. 아마 그랬더라면 G는 순결이라는 관념에 고착되어 성적인 타락에 대해 분노하는 기존의 감정을 여자일반에 대해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을 거예요.} {그럼 왜 애라양에게만은 예외일까요? 상대가 미인이어서?} {당치않아요. 미인은 외부로부터 유혹의 손길이 잦으니까 추녀보다 타락할 기능성이 더 많아요. 더구나 애라는 오렌지족이라 보기에 따라서는 타락의 첨단을 걷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어요.} {답답해서 미치겠군! 놈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마음을 바꿔먹은 까닭이 있을 텐데......} {그걸 알아내기는 아직 일러요. 좀더 관찰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자 인 형사는 의욕을 잃고 담배만을 뻑뻑 빨아대었다. 그 후론 내가 주로 질문하는 쪽이 되고 그가 대답했다. 2시간 이상 얘기를 들었지만 뼈대를 추리자 몇몇의 함축적인 문구와 상징물만 걸러졌다. ----인간은 자기완결적(自己完結的) 이어야 한다 ----자기를 지탱하는 것은 비밀이다 ----내가 원하는 방, 그곳엔 출구가 없다 ----비둘기=순결 ----성모마리아=하얀색=어머니(?) 7월 3일 쾌청 G에게 내 작업실을 구경시켜주었다. 특히 실외의 작업실을 안내할 때는 놋쇠 자물쇠를 키로 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의 깊숙한 내부를 드러내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려 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통해 나 자신도 G의 은밀한 비밀을 열람할 자격증을 얻게 되는 것처럼 굴었다. G는 나의 석고작업에 관심을 보였다. 창고의 한 귀퉁이에 잿빛의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무렇게나 방치된 10여점의 작품을 보고는, {왜 아까운 것들을 저렇게 버려두는 거죠?} {아까운 것들이 아녜요. 일종의 습작품인 셈이라 사실은 쓸모는 없는 것들이에요. 벌써 버렸어야 하는 건데 웬지 버리기에는 그래도 좀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그냥 놔뒀던 거예요.} {정말 실물과 똑같은 작품들이군요. 특히 저건 영락없이 산사람을 빼다박았는데요.} G는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는 듯한 사지가 꾸부정한 남자와상(男子臥像)을 가리켰다. {이건 어때요?} 나는 최근에 만든 영표의 흉상을 보여주었다. 그건 깨끗하게 마무리가 되어 단상에 놓여져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것만 못한 것 같소.} G는 자꾸 시선을 남자와상에 두었다. {고통을 받는 인간에 관심이 많은가 보죠?} 내가 말했다. {예술의 주제로서야 더할 나위가 없잖소. 헌데 여긴 꽤 오래 전부터 사용한 것 같은 분위긴데......} {아버지가 손수 목수 노릇을 하며 지으신 창고예요. 아주 오래 전 일인데 그 당시만 해도 이곳 동넨 주택가라기 보다는 유원지로 더 알려져 있어 봄이나 가을철엔 행락객들이 들끓었었죠. 아버지도 등산을 위해 주말마다 우이동엘 찾아오셨다가 여길 발견하신 모양이에요. 마음에 쏙 들었던지 그 즉시 땅을 헐값에 사들여 작업실을 아예 이곳에 차렸던 거죠.} {아버진 남미여행중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늘 혼자 있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세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론 여행과 작업으로 평생을 보내셨어요.} {재혼을 시켜드리지 않구요?} {그럴 필요도 없어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주위엔 늘 명성에 눈 먼 화가 초년생 여자애들이 줄을 타고 남보다 빨리 성공의 반열에 들어서기 위해 아버지에게 몸까지 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걸요. 때론 골빈 누드모델과도 염문이 날 때도 있구요.} {아버지를 미워하시는가 보군요?} {아버지 땜에 어머니가 자살하셨으니까요.} 나는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 말을 끝으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곽선생님도 한 번 제 모델이 되어주시겠어요?} {글쎄요. 내가 자격이 있을까 모르겠소.} {약간의 인내력만 있으면 돼요. 영표도 지난 번에 모델이 되어 주었는 걸요.} {쇠뿔도 단 김에 빼랬는데 그럼 어디 지금 한 번 해볼까요?} 나는 G가 가볍게 승락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본래 나의 요구는 승락을 얻어내는 데 있기보다는 그의 반응을 살피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뜻밖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상의를 벗으셔야 하는데요. 영표처럼 흉상을 만들려면 상체가 알몸이 되어야 해요.} {어려울 거 없소.} 나는 G가 주저없이 곤색 남방셔츠의 단추를 끄르는 것을 보며 만류했다. {잠깐만요. 일단 석고부터 개어놓구요. 더운 물도 필요해요.} 나는 작업준비를 하는 동안 G가 느닷없이 적극성을 보여온 이유가 뭔지 골몰하기에 빠빴다. 뭔가 까닭이 있을 법한데---- 그 까닭은 흉부의 주형을 뜨는 동안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G는 나의 과거에 대해 노골적으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고트(소설 '어두운 방'의 여주인공)의 아버지도 화가이더군요. 그녀 자신은 누드모델을 했구요.} {그래서요?} 나는 G의 가슴에 윤활유인 니비아크림을 바르며 대꾸했다. G는 나의 유연한 손놀림에 따라 몸을 움찔했으나 극도의 자제력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보상으로 나의 숨겨진 이면을 캐물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G의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 알고 싶은데요.} {정신과의사로서의 관심인가요?} {반드시 그렇진 않소. 내가 정신과의사의 자격으로 묻는 거라면 유진씨가 정신병환자라는 전제를 해야 하는 거니까요.} {별루 더 말할 것두 없어요. 제가 아버지를 미워한 건 사실이고......잠깐만요.} 나는 석고를 흠뻑 묻힌 천조각을 어깨, 등, 겨드랑이에 재빨리 발라나가며 말했다. {석고가 굳을 때 약간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그때가 중요해요. 몸을 뒤틀거나 심호흡을 해선 안돼요. 15분 정도만 참으면 되니까 조바심을 가지셔도 안되구요.} {알았소.} G는 가슴팍에 힘을 주지 않고 말하기 위해 목젖을 굴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곽선생님은 제 어머니가 왜 자살을 했는지 알고 싶은 거로군요?} {솔직히 말해 그렇소.} {전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도 아버진 누드모델과 틈틈히 말썽을 일으켰던가봐요. 어머닌 그로 인해 속앓이를 하셨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이혼을 할 만큼 신세대의 가치관을 지니셨던 건 아니고......전 어머니가 이따금 혼자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아직 선해요.} {아버지의 바람끼가 자살을 한 계기가 됐나요?} {네, 어머닌 무척 견디기 힘들어 하셨어요.} {죽을 각오였다면 별거나 이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저두 상세한 것까진 모르겠어요. 그 얘긴 그쯤해 두는 게 좋겠어요.} 나는 그 정도면 G가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 것에 충분히 보상을 했다고 생각했다. G의 탐구욕에 더 이상 내 과거를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작업에 몰두했다. 두상을 뜰 때는 G가 말을 못했으므로 침묵속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작업이 끝나고 커피를 나눠마시며 휴식을 취할 때 나는 G에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것이 아닌가 후회되었다. G가 교묘하게 나를 자극해 고백을 유도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스스로 너무 쉽게 부모 얘기를 한 것에 나는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다만 한 가지 내 마음을 위로한 것은 오늘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내 의사를 표시하는 데 크게 주저할 필요는 없어졌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는 거였다. 7월 5일 머지않아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예고 나는 기회를 엿봐 G를 작업실로 끌어들인 다음 캔버스위에 하얀 도화지를 압정으로 고정시켜 놓고 먹물을 그 위에 떨어뜨려 큰 점들과 튀긴 자국들을 만들었다. {이게 뭐 같아 보여요?} {뭐긴요? 먹물을 아무렇게나 흩뿌린 거잖소.} {이건 성처녀예요.} {지금 성처녀라고 했소?} {그렇게 안 보여요? 제 눈엔 성모마리아의 처녀 때 모습 같은데.} {가당찮은 말이오. 천주교인들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고 할 거요.} {이건 1929년에 피카비아라는 화가가 이름을 붙였던 작품이에요.} {대체 예술가란 작자들은 왜 이런 맹랑한 짓들을 하죠? 먹물을 뿌린 다음 성처녀라고 명명해놓고 수치스러움도 없이 자기작품이라고 세상에 내놓는 거요?}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죠.} {고정관념?} {성모마리아는 반드시 하얀 색일 필욘 없어요. 그리구 아름답게 생긴 여성일 필요는 더더욱 없구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먹물을 쳐발라놓고 제멋대로 성처녀라고 명명하는 것보단 백배 낫소.} {그럼 이 그림은 어때요?}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화첩을 내보였다. 밀레(Millais)의 [방주(方舟)에 돌아온 비둘기]라는 작품이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림의 비둘기는 입맞추고 빠는 젖무덤으로 보였다. {이, 이건......} G는 드러나게 얼굴이 붉어지며 더듬거렸다. {비둘기로 표현될 수 있는 건 순결만은 아니에요.} {그렇더라도......정말 추하오! 유진씨는 내게 이런 것들을 보여줘서 뭘 어쩌자는 거요?} {뭘 어쩌자는 게 아녜요. 전 다만......} 나는 G가 몹시 흥분했음을 알고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나를 비켜지나 작업실을 나갔다. 꽝하고 공기를 찢어가르는 문 닫히는 소리가 G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정식으로 사과를 했는데, G는 그때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 역력했다. G는 '성모마리아'와 '비둘기'에 대한 내 방식의 해석이 자신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또한 내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모독하려 했다고 믿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반쯤은 제대로 짚은 셈이었다. 사실 모욕을 주려했던 건 아니었지만 피카비아와 밀레의 그림을 소개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나는 G가 자신이 고착된 관념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G는 지금은 감정이 고양돼 있어 정신이 없겠지만, 이성을 되찾는 순간 내가 <순결>을 걸고들어간 것이 자신에 대한 나의 높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 G가 어떻게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그런데---- 나는 문득 독실한 카톨릭신자도 아닌 G가 왜 그토록----인 형사한테 듣기로는 G는 늘 성모상을 끼고 산다는 거였다----성모상에 집착하는지가 의아해졌다. 그러다가 밤의 어두운 장막을 찢으며 한 줄기 섬광처럼 빛을 발하는 영감이 떠올랐다. 성모 혹은 성녀는 하나의 극(極)에 선 여자이다. 그 극이 도덕적으로 윤색될 때 선극(善極)이라 불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 즉 악극(惡極)에 선 여자는 어떻게 불리워져야 할까? 나는 G의 어머니가 매춘부 즉 창녀였다는 데서 그 해답의 힌트를 얻었다. ----여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성녀(성모)와 죄 많은 여자, 어머니와 매춘부(창녀)이다. 전자는 순결하고 성(性)이 없고 지루하고 선량하다. 그에 반해 후자는 악하고 정열적이며 재미있으나 전연 터부(Taboo)이다 아아----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G가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7월 10일 장마전선은 남부지방으로부터 북상중 나는 며칠을 두고 G의 살인동기를 탐색하는 데 열중했다. 우선 G가 정은경이라는 여자의 주장과는 달리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 간접적 증거로는 G가 검찰이 기소의 절차를 밟는 동안 보호되어 있던 곳에 손톱으로 긁어놓았던 문구----내가 원하는 방, 그곳에 출구가 없다----로 보아 G 또한 양립상극성(兩立相剋性)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에 대한 G의 감정은 극도의 사랑과 극도의 증오가 만나는 중간지점에서 형성되었음이 분명했다. 균형의 추가 만에 하나 증오심쪽으로 쏠렸다면 G는 어머니를 가차없이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라면 그 대신 성적으로 타락한 징후를 보이는 여자----G는 표현주의(表現主義)의 대두 자체를 타락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를 연쇄적으로 살해하는 모험의 욕구를 느낄 심리적인 근거가 사라지고 만다. G가 계속적으로 매춘부 같은(G가 보기에) 여자들을 골라 죽여야 하는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좀처럼 해소될 수 없는 깊이에까지 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G가 뼈만 앙상한 어머니의 시신을 수 년 동안 지하실에 숨겨두었던 사실은 아직 채 끊어지지 않은 정신적인 탯줄의 연결고리를 암시한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고 의대에까지 보내준 어머니의 절대적인 애정에 대한 무기력한 감동의 이면에는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떨치고 독립할 수 있는 힘을 생성할 기회를 상실한 채 7살 유아의 미숙성을 마흔이 가까와 오도록 간직하고 있는 G의 진면목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G에게 있어 어머니는 세상에 둘도 없는 후원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 어머니는 끔찍이도 소년 G에게 사랑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철저한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생각하는 방식이겠지만----G을 잘 키워 세상에 보란 듯이 내놓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보람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어머니를 결코 저버릴 순 없다]는 것이 G의 정서의 반쪽을 강하게 억누르고 있는 반면에, 뭔가 은밀하고 사적인 감당하기 힘든 성적인 충격이 창녀의 신분이었던 어머니를 통해 소년 G의 깊은 내면의 잠재적 욕구에 관류(貫流)되어 광적인 증오심을 키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양자는 서로를 이기려 들지만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승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원한 양립상극성인 것이다. 한 대상을 두고 극도의 사랑과 극도로 미워하는 감정이 공존하여 팽팽한 긴장을 이룰 때 그 당사자는 미칠 수밖에 없지 않을까? 7월 11일 장마전선, 아직 남부지방에 머물고 있음 애증(愛憎)의 양립상극성으로 인해 어머니를 극도로 증오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어머니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의 괴로움이 살인을 저지른 동기라는 것이 비교적 분명한데 반해, G가 성혐오증(性嫌惡症)에 사로잡혀 있는 점은 겉보기와는 달리 단순히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G가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 한 막연한 추측외에 더 이상 알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 나는 완곡하게 그렇게 표현했지만 그것은 모살(母殺)의 소망외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G의 심리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았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1) 모살의 소망=>죄의식을 수반한다(한편으로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2) (1)을 의식적 자아(ego)가 받아들일 수 없다=>의식안으로 모살의 소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제(억압기제) (3) 강렬한 충동이나 소망은 무의식속에 억압되었다가 의식적 자아와 타협을 거쳐 되돌아오면서 위장되어 나타난다=>성적으로 타락한 여자들을 살해 (4) G가 성적으로 타락한 여자들을 죽이는 행위는 창녀로서의 어머니를 죽이는 행위와 심리적으로 동일하다 (5) 그러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는 언제나 현실적으로 살아남는다 이상의 제단계가 틀리지 않다면 왜 G의 살인이 단발에 그치지 않고 연쇄살인으로 옮겨갔는가도 쉽게 설명된다. G의 감정은 모순에 빠져 있으므로 (5)의 상황을 바라는 한편으로 어머니가 아직도 건재해 있다는 당혹감으로 인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의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G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그녀로부터 심리적으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7월 15일 억수 같은 비 ----수많은 정신병중의 하나인 편집광은 현실과 상상의 종합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곧 초현실주의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자인 키리코는 대머리에 유방이 4개이고 또한 남자의 성기가 달린 사람(?)을 그렸다 ----G에게 있어 부동의 현실은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진저리나는 구속감이다 ----G는 타락한 여자들을 살해함으로써 그 구속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G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이 망상증의 근간을 이룬다 ----G의 살해동기는 파괴자체에 쾌감을 느끼며 이끌리는 가학성이나 피에 대한 흡혈귀적인 목마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적인 동정의 여지를 남긴다 7월 20일 사흘째 비가 그치지 않다 나를 바라보는 G의 눈이 무척 조심스럽다. G는 내가 자신을 탐색해 왔음을 초조하게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7월 22일 비는 그쳤으나 여전히 흐리다 나는 G의 병을 고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G의 편집광을 치료함으로써 내 불안도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7월 25일 흐림 G에게 회화치료에 참여하라고 말할 수가 없다---- G는 지능이 비범하고 워낙 예민해서 내 의도를 금방 간파해 버릴 것이다. 파리에서 아버지를 찾는 연락이 왔다. 벌써 몇 번짼가? 나는 신경질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의 유명세가 싫은 것이다. 7월 28일 구름 사이로 햇볕이 쨍쨍 인 형사의 연락---- 데이트를 하는 G와 애라를 미행하다 반포에서 놓쳤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이야말로 G가 애라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했다. 나는 걱정할 거 없다고 장담했다. G는 보란듯이 애라와 함께 귀가했다. 얼굴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7월 31일 흐림 동정, 연민, 시기, 질투, 불안, 사랑, 번민...... G에 대한 내 감정은 어떤 빛깔일까? 8월 2일 곧 장마가 끝날 거리는 예보 영표는 내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다고 말했다. {요즘 증말 언니 같지 않아요. 어디 아픈 거 아녜요?} 미경이가 거들고 나왔다. {아냐, 아프긴---- 작품작업이 신통칠 않아서 그래.} 그렇게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이상했다.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G가 들어온 후 통 미경이와 영표에게 신경을 못쓰고 있다는 자학이 덮쳐왔다. 8월 4일 마침내 지리하던 장마가 끝날 조짐 G가 경찰에서 풀려난 이후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거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G가 애라에게 보이는 야릇한 애정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G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정표현은 G에게 닫혀진 세계 너머에 있다. 적어도 어머니의 망령을 G가 떨칠 수 있기 전까지는---- 아, 아니다. 어쩌면...... 8월 5일 차츰 갬 성처녀(聖處女) 쥬리아는 조선 귀족의 딸로서 임진왜란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나가사키(長崎)의 노예시장에서 매매된 10대 소녀였다. 다행히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왜장 고시니(小西)에게 팔려가 쥬리아라는 세례명까지 얻고 딸과 다름없이 키워졌으나, 고시니가(家)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망하는 바람에, 도쿠가와의 내전 시녀로 일하게 되었다. 유수한 호색가인 도쿠가와는 2명의 정처(正妻)와 측실에 10여 명의 희첩(姬妾)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가신의 딸, 농부의 딸 등 신분을 안 가리고 엽색을 해오던 터였다. 그러한 도쿠가와로서는 재색을 겸비한 쥬리아가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쿠가와가 쥬리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페인에서 구입한 진귀한 양품을 대량으로 선물하자, 쥬리아는 유리제품이나 완구 장식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가운데 묻어온 예수의 성상(聖象) 등 종교적 물품 몇 점만을 가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녀의 신앙심은 동료 시녀들이 감화를 받을 만큼 돈독했기 때문에 호색적이고 부박한 내전 생활에서도 그 꽃다움을 꺾이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도쿠가와는 50가지 방법으로 쥬리아로부터 카톨릭의 악마를 추방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쥬리아는 끝내 유배를 당할 망정 순결을 지켰다---- ----G가 단둘이 있을 때 애라를 쥬리아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가 그런 완강한 순결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그럴 리는 없다. 애라의 행실이나 외모로 보건대, 조금만 눈썰미가 있다면 그런 빗나간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G는 연극 속의 애라(쥬리아)와 현실의 애라를 혼동하고 있단 말인가? 8월 6일 장마가 끝나다 실외 작업실에서 뛰쳐나간 날 이후 처음으로 G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G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무엇인지를 의식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의 회화적 소재(素材), 즉 모티브로만 받아들여요. 그러면 거기에는 대상이 지니는 주제로서의 의미는 사라지고 다만 시각적인 소여물(所與物)만이 존재하게 되죠.} {그럼 이 컵을 인상주의 화가들은 어떻게 보는 거죠?} G는 커피가 든 컵을 내보였다. {커피와 컵이라는 개념부터 버리고자 할 거예요. 다만 뭔가 허연 것안에 고동색의 유동액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아니 유동액이라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뭔가 허옇고 고동색인 것이 겹쳐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게 사물을 봐서 뭐가 얻어지죠?} {사물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과연 그런 방법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요?}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주는 덴 꽤 도움이 될 거예요.} {난 사양하겠소.} 마치 선문답을 주고받듯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의중을 저울질했다. G가 사고의 유연성을 기르지 않겠다고 사양한 것은 내 치료를 정중히 거절한다는 뜻과 같았다. 8월 8일 ㅎ볕이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아니마(Anima)는 남성의 마음속에 숨은 여성적인 심리적 경향들이 인격화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특성은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머니에게서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G의 아니마는 쉽게 흥분하고 자주 우울해 하고 죽 끓듯이 변덕스럽고 쉬 감동하는 성격에 잘 드러나 있다 ----융에 의하면 아니마의 발전에는 4단계가 있다. 1단계는 고갱의 그림에 나오는 타이티섬의 여성들이나 이브(Eve)의 상(像)으로 상징되는데, 순전히 본능적이고 생물학적 욕구를 나타낸다. 2단계는 파우스트(Faust)의 헬레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녀는 낭만적이고 미적 수준의 인격화이나 아직도 성적(性的)인 요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3단계는 영적 헌신의 극치에까지 올라가는 성모마리아로 표현된다. 4단계는 지혜로 상징되는 모나리자(Mona Liza)이다. 수년간 정신과의사 생활을 했던 G가 아니마의 발전 4단계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G가 늘 소중히 여겼던 성모마리아상은 성적인 요소가 배제되어 있고 영적 헌신의 극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가 바라마지 않던 어머니의 소망형(所望型)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점 부끄러움조차 없이 젖가슴을 드러낸 타이티섬의 건강한 구리빛 여성들에게서 혹은 나뭇잎으로 가끼스로 국부만을 가린 이브의 떠는 듯한 모습에 G가 느낀 것은 혐오감밖에 없으리라. 명줄이 다해 파우스트와의 이별을 서러워하면서 [그러니 한 번만 더 당신의 팔에 안기게 해주세요]라고 말한 헬레나에게도 G가 호감을 가졌을 리가 없다. 또한 그 자체로서는 가장 성스럽고 가장 순수한 것조차 초월하는 지혜의 상징이지만 후세의 짓궂은 작가들에 의해 오염된 모나리자상에 대해서도 G가 실망을 감추지 못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M. 뒤샹은 모나리자에 [L.H.O.O.Q]란 이름을 붙여----불어로 발음하면 엘라쇼오뀌로서 [이 여자는 엉덩이가 근질근질한가봐] 또는 [그녀는 강한 성욕을 감추고 있다]로 의역된다----천박하고 성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켜 놓았던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G는 어떠한 성적인 메세지나 기호도 참을 수 없어 한다. 과천 현대국립미술관에서 백남준씨의 비디오 작품을 관람하고 보인 반응도 그런 흥분의 한 예일뿐이다. G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성모마리아처럼 희생하는 모성과 순결한 이미지를 가져야 된다고 믿는다. 그런 어이없는 믿음을 뿌리뽑지 않는 한 G는 연쇄살인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애라가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힘과 능력이 없다. 애라는 G를 사랑하지 않으며 G가 애라에게 보이는 애정 또한 언제 어떻게 폭발적으로 변화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알 수가 없다..... G는 왜 애라의 성적인 이미지만은 용납을 할 수 가 있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 역일 수도 있다. 애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런 허용심이 생기게 되었는지도. 하지만 G가 정말 애라를 사랑하는 것일까? 인 형사에겐 늘 그렇게 말했지만 내 스스로가 의구심을 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8월 9일 맑음 영표와 미경이는 TV뉴스 시간에 이따금 등장하는 바캉스 행락객에게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이곤 했었다. 나는 그런 내색을 모른 척 내버려 두었는데 정작 문제는 애라에게서 발생했다. 오늘 아침 애라가 안 보여 하루종일 법석을 떨다가 오후 3시쯤에서야 연락을 받았다. {해운대 비치 파라다이스 호텔이에요, 언니. 미안해요.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요. 더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3일쯤 쉬다가 올라갈께요.} {얘, 애라야......} 그러나 채 내가 말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고 그 소식은 곧 G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G는 곧바로 집을 뛰쳐나갔다. 밤 11시쯤 인 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산이라는 거였다. {놈을 따라왔소. 고속도로에서 어찌나 속력을 내는지 가까스로 놓치지 않고 미행했소. 놈은 지금 막 비치 파라다이스 호텔에 투숙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오?} {애라가 거기 가 있어요.} {알았소.} 8월 10일 맑음 애라는 오전 10시쯤 G의 손에 붙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얼굴에 타박상을 입고 있었다. {아니 애라를 어떻게 한 거예요?} 내가 나무라듯 G에게 말했다. {별거 아니오. 말을 듣지 않아 조금 완력을 쓴 것 뿐이오.} {완력을 쓰다뇨? 애라를 때렸단 말이에요?} {때렸다고 표현하면 곤란하오. 내가 찾아갔을 때 애라는 혼성(混性)으로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었소. 난 그 아이가 그런 곳에서 술에 취해 추한 꼴을 보이며 놀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소. 그 아이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던 거요.} {애라는 성인이에요. 노는 것까지 선생님께서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 아이는 병부터 먼저 고쳐야 하오. 유진씨가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요?} 다행히 외상에 비해 애라의 상처가 큰 것은 아니어서 나는 그쯤해 두었다. 애라는 나와 단둘이 되자 눈물을 쏟아내며 G가 무섭다고 호소했다. {언니, 아저씨를 내보내면 안돼요?} {이제와서 그러면 못써.} {아저씬 절 죽일지 몰라요.} {왜 그런 끔직한 소리를 하니?} {아까 올 때 저더러 한 번만 더 이런 나쁜 짓을 하면 죽이겠다고 했어요.} {화가 나서 그랬을 거야.} {언닌 흥분했을 때 아저씨의 눈빛을 못봐서 그래요.} {자자, 따끈한 녹차 한 잔 타줄께 마시고 마음 가라앉혀.} 애라는 언제나 그 모양이었다. 내가 내일 옷이나 하나 사 입으라고 돈을 쥐어주자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8월 15일 맑음 밤을 새워 작업을 한 후 새벽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깨어났을 때 문득 용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단(勇斷)---- 그냥 이대로 G와 생활할 수는 없다. 이제 G에 대해 알만큼은 알았다.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이 지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G에게 내 방식의 치료법을 적용해 볼 수조차 없다. G는 다른 아이들처럼 만만치가 않다. 나는 G가 이성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점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G의 성혐오증을 고칠 수 있는 묘안은 없는 것일까? 8월 17일 맑음 전 남편을 만나 정사를 치르었다. 그는 교섭이 끝났을 때 또 돈을 요구했다. 나는 그가 '미드나이트 블루(Midnight blue)'의 남창(男娼) 같다고 생각했다. {화대를 받는다는 수치심이 들지 않으세요?} {수치심이라니---- 님도 보고 뽕도 따고지.} {역겨워요.} {누가 할 소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을 들썩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봉사를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당치 않아. 돈이 아니라면 난 언제든지 당신을 떠날 수 있어.}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아요?} {물론 아닌 건 나도 알지.} {그럼 그 말버릇부터 고쳐요.} {얼마든지.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날 적당히 부려먹을 수 있는 하인 취급하지마.} {대체 그 애송이 같은 계집애에게 얼마나 더 쳐바를 거죠?} {내 사생활이야.} 그는 그 한 마디로서 내 물음을 일축했다. 나는 그를 얼마간 노려보다가 말했다. {좋아요. 돈을 드릴께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뭔데?} {조명기구가 필요해요.} {어디에 쓸 건데?} {작업실에 설치할 거예요.} {또 불장난인가?} {내가 무엇을 하든 당신은 상관 말아요.} {언제 필요하지?} {전날 연락할께요.} 내가 서둘러 옷을 챙겨입는데 그가 말했다. {등에 상처가 심한 거 같은데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어?}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의 아파트를 나왔다. 8월 20일 약간 흐림 G와의 대화---- G는 내게 <비극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내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양자의 공통점은?}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점이에요.} {맞았소. 차이점이 크게 2가지가 있는데 모르겠소?} {글쎄요......} {그럼 내가 말하리다. 그 하나는 비극적인 것이 인간적인데 반해 악마적인 것은 비인간적이라는 점이오 또 하나는 전자는 혼돈을 부정하지만 후자는 혼돈을 긍정한다는 점이오.} 그러며 G는 혹시 내가 절대적인 혼돈을 추구한 초현실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제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건 그들이 취한 방법들이 영표나 미경이의 망상증에 도움이 될까해서예요.} {그래 재미를 좀 보았소?} {보신대루예요.} {나로서는 당신이 왜 그 애들을 집으로 끌여들여 치료를 하려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소.} {무슨 뜻이죠?} {별루 치료에 열성적이지 않은 거 같아서 하는 말이오. 날더러 치료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놓고서는 정작 내가 여기에 들어온 이후 그 애들의 증상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죠? 기껏해야 세 번쯤이나 될까요? 그것두 지나가는 얘기처럼 무신경하게 흘려버렸잖소.} {그래서요?} 나는 긴장하며 G를 바라보았다. {대체 날 이 집에 끌어들인 이유가 뭐요?} 나는 숨을 죽이며 뜨겁게 쏟아지는 G의 시선을 맞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전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을 흡뜬 G의 안면근육이 빳빳이 굳어갔다. 나는 G가 뭐라고 대꾸해 주길 기다렸으나 G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G는 농담을 하는 걸로 받아들여 화가 났거나 자신을 비웃었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로서는 난처한 입장을 교묘하게 모면할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헌데---- 내 입에서 호감이란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온 것은 나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인마에게 감히 호감이라니! 어찌 그럴 수가! 8월 22일 더위가 한 풀 꺾이다 나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꽃이 점화되어 있다. 그것은 쉽게 타올라 나를 손아귀에 넣고, 나에게 영감을 주는 그런 불꽃이다. 나는 대지를 집어삼킬 새로운 욕망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8월 25일 흐림 '깜짝쇼'를 벌였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실내 작업실에 대형 1000W 스포트라이트 4개를 설치해 방안을 눈부시도록 밝혔다. 사면에는 대형 거울을 두어 빛이 측면반사를 함으로써 작업실이 온통 빛의 축제이도록 만들었다. 스포트라이트의 정면에선 안구가 아릴 정도여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고 살갗 또한 금방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만큼 빛으로 충만했다. 작업실의 벽면이 하얀 페인트로 덧칠해져 있는 것도 방안의 광도에 단단히 한 몫을 했다. 이제 작업실은 찬란한 광휘(光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빛속에 투영된 세계를 다루는 인상주의 화가 터너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빛의 충만속에 서면 웬지 농밀한 살아있음의 감정이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듯한 착각을 느끼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느낌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건 착각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마약의 효과가 그러하듯 그 순간의 감정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극에 달한다. 에이콘이 가동하고 있었으나 스포트라이트가 켜진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온몸에서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이제 됐나?} 전남편은 조명기구를 다 설치한 다음 손을 털며 말했다. {이렇게 조명탄을 터트리듯이 해놓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설마 이런 곳에서......} {흰소린 집어치워요! 다 끝냈으면 당신은 볼일이나 보세요.} 그는 히죽거리면서 작업실을 나갔다. 나는 뒷통수에 침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꾹 눌러참았다. 그는 몇 마디 말로써 내 행동이나 몸짓을 천박하게 만들어버리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점에 이골이 났다. 한 마디로 그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것을 확인한 나는 애라와 G를 작업실로 불러들였다. 나는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중앙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은 다음 애라에게 나를 그리도록 했다. {거기에 필요한 도구가 다 있을 거야. 이젤 도화지 물감과 파렛트도 있어. 그게 싫으면 목탄화를 그려도 좋구 단순히 4B연필로 스케치를 해도 괜찮아.} 그리고 나서 G에게도 말했다. {절 그려보세요. 빛이 내게 던지는 명암을 그려보세요.} {너무 밝아요. 반사시키는 거울 때문에 그늘은 져 있지 않은데요. 헌데 왜 우리가 유진씨를 그려야하죠?} {이윤 나중에 설명할께요. 자----어서요!} 애라는 4B연필을 집어들고 망연히 G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G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이 조명들은 뭐고 저 대형거울들은 또 뭡니까? 사연을 알아야 그림을 그리든지 말든지 하죠.} {제 조그만 소원을 들어줘요. 전 지금 흥분해 있어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절 어서 그려줘요!} 나는 갑자기 의식이 혼곤해지며 온몸을 빛에 내맡겼다. G는 더 이상 나에게 묻지 않았다. 아니 내가 못들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살갗은 메마른 스폰지처럼 빛을 빨아들였다. 혀로 핥듯 빛은 내 목의 세포를 간지럽히다가도 바늘로 찌르듯 통증을 안겨주기도 했다. 나는 빛의 천사가 되었다가 다음 순간 빛의 노예로 곤두박질쳐갔다. 뜨거운 열풍(熱風)이 불어닥쳐와 내 몸을 쳤다. 나는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코발트빛 바다가 지평선 너머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더위를 느끼며 옷을 벗고 바다로 풍덩 빠져들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잠깐, 아버지의 환영을 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어머니의 나신(裸身)이 아른거렸다. 그 위에 아버지의 주먹이 겹쳐졌다. 나는 몸을 사렸다. 나는 알몸이 되어 해변가 모래밭에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손에는 파렛트와 붓이 들려 있었다. 그때였다---- 우당탕 하는 소리에 나는 혼곤한 의식에서 깨어났다. 애라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묘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한 쪽에 이젤의 다리가 망가져 쓰러진 위로 도화지가 발에 짓밟힌 채 마구 흩어져 있었다. G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뛰쳐나갈 때 이젤을 쓰러뜨린 것 같았다. 나는 온몸에 땀이 비오듯 하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발바닥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맨발이었고 양말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애라의 시선은 내 젖가슴께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녀가 숨을 죽이고 나를 관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왜?'라고 물으려 하다가 나는 발아래에 허물처럼 벗겨져 있는 옷가지들을 발견했다. 아아----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나체였던 것이다. 8. 소동 알 수 없게도 곽웅혁은 집을 뛰쳐나갔다가 하루만에 돌아왔다. 정확히는 다음날 새벽 3시쯤 만취되어서 챠임벨을 눌렀다. 나의 파격적인 연출(演出)에 불만을 품고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불쾌감을 감수하며 눌러앉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 애라 때문인 것 같았다. 인 형사는 전화를 통해 전후사정을 알게 되자,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소? 놈에게 그런 허튼 짓거리를 했다가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노출은 놈을 자극해서 흥분을 유발시키는 행위와 같아요. 휘발유를 안고 불쏘시개로 뛰어드는 무모한 짓을 해서 대체 뭘 얻어내려는 겁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건 치료의 일환이었어요. 충격요법을 통해 성혐오증을 고치기 위한 거였단 말이에요.} 그것은 꾸며대기 위한 변명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 도취되어 결과는 엉망이 되었지만 애초의 의도는 보다 신중하게 계획되었었다. 우선 곽웅혁을 다루는 데 있어 더 이상 '차근히 한 발씩'의 접근은 무의미해 보였다. 완벽하다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세 달의 동거를 통해 그의 증상을 알만큼은 알아냈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따라서 다른 애들처럼 회화를 통한 치료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없는 입장에서 무작정 시간을 끌며 추이를 관망할 수도 없었다. 나 자신이 뭔가 화끈한 결말에 이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알몸을 연출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보여지지 않았다. 원래 누드그리기는 애라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애라의 동성애를 시험도 해볼 겸 곽웅혁의 성혐오증에 충격도 줄 겸 해서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허나, 인 형사의 꾸중대로 얻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경솔했던 점은 두고두고 곱씹으며 반성을 할 일이다. 누드를 그리게 함으로써 애라의 치유정도를 탐색하기는커녕 내쪽에서 쑥스러움을 느끼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누드연출이 있고 나서 나는 곽웅혁의 변화 못지않게 애라의 변화에 대해서도 눈여겨 관찰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전에 없이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채 해운대에서 강제로 곽웅혁에게 붙들려 온 이후에 보이던 의기소침함도 말끔히 씻어버린 듯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게도 애라의 그런 생기발랄함의 뒤에 감춰진 이면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냈었다. 갤러리를 사들여 작품전시회를 갖기 위해----우선 오픈과 동시에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해 전시할 작정이었다. 내 개인전은 그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니 미처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루는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보니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정원 잔디사이로 난 디딤돌을 밟아 오르는데 파출부 아줌마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아, 아가씨 그, 그러니께 거,거,거시기......} 그녀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또 숭늉 끓이다가 냄비 태워먹은 거로군요?} 나는 덜렁거리고 흥분 잘하는 그녀의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아니유. 세간살림 축낸 게 아니어유. 애, 애라양이 병원에 실려갔어유.} {애라가 병원엘요?} 나는 현관 포오치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파출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뒤따르다 말고 화들짝 놀라 주춤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양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은 내가 갑자기 돌아섰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불안한 감정이 다시 자극되어서인 것 같았다. {숭악허게두 대가위루다 허벅지를 쑤시는 바람에......} 흥분한 탓인지 그녀의 얘기에는 앞뒤 조리가 없었다. {누가요? 곽선생님이 애라를 찔렀단 말예요?} 나는 직감적으로 곽웅혁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 아니유. 영표학상이.....} 그녀의 캐스터네츠처럼 턱이 떨려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뒷발로 차듯이 구두를 벗어던지고는 거실에 발을 옮겨놓았을 때 파출부가 설명하듯 말했다. {저길봐요.} 그녀의 손가락은 내 발아래께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엔 보기에도 섬뜩한피가 뚝뚝 듣고 있었다. 피가 굳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 일이 발생한 건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피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미경이의 방까지 띄엄띄엄 이어져 있었다. {애라가 병원에 실려간 건 언제쯤이죠?} {아가씨가 들어오시기 바로 전이어유.} {어느 병원인데요?} 나는 그렇게 물었다가 어리석은 질문임을 깨닫고는 얼른 고쳐 말했다. {헌데 왜 미경이 방앞에 피가?} {여기서 한바탕 난리법석으로 싸웠던가봐유.} 나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사정을 듣고만 있기에는 내 마음도 무척이나 조급해져 있었다. 방은 아수라장이었다. 가지런해야 할 침대의 시트가 보기 흉하게 헝클어져 있는가 하면 집기들은 흠집을 입은 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흘려진 피가 발바닥에 쓸리면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미경이는 어디 갔죠?} {방금 전까지도 영표학상이랑 여기 있었는디......} 그때였다. 어디선가 헉헉대며 거칠게 토해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알아차렸다. 침대밑이었다. 허리를 굽혀 무릎을 대고 시트를 걷어젖히자 미경이가 어둠속에서 새우 같이 등을 휘어 턱으로 끌어안은 자세로 얼굴을 감싸쥔 채 절망적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미경아! 나야. 무서워할 거 없어. 어서 나와.} 그러나 따뜻한 위무(尉撫)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흐느끼기만 했다. 몸에 손을 대자 그녀가 돌연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얼굴에 손을 대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5분쯤 지나서야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에 안겼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코피와 땀과 머리카락이 뒤엉겨 있는데다 여기저기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널 이랬어? 또 애라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건 뭐구?} 나는 엉망이 된 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자 흥분한 나머지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녀는 고개를 외면한 채 말이 없었다. 귀뿌리와 목덜미에도 시뻘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몇 번을 더 묻다가 고집이 하도 완강하길래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일단 병원에 가서 치료부터 하자.} 그녀를 부축해 거실로 내려왔을 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인 동하 형사였다. {대체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저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막 집에 들어오는 길이라서요.} {여긴 사거리 S병원인데 놈이 애라를 들쳐업고 이곳에 왔소. 애라에게 상해를 가한 것 같소.} {아니에요. 애라를 그렇게 만든 건 곽웅혁 씨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요?} {파출부 아줌마가 그러는데 가위로 찌른 것은 영표였던가봐요.} {영표학생이요?} 인 형사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자세한 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미경이도 많이 다쳤어요. 제가 곧 그리로 갈께요.} 나는 전화를 끊은 다음 밖으로 나와 별채를 찾아갔지만 영표가 묻을 닫아 걸고 있어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동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평소 즐겨 신던 신발이 놓여 있고 기타 정황으로 보아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나는 두어 번 문을 두드리며 불러댔으나 그가 만나기를 피하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병원으로 차를 몰아가는 동안 가까스로 미경이로부터 전후사정을 알아낼 수가 있었는데 병원까지의 거리가 가까와 지하주차장의 차안에 나란히 앉아보다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모두가 제 잘못이에요. 애라의 요구에 응하는 바람에 그만......} 그러며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애라가 무슨 요구를 했는데 그래?} {......}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짐작이 갔다. {몸을 요구한 거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가 가득한 표정이다. 머리채를 흔들 때마다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진다.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네가......} {미안해요, 언니. 호기심에 그만......게다가 애라가 돈을 준댔어요.} {돈이 부족했던가 보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요.} {그래, 얼마나 준다고 하디?} {아직 받은 건 없어요. 나중에 준댔어요.} {순진하긴......그런 요구를 들어준 게 몇 번째지?} {세 번째예요.} {언제부터 그랬어?} {보름쯤 됐어요.} 대충 내가 애라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후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책임 이 막중했다. 내 알몸을 보고 나서 그녀의 변태적인 욕구가 되살아난 것 같아 심한 수치감이 느껴졌다. {야단치지 않을께.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미경이가 털어놓은 바는 이랬다. 자기방 침대위에서 전나(全裸)로 한창 애무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노크소리와 함께 영표가 들이닥쳤다. 영표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야?} 애라가 황급히 옷을 챙겨입으며 밖으로 도망치려는 순간 영표가 막아섰다. {더러운 년!} 손이 올라갔다. 졸지에 뺨을 얻어맞은 애라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왜 때려? 니가 뭔데?} {비열한 짓을 하고서도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게 어디 나 혼자 한 거야? 저리 비켜!} 애라가 밀치자 영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비틀며 다시 뺨을 후려쳤다. 애라가 악에 받쳐 영표의 팔뚝을 깨물었다. 둘은 한덩이가 되어 몸부림을 쳤다. 비명이 오가며 집기들이 날아다녔다. 애라는 자기몫의 생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굴었다. 영표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배신을 당해도 더럽게 배신을 당했다는 분풀이를 한꺼번에 해소하려 들었다. 상대가 연약한 여자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붙었다 떨어지면 매번 방바닥에 메다꽂히는 쪽은 애라였다. 애라는 완력으로는 도저히 힘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사방탁자위로 쓰러지면서 안면이 벽에 부딪쳐 코피가 흘렀다. 일어나기 위해 힘겹게 손을 더듬는데 묵직하게 쥐어진 것이 있었다. 사방탁자의 서랍에서 쏟아져나온 가위였다. 아주 큰 것이었다. 순간, 애라는 등줄기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손이 떨렸다. 갑작스런 살의가 그녀에게서 마지막 남은 도덕심마저 앗아갔다. '얻어맞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순 없어!' 하는 양심의 목소리는 '죽여!' 라는 기합으로 대체되었다. 가위가 허공을 휘저었다. 한 번은 영표의 가슴을 스쳐지났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영표는 민첩했다. 그 보다는 애라가 이미 지쳐 있어 휘두르는 가위의 유효권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콧김이 사나워진 애라는 씩씩대며 마구잡이로 가위를 휘둘렀다. 그럴수록 영표에게도 역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마침내 그는 가위를 든 애라의 손목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애라는 거의 발악적이 되었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 기를 썼다. 그들은 뒤엉겨 쓰러지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랄 것도 없었다. 서로 바싹 밀착되어 엎치락뒤치락 돌아갔다. 그러다가 공기를 날카롭게 찢으며 비명이 터져나왔는데, 그것은 공포와 고통이 뒤섞인 애라의 비명이었다. 애라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경악한 표정으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영표도 자신이 한 짓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애라의 오른 허벅지 상단에 가위 한쪽 끝이 꽂혀 있었다. 체중이 실리는 바람에 가위는 중심축 가까이까지 깊이 박혀들었다. 가위가 박힌 틈을 비집고 선혈이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애타는 몸짓으로 바라보던 미경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짐승처럼 울부짖는 괴성을 뒤로 들으며 밖으로 뛰쳐나가 도움을 요청했다. 파출부가 뛰어오고 뒤미처 곽웅혁이 달려왔을 때 애라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곽웅혁은 역시 의사다웠다. 돌발적인 상황에 신속히 대처했다. 그는 먼저 가위를 빼내고 지혈을 한 다음 파출부의 도움을 받아 애라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갔다. 그러자 방안엔 공교롭게도 영표와 미경이 단둘만 남게 되었다. 영표는 한동안 자신이 한 짓에 얼떨떨해져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방안이 조용해지자 돌연 미경이에 대한 증오심을 폭발시켰다. {넌 더 나빠!} 그는 일이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발전한 것이 미경이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양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손찌검을 해댔다. 미경이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서너 대는 무방비로 얻어맞았으나, 영표의 흥분이 가라앉기는커녕 차츰 드세어지자 아픔을 참지 못하고 침대밑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나는 미경이를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1층 로비는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와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응급실은 로비를 지나 우측 복도로 꺾어든 첫번째 방이었다. 나는 간호사가 미경이의 상처를 소독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원무과로 가서 애라가 입원한 병실을 알아냈다. 층계참을 돌아 2층으로 올라가는데 저만치에서 인 형사가 나타났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서둘러 층계를 밟아 내려왔다. {놈은 애라 옆에 바싹 붙어앉아 병실을 지키고 있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인 형사는 그렇게 묻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여긴 장소가 좋지 않군요. 일단 매점으로 갑시다.} 지하매점에서 나는 미경이에게 들은 바를 낱낱이 전해주었다. 인 형사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것에 몹시 낙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애라를 찌른 게 곽웅혁이 아니란 말이죠?} 그는 다짐을 받듯 얘기의 고비마다 그렇게 물었다. {이번 일은 곽웅혁 씨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 사람은 일이 벌어진 뒤에 애라를 치료하기 위해 이리루 데려왔을 뿐이에요. 적절히 응급조치를 시킨 것에 오히려 감사를 해야 할 거예요. 싸움의 발단은 전적으로 애라의 동성애 때문이었어요.} {그럼 영표학생이 미경이을 가운데 두고 질투라도 느꼈단 말인가요?} {그럴지도 몰라요. 아님 혐오감이겠구요.} {나 원----세상 오래 살다보니 별 지저분한 일도 다 생기는군요. 그래, 이제 어쩔 셈입니까? 만일 둘이 앙숙으로 지낸다면 애라든 영표학생이든 하나는 내보내야 할 게 아닙니까?} {화해를 시켜보구요. 둘 다 마땅히 갈 데는 없으니까 나가겠다고 하진 않을 거예요. 그 보다도 제가 걱정이 되는 건 곽웅혁 씨가 애라의 동성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동성애라......그것 참......과연 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인 형사는 자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혐오증에 걸린 놈이니 잘 볼리는 없을 테고......글쎄요, 저렇게 애라에게 지극정성인 걸 보면 유진 씨 말처럼 애라에게만은 예외일 수도 있겠고......} {헌데 여기까지 오셨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그렇게 묻던 나는 숨을 흑하고 들이켰다. 인 형사의 어깨 너머로 곽웅혁의 옆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매점 판매대에 붙어 뭔가를 흥정하고 있었다. 백발이 희끗희끗한 매점주인이 그에게 캔콜라와 거스름돈을 건네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영문을 알 리 없는 인 형사가 낯색이 확 달라진 나를 보고 말했다. {쉬잇----} 나는 입술위에 인지를 갖다대었다. 다행히 인 형사는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내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재빨리 간파한 그는 담배를 꺼내 상체를 앞으로 웅크리고 불을 붙이는 척 하며 낮게 물었다. {놈입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 자신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둘 곳을 찾았는데, 그만 곽웅혁의 눈길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엉겁결에 벌떡 일어났다. {어머, 곽선생님! 애라는요? 막 올라갈 참이었는데----} 나는 의자를 밀치고 좌석에서 벗어나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경이는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애란 좀 어때요?} 나는 그가 가급적이면 아무 상상도 하지 못하도록 나오는대로 떠들어댔다. {애란 자고 있소. 담당의사 말로는 며칠 입원을 시켜 추후경과를 지켜봐야 된다고 했소. 가위끝이 뼈에까지 상처를 입힌 모양이오.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정확한 결과가 나올거라고 했소만, 애라가 잔뜩 겁에 질려 있어 일단 보류한 뒤 안정제를 투여시켜 잠을 재워 놓았소.} {잘 하셨어요. 무척 놀랐는데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네요. 참, 내 정신 좀 봐! 어디 앉으셔서 콜라를 드셔야지요. 저리로 갈까요?} 내가 빈 자리를 가리키자 그는 사양하며 말했다. {콜라는 병실에 올라가서 마시겠소. 헌데 저기 앉아 계신 분과 동행이 아니었습니까?} {누, 누구요?}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사람 말이오.} 그는 인 형사의 뒷통수를 가리켰다.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깐 자리가 없어 합석한 것뿐이에요. 전 여기에 전화를 걸러왔다가 잠시 쉬어가던 길이구요.} {아, 네---- 난 또 아는 분인 줄 알고 그만......} 그는 한 번 더 힐끗 인 형사를 바라보고는 앞장 섰다. 나는 그제서야 위기를 모면했다는 안도감에 그의 뒤를 따랐다. 애라는 깨어나 있지 않았다. 링겔주사를 팔뚝에 꽂은 채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흰 붕대가 칭칭 감긴 다리는 플라스틱 부목을 대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켜 놓았다. 곽웅혁은 사뭇 근심어린 눈으로 평온히 잠든 애라의 모습을 내려보다가 별안간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난 아까 애라를 들쳐업고 바삐 오느라 경황이 없어 사정을 알아보지 못했소만, 대체 왜 영표학생이 애라를 찌른 겁니까?} {영표가 찌른 게 아니에요. 결과는 그렇게 됐지만 가위를 먼저 집어든 것은 애라였던가봐요.} 나는 오해의 소지를 남길까봐 그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뜻밖인데요. 난 그 아이에게 그런 난폭한 면면이 숨어 있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그 아이가 가위를 집어들어 상대에게 상해를 가해야 할 만큼 악에 받쳐야 했던 이유가 뭘까요?} {그 점은 변명의 여지없이 영표에게 책임이 있어요. 영표가 먼저 애라에게 손찌검을 했기 때문인데----} 순간, 나는 애라의 동성애에 대해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머지않아 곽웅혁도 결국 알게 되리라는 판단이 서자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나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 손찌검의 동기라는 게......미처 곽선생님에게 귀띔을 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에요. 애란 동성연애를 즐겼던가봐요.} {그, 그 아이가요?} 그는 드러나게 놀랐다. {애라가 추적망상을 보인 것도 동성애와 무관하지 않아요. 한동안 증세가 호전된 걸로 봤는데, 지난 번에 제가 알몸을 드러내 보였던 일로 인해 다시 병이 도진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맹세코 그 일은 애라를 자극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누드그리기는 애라를 치료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미리 계획되어 있던 것의 일부였어요. 효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절 너무 나쁘게 보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나는 말하는 김에 '누드연출' 건에 대한 변명까지 늘어놓았다. 곽웅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은 안중에도 없는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뭔가에 골몰해 있었다. 그는 갑자기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심기가 몹시 사나와진 것 같았다. 나는 병실에서 머뭇거리다가 안되겠다 싶어 뒤따라 나왔다. 그가 복도 끝의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등뒤로 다가갔다. {혼자 있고 싶소.} 내 발소리를 듣고서는 그가 말했다. 나는 도리 없이 응급실로 내려와 미경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상처가 비교적 심한 이마와 손등엔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가벼운 타박상이니 크게 염려할 건 없습니다.}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본인의 의중을 물었다. {괜찮겠어? 쉬고 싶으면 여기 며칠 있어도 좋구.}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전 집이 편해요. 정 통증이 심하면 통원치료를 해도 되구요.} 미경이는 입원하는 걸 몹시 불안해 하는 듯했다. {그렇게 하세요. 괜찮을 겁니다. 큰 상처는 아니니까 덧나지 않도록 소염제를 처방해 드릴께요.} 의사의 지시를 최종 받아들인 나는 치료비를 계산하고 미경이를 부축해 응급실을 나왔다. 약은 로비에 딸려 있는 약국에서 따로 받기로 돼 있었다. 약국 창구앞에는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환자들로 만원이었다. 나는 미경이를 자리에 앉혀놓고 약값을 쥐어준 다음 애라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병실로 올라갔다. 2층 복도 창가는 텅 비어 있었다. 애라의 병실에서 막 간호사가 나오고 있어 나는 그녀를 스쳐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애라의 곁에 붙어앉아 있는 곽웅혁의 등판이 보였다. 애라는 깨어나 앉아 뭔가를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전 아까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 것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전 바보처럼 벌벌 떨며 고통을 견디기조차 힘들었을 거예요. 차 시트가 피로 많이 더러워졌을 텐데.....} {사람 몸이 중요하지 차 시트가 대순가. 그래, 기분은 좀 어때?} {한결 나아졌어요. 보시다시피 거뜬해요. 당장 퇴원하고 싶어요.} {퇴원은 아직 일러. 엑스레이를 찍은 다음 결과를 봐야 해. 걱정할 것까진 없구, 그냥 뼈에 이상이 있나만 체크하면 돼.} 둘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처럼 다정하고 친밀해 보였다. 그들은 내가 병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눈치채지 못한 채 애정어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방해꾼이 되긴 싫었지만 헛기침을 하며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애라야, 깨어났구나. 좀 어때?} {어머, 언니! 어서오세요.} 그녀의 반김속에는 당혹감이 감춰져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듯한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금방 읽어낼 수가 있었다. {미안해요, 언니. 이렇게 험악한 꼴을 보여서......} 그녀는 불편한 자리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대하기라도 하듯 어색한 몸짓을 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있었던 변화를 알 리 없는 그녀는, 동성애가 곽웅혁에게 탄로날까봐 염려를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애라의 입장을 일부러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곽선생님, 1층에 미경이가 와 있는데 함께 들어가시죠?} {미경이가요?} {미경이도 얼굴에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어요. 외상을 치료한 후 지금 약을 수령하고 있는 중이에요.} {아, 네......아니오. 난 들어가지 않겠소. 여기 남아 애라를 간호하겠소.} {간호는 걱정마세요. 환자를 돌봐주고 시간제로 일당을 받는 아줌마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스테이션의 간호사에게 부탁만 하면 돼요.} {간호를 어찌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맡긴다 말이오?} {그럼 제가 돌볼 테니 곽선생님은 어서 들어가세요. 피곤해 보여요.} {나보다 유진 씨가 더 피곤해 보이오. 그만 미경이랑 들어가요. 집에 주인이 버티고 있어야 모두들 안정감을 찾을 거요.} {그래요, 언니가 들어가세요.} 곽웅혁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보이는데다 애라마저 거들고 나왔기에 나는 머쓱해져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교감된 묘한 분위기가 나를 고집장이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미련없이 병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그들의 비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만 같아 걸음을 빨리했다. 나는 까닭 없이 그들이 껴안고 농밀한 키스를 퍼붓는 상상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을 했으면서도 그것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인 형사가 누차 의혹의 눈길을 보냈던 것처럼 곽웅혁이 애라에게만은 그렇게 헌신적이고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애라의 사피즘(Sapphism)에 대해 그는 아무런 분개도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여태껏 그 사실만은 감춰오면서, 그리고 오늘 불가피하게 고백을 하는 마당에 이르러서 내심 그가 굉장한 흥분과 반응을 보이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전혀 예상밖인 것이다. 나는 곽웅혁의 무반응에 깊이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헌데 그 실망감이라는 것이 요컨대 질투심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 든 것은 다음날 애라의 병실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마침 애라는 곽웅혁이 미는 휠체어에 실려 엑스레이 검진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간밤에 잠도 제대로 못주무셨을 텐데 이제 들어가 좀 쉬세요. 애란 제가 돌볼께요.} {그래 주겠소? 그럼 잠깐만 다녀오겠소.} 그가 흔쾌히 승락하고 병실을 나가자 애라는 나와의 대화를 피하고 싶은지 피곤하다며 잠을 청했고 나는 무료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어젯밤 석간을 집어들었다. ----파리 유학 마치고 귀국, 個人展 신예여류조각가 우현미씨 [조각계의 신데렐라]라는 평을 듣고 있는 신예여류조각가 우현미 씨(32)가 오랜 파리생활을 마치고 귀국, 첫 개인전을 갖는다(18~24일, 갤러리서울 516-345X) [젊은 시절의 방황과 습작기를 마감하는 뜻]으로 이번 전시회를 준비 했다는 우씨는 [흙은 가장 기본적인 예술의 도구이자 자연 그 자체입니다. 제가 테라코타 기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처음의 의도가 삭감없이 작품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 정해진 형태를 깎아 만드는 조각보다 작업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87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파리국립장식 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우씨는...... 우현미는 나도 잘 아는 사이였다. 대학교 시절 동기동창으로 무척 가깝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테라코타 기법에 재미를 붙여준 것이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귀국하자마자 주요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촉망받는 예술인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반해, 나는 동성연애자의 신병구완을 위해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어 병실이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파리에서 귀국하고 나서 지난 1년간 나를 무엇을 했던가?' 그런 반성이 자극되자 망상환자들을 끌어모으는데 열을 올린 것은 한심한 시간낭비였다는 자학마저 들었다. 채 그런 낭패감이 가시기도 전에 곽웅혁이 나타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가까운 대중탕에서 샤워로 가볍게 몸을 푼 다음 턱수염만 대충 깎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애라에게서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 서둘러 돌아온 그를 보자 나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남았나요? 여긴 제게 맡겨두고 집에 가셔서 푹 쉬시랬더니 벌써 돌아온 거예요? 애라를 잠시라도 옆에 끼고 있지 않으면 안달이 나 견딜 수가 없는가 보죠?} 나는 신경질적으로 쏘아주고는 곽웅혁에게 한 마디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않고 병실을 나왔다. 기분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병원로비까지 따라와 나를 붙잡아 세운 인 형사에게도, {기대하고 있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공연히 아까운 시간 축내지 말고 철수하세요!} 라고 짜증어린 충고를 던지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막연히 차를 몰아간 곳은 알 수 없게도 전남편의 사진관이었다. 사진관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나는 그가 안에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에 문을 사정없이 두드려댔다. 한참 있자 떠들썩하게 불러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지, {오늘은 사진 안 박으니까 내일 오슈!}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저예요. 유진이에요!} 나는 크게 질러댔다. 그러자 안은 금방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내 목소리를 혼동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반응이 전무하다는 것이 이상했다. {영식씨, 저라니까요! 유진이에요. 문 좀 열어요!} 나는 참을성을 잃은 나머지 문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잠깐만 기다려----잠깐이면 돼!} 그제서야 첫 반응이 왔다. 그러나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지친 기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소영식이 나타났다. 상기된 얼굴의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어, 어서 들어와.} 그의 어색한 환대의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의 뒤에 소문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즐겨 사용하는 복잡한 나뭇가지의 무늬가 박힌 보라빛 원피스를 입은 미모의 젊은 여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깐 채 도망치듯 나를 스쳐지나 사진관을 빠져나갔다. {내가 몇 번 말했던 그 모델이야. 청평쪽에서 야외촬영이 있어 스케줄을 의논하는 중이었거든.} 소영식은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억양의 톤이 높아져 나도 모르게 나무라는 투가 된다면 그가 가당찮은 질투심이라고 비아냥거릴 게 뻔했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입밖에 내어야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일이야?} 그는 내가 자신을 비난하지 않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숨가쁘게 캐묻지 말고 먹다 남은 양주라도 있으면 갖다줘요.} 나는 선반에 꽂혀 있는 카메라에 관한 책들을 건성으로 둘러보다가 소파에 주저앉으며 요구했다. {여긴 카메라에 관한 건 뭐든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술은 없어. 대체 무슨 일이야?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속시원히 얘기해봐.} 그는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크지 않으면서도 쌍가풀진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럼 바깥에서 사줘요.} 나는 다시 일어났다. {당신이 낯술을 다 마시다니 놀랍군! 이것도 이혼 후에 생겨난 변화인가?} 그러며 그는 군말없이 옷걸이로 걸어가 양복저고리를 꿰어 입었다. 우리는 근처의 적당한 까페로 갔다. 그는 풀이 죽은 내 기분을 의식한 듯 신경을 건드리지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꼬냑을 다섯 잔쯤 마시고 난 뒤 나는 피곤하니 잠시 눈을 붙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혹인가?} 그가 반문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내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나는 오늘만큼은 흥분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해서 손수 커피를 끓여와서는, {우리 다시 뭉치는 게 어떨까?} {농담이라도 그런 징그러운 소린 하지 말아요. 커피맛 떨어져요.} {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말이야. 이혼한 전남편을 수시로 찾으면서도 재결합은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건 무슨 심뽀지?} {고약한 건 아니니까 염려 말아요.} {당신 요즘 들어 감상적인 문학소녀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거 아냐? 이혼을 한 후 웬지 전남편의 궁색한 삶이 측은해져서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난 뒤처럼 밤새 눈물로 지새웠다......} {웃기는 소릴랑은 작작하고 음악이나 틀어요.} 그는 CD플레이어를 작동시키고 나서 돌아오며 말했다. {당신은 너무 비현실적이야.} {그래서요?} {아직 어린애란 뜻이지.} {그럼 당신은 어른이란 말인가요?} {그야 두말 하면 잔소리지.} 에릭 클랩튼의 '천국의 눈물'이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어떤 뜻에서?} {나야 현실적이니까.} {당신다운 정의(定義)군요.} {현실적이란 건 프로가 된다는 뜻이야. 게다가 난 매사에 솔직하지.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걸 당신은 뻔히 알고 있잖아.} {돈?} {물론이야.} {당신은 노예예요.} {50년 전의 기준으로 볼 때 현대인은 누구나 다 돈의 노예이고 수전노야.} {합리화시키지 말아요.} {좋아 그게 합리화라고 쳐. 그럼 당신은 대체 뭘 바라고 인생을 사는 거지?}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질문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솔직히 나는 그 따위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막연히 물질적인 풍족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현실을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난 아무 것두 두려워 하지 않아요.} {거짓말 하지마. 내 눈엔 그게 빤히 보여.} {바보같은 말이에요. 죽음을 두려워 한다면 또 몰라도 현실을 두려워 하다뇨?} {아주 적절한 지적이야. 바로 그거지. 당신에겐 현실이란 죽은 것이야. 그러니까 두려워 하는 거야.} {개똥 철학자 같은 말씀이네요. 계속해 보세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살아있는 것이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겠지. 당신이 남자를 사랑한다면 카탈로그의 모델이나 영화배우 같은 남자들 일 거야. 그건 결국 그 남자들이 결코 현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먼곳에서 당신의 상상력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지.} {굉장치도 않은 해석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가 보군요, 당신?} {당신은 남성우위의 사회를 증오하고 있어. 그래서 남자가 되고 싶은 거야.} {이번엔 프로이트를 팔 건가요?} {그렇지만 당신은 현실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전혀 남자답지가 않아.} {나오는대로 지껄이지 말아요. 난 남자가 아니라 여자예요.} {현실을 두려워 하는 건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야. 내 생각엔 당신이 현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를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아.} {집어치워요! 아버지 얘긴 꺼내지 말아요.} 나는 커피잔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커피잔은 탁자 모서리에 부딪쳐 튕기나가 거실 바닥을 구르며 갈색의 커피물을 쏟아놓았다. 그가 움찔했다. {당신 날 잘 알면서도 아버지 얘길 꺼내요?} {미, 미안. 내가 실수했어. 취소할께.} 그는 다가와 내 어깨를 다소곳이 잡았다. 나는 손을 뿌리치며 뺨을 올려붙였다. 동시에 내 뺨에도 번쩍 불이 일며 얼굴이 두 겹이 된 듯이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잔인한 눈길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이 껍데기 같은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순전히 저 강렬한 눈빛 때문일 거야. 세기의 명배우로 생전에 일찌감치 전설이 되어버린 그레타 가르보가 카메라 렌즈에 노출되었을 때 성적 흥분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남자가 죽일 듯이 화를 내며 노려볼 때 온몸의 성감대가 하나도 남김없이 깨물리는 듯한 무한한 쾌감에 전율하곤 하지. 그러면 내 머리속은 투명한 액체로 꽉 들어찬 것처럼 섹스외에는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목단추를 끌르고 블라우스를 머리위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전남편은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의 손아귀에는 말채찍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윤기를 잃고 축 늘어져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비록 낡긴 했지만 편달의 위용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젖가슴을 감쌌던 브래지어에 이어 금단구역의 휘장이던 팬티가 스르르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자 소영식은 눈이 충혈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의 반사적인 감응에 제동을 걸듯 소리쳤다. {불을 켜요!} {여긴 조명등이 없어. 형광등은?} {형광등빛은 창백한 느낌이 들어 싫어요. 그럼 스탠드라도 켜요.} 그는 주인에게 충성스런 개처럼 부리나케 움직였다. 커튼이 드리워져 거실의 창문이 차단되자 빛을 발하는 것은 오직 두 개의 100W짜리 갓이 벗겨진 알전구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작은 크기이면서도 눈이 부실 정도의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만족스럽게 갖춰지자 나는 허리를 구부려 엉덩이를 뒤로 쑥 내밀었다. 휙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쓰라린 고통과 함께 다시 없는 쾌감이 세포 가득히 밀려왔다. 내 전신은 붕붕 떠다니며 솜털 같은 구름을 밟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엉덩이는 금방 상처난 살갗에 고추가루를 뿌려댄 후 문질러댄듯이 따끔거렸다. {좋아?} 그가 헐떡이는 숨결을 토하며 말했다. {좋아요. 더 힘껏 내리쳐요!} {얼마든지! 당신은 짐승이야!} 말로써 나를 우롱하는 만큼이나 전남편의 손에는 힘이 가해졌다. 철썩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방안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곧 나의 알몸에서는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텅스텐을 코일 모양으로 꼬아 만든 알전구의 필라멘트에 시선을 집중했다. 발광체는 빛을 발하다 못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눈알이 아리며 시야가 가물거렸다. 나는 충만한 그 빛으로 인해 눈이 멀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야말로 노예근성을 떨치지 못할 거야! 죽어서가 아니면 영영----} 전남편의 기합과 잔소리 그리고 나 자신의 비명과 쾌감에 뒤엉겨 내 온몸이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우리의 의식(儀式)은 멈추지 않았다. 9. 권태와 불나방 며칠 불안에 휩싸여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섹스는 신통칠 않았다. 한 마디로 기대 이하였다. 전남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의 강도라는 게 빤히 그 한계가 보이면서도 내가 그에게 죽자사자 매달리고 있는 인상을 심어준 것은 실로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공허는 실질로 채워지지 않는 한 갈증의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나는 섹스에 굶주려 있었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충분히 의식은 하고 있지만, 과거로 떨려나간 남자에게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는 기껏해야 따분한 시간을 죽이는 노리개감에 불과하다. 소영식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가 내 앞에서 부담없이 돈 얘기를 꺼낼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섹스는 마약과 같이 강한 유혹을 보내오면서도 끝에는 늘 미진한 채 해소되지 않는 감정을 남긴다. 나는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망각할 수 없는 감정이 야기하는 불안으로 인해 나의 정신은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았다. 자꾸만, 나도 모르게, 나는 섹스를 처참한 이미지에 결부시킬 때가 있었다. 섹스와 광기, 죽음, 피, 추락, 절벽, 으깨진 얼굴........ 그것들이야말로 죄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인가? 내가 애라에게 보이는 질투심도 곽웅혁이 잔인한 성적 이미지를 풍겨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아, 도대체 망상증환자들을 연구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곽웅혁이 4번째의 망상환자라는 미신적인 믿음으로 인해 내 앞날은 어떻게 변해나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돌연 모든 면에서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웠다. 그럴 때 나의 구원은 언제나 작품들을 창조하는 데 있었다. 어쩌면 예술이란 영역은 나에게 있어서는 전적으로 도피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나를 철저히 잊기 위해 다시 석고를 개고 진흙반죽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그런데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병원 지하매점에서 인 형사와 합석을 했다가 들켰을 때부터 경계심을 단단히 졸라매었어야 했다. 나는 곽웅혁이 그 일을 까맣게 잊은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했다기 보다는 내 스스로가 잊고 있어 하등 걱정을 한 적이 없었다. 나태한 일상에 젖어든 나의 무심함이 끝내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하루는 곽웅혁이 외출하자마자 인 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안심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인 형사가 관심이 있는 건 지겨울 정도로 똑같았다. 혹시 간밤에 애라에 대한 곽웅혁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는냐는 거였다. {없어요. 변화가 생겼다면 내가 먼저 연락을 취했을 거예요.} 나는 약간 식상한 투로 말했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애라의 몸가짐이나 행동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든가......} 그는 집요했다. {글쎄요. 요즘들어 둘이 은밀히 만나는 기회가 많다 보니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눈에 띌만한 것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거 낭패로군요......애라는 좀 어떻습니까?} {퇴원한 뒤 보이던 우울증은 거의 가신 것 같아요.} {다행이군요. 헌데, 곽웅혁 그 놈이 애라를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정이야 어찌 됐든 애라를 가위로 찌른 영표학생에게 보복을 가하지는 않을까요?} {보복요?} 나는 확 열이 오름을 느꼈다. {놀라시는 걸 보니까 제 말이 귀에 거슬렸던가 보군요. 그럼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곽웅혁이 영표학생을 따로 만나 상해를 가한 것에 대해 뭔가 남자끼리의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짐작하기 어려운데요. 과연 그랬을까요? 그 일은 사고였기 때문에 다 불러모은 자리에서 더 이상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된다고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는데요.} {그렇더라도 한 번 영표의 의중을 넌지시 떠봐요. 어쩌면 건질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애써 볼께요.} 나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기꺼이 응하는 척 대꾸했다. 사실은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어 그랬다 뿐이지 어떤 이유로든 그런 부탁까지 들어주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인 형사는 끊임없이 캐묻고 싶은 말들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전화통을 붙잡고 한정없이 늘어지려는 걸 내가 적당히 둘러대며 마무리를 지었다. {인 형사님, 죄송하지만 그만 들어가세요. 지금 막 외출하려던 중이었거든요.} {아, 네......그런 줄도 모르고 제 임의대로 통화가 길어졌군요. 그럼 다음에 다시 걸겠습니다.} 찰칵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던지듯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별안간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굽어살피고 있다는 섬뜩함에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다. 상대는 다름아닌 곽웅혁이었다. 나는 질겁을 하며 더듬거렸다. {나, 나가신 줄 알았는데......} {식탁에 자동차키를 깜박 두고 나가는 바람에 돌아왔소.} 그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어,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죠?} 나는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다 들었소.} {뭐, 뭘요?} {숨길 거 없소.} 의외로 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인 형사라는 그 사람 본명이 인 동하가 아니오?} {......} {역시 내 짐작대로군. 병원 지하매점에서 합석했던 사람도 인 형사가 아니었소?} {죄, 죄송해요. 그건 절대 본의가 아니었어요. 인 형사가 어느날 접근해 와서는......} 나는 뭔가 그가 신뢰할만한 말을 찾으려 했으나 자꾸 핑계나 둘러대는 초라한 꼴이 되고 말았다. {닥쳐요! 변명은 듣기 싫소! 아마 놈은 내가 살인마라고 떠벌여댔겠지. 그러자 당신은 좋아라 맞장구를 치면서 기꺼이 그나풀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했을 거구.}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건 전적으로 오해예요.} {시끄럽소! 젠장, 다들 한통속이었어!} 그러더니 그는 주방으로 달려가 자동차키를 집어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나는 아뜩해진 정신을 수습해 곧 바로 인 형사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통화가 불가능했다. 2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통화가 이뤄졌다. {삐삐가 불통이던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화가 치밀어 다짜고짜 말했다. {잠깐 고장이 났었소. 애라는 도착했소?} {네, 방금 들어왔어요.} {애라와 강남의 모 카페에서 만날 약속이 돼 있었던 것 같던데 놈은 나타나지 않았소. 놈은 지금 어딨습니까?} {그건 애라도 물어보더군요. 하지만 저도 몰라요. 인 형사님을 급하게 찾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어요.} {무슨 소립니까?} {아무래도 그 사람 집을 나간 것 같아요.} {애라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러 나갔단 말입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녜요. 아예 집을 나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는 곽웅혁이 모든 것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 낱낱이 설명했다. {이거 낭패로군!} 얘기를 듣고난 인 형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해요. 전 곽웅혁 씨가 외출을 한 줄로 알고 그만......} {상심할 거 없소. 안 들켰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소?} 인 형사는 아량이 넓었다. 벌컥 역정을 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어디 놈이 갈만한 곳을 모르겠소?} {전혀요. 이제 어쩜 좋죠?} {글쎄요. 놈이 짐을 죄다 꾸려 나간 것이 아니라면 한 번은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집에 붙잡아 둘 뾰족한 묘안은 없을 것 같네요. 그 문젠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소. 아무튼 내가 당장 그리로 가겠소.} 인 형사는 10분도 안 돼 집으로 들이닥쳤다. 애라를 집앞까지 미행한 후 요 근처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거였다. 그는 곽웅혁의 소지품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다. {그건 안돼요. 그가 짐을 가지러 돌아와서 방을 뒤진 흔적을 발견하면 절 가만히 내버려두겠어요?} 나는 강력히 거절했다. {흔적을 안 남기면 돼요.} {자물쇠를 뜯어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해요.} {열쇠전문가에게 맡기면 자물쇠를 뜯지 않고도 얼마든지 손쉽게 열 수가 있소.} {하여간 안돼요! 그건 단지 곽웅혁 그 사람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녜요. 다른 아이들도 눈치가 있는데 주인 없는 방을 함부로 뒤진다는 인상을 줘봐요. 제 면목이 뭐가 되겠어요?} 내가 결코 물러나지 않을 기세로 나가자 인 형사는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좋소. 내가 양보하겠소. 하지만 며칠 추이를 기다려 본 후에도 조짐이 이상하면 가차없이 방을 뒤지겠소.} 인 형사가 돌아간 후에 나는 이번엔 애라의 추궁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곽웅혁의 행방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일절 모른다고 잡아뗐다. {난 짐작도 못하겠어. 서둘러 나가길래 널 만나러 나가는 줄로만 알았지 뭐니? 그 분 성격은 니가 더 잘 알잖니? 자기의 행선지에 대해 시시콜콜 털어놓는 사람도 아니구.}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약속을 취소하려면 전화 한 통화로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조바심 갖지 말고 좀더 기다려보자꾸나. 금방이라도 불쑥 나타나 우리를 걱정 쌓아놓고 사는 바보로 만들 줄 누가 아니?} 그러나 곽웅혁은 사흘이 지났어도 전화 한 통화없이 깜깜 무소식이었다. 이대로 어디론가 홀연히 잠적해 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짐을 손도 안댄 채 놔둔 걸로 봐서 그의 잠적은 충동적이고 일시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신과 불편한 과거로 얼룩져 있는 인 형사가 나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우리집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을 것이다. 게다가 애라와의 관계 즉 자신의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정신적 여유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희망을 안겨주는 점은 인 형사가 자신앞에 출현했다고 해서 그가 겁을 집어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인 형사가 피하고 싶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범행현장이 들키거나 단서를 잡힌 것은 아니기에 도망을 치듯 잠적을 하는 것이 절실하고 급박한 당면과제는 아닐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흘째 아침 일찍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직 7시가 되기전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나요. 곽웅혁이오.} 그는 지쳐 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가 어디예요?} 나는 잠에서 덜 깨어나 하품을 짓씹다가 귀가 번쩍 뜨여 물었다. {옆에 누가 있소?} {여긴 제 침실이에요. 누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좋소. 그럼 어디 한 번 믿어보고 말하겠소. 이곳은 전남 여수인데 지금 당장 이리루 와주면 좋겠소.} {지금 당장요?} {왜 선약이라도 있소?}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이쪽 형편이 워낙 다급해 무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거는 거니까 이해해주구료. 무일푼이 된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차량접촉사고가 생겼소.} {그럼 전화 거는 곳이 병원이세요?} {그렇진 않아요. 차량이 상당히 손상되긴 했지만 몸은 다치지 않았소.} {상대는요?} {마찬가지요. 그 사람은 한시 빨리 금전보상을 해주길 바랄 뿐이오.} {얼마면 되겠어요?} {최소 50만원은 필요하오.} {알겠어요. 계신 곳이 정확히 여수 어디죠?} {이곳 지리를 아오?} {네, 관광삼아 몇 번 가본 적이 있어 관공서라면 찾아갈 수 있어요.} {마침 잘 됐군요. 여수항 여객터미날 1층 대합실에서 2시에 만나기로 합시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소. 혼자 와야만 하오. 특히 인 형사를 끌어들이면 안돼요! 약속하겠소?} {약속해요. 곧 갈께요.} 나는 즉시 김포공항 안내계에 물어 여수행 비행기가 언제 뜨는지 문의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승용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세수도 하는둥 마는둥 부랴부랴 집을 나선 것이 7시 15분, 다행히 강남에 이르러서야 출근차량이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8시 20분경에는 만남의 광장 톨게이트를 무난히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시속 150킬로미터 이상으로 내달렸다. 광주에 도착한 것이 11시 50분, 광주를 벗어나자 도로의 폭이 왕복2차선으로 좁아졌으나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순천을 지나 좌로 광양만을 끼고 국도를 달릴 무렵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으나 태양빛은 넓게 퍼진 잿빛 구름에 가려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여수라는 이정표가 보였을 때 나는 문득 객감(客感)에 젖어들었다. 여수는 아담하니 아름다운 포구다. 특히 몇 해전 돌산대교의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정경에 흠뻑 매료된 바가 있었다. 완만한 둔덕으로 둘러싸여 오목 들어간 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포구는 새둥지 같은 인상을 준다. 붉고 푸른 깃발을 단 통통배는 뒤로 횟집이 늘어선 포구에 한가하게 정박해 있고 생선 비린내가 나는 고깃배가 들락거릴 때마다 어디선가 무리지어 날아온 갈매기떼의 원무가 한 폭의 그림같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넓고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답답한 가슴이 트일 것 같았다. 게다가 웬지 모르게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애인을 찾아가는 길이기라도 하듯 굉장한 흥분이 고압전류처럼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여객터미날은 섬을 찾아나선 낙시꾼과 근처 다도해에 사는 주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소란스런 대합실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곽웅혁은 2시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약간 초조해졌다. 담배를 피워물까 했으나 연신 수다를 떨어대는 촌아낙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여 그만두었다. 10분쯤 지나자 곽웅혁이 저만치에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걸어갔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일단 탑시다!} {타다뇨?} {2시 20분발 부산행 엔젤호가 있소. 곧 개찰이 끝날 테니 서둘러야 해요.} {느닷없이 부산엔 왜요? 돈이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또 피해보상은 어떡하구요?}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빼냈다. {승선해서 말해주겠소. 어서 배에 오릅시다.} 그때 마침 엔젤 9호가 곧 떠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은 빨리 승선하라는 어나운스먼트가 흘러나왔다. 곽웅혁은 나를 강제로 잡아끌다시피 개찰구로 데리고 갔다. 그러며 그는 내가 인 형사와 동행을 했을까봐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배에 타는 이유도 부산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도 있지 모를 미행을 따돌리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나는 끝까지 버티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었지만 여수까지 찾아온 이상 그가 하자는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25명 가량을 태운 수중익선(水中翼船)인 엔젤호는 곧 33노트의 속력으로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엔젤호의 특성과 도중에 들러갈 곳에 대한 안내원의 설명이 있은 후 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내가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는 창밖에 펼쳐진 오동도의 등대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돈이 떨어졌느니 차량접촉사고가 있었느니 했던 건 죄다 거짓말이었소.} {서, 설마요?} {미안하오.} {그럼 여기까지 절 불러내어 대체 뭘 어쩌자는 거죠?} {뭘 어쩌자는 게 아니오. 단둘이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소.} {그건 집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요.} {집에서라면 당신을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소. 게다가 우이동집은 늘 인 형사가 감시했을 게 아니오?} {절 믿지 못한다면서 어째서 여기서는 제가 솔직하기를 기대하는 거죠?} {사람이란 누구나 때와 장소에 따라 숨김없이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오. 임종을 앞두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드물듯이 여행중일 때는 대개가 선해지는 법이오.} {제가 끝까지 속인다면요?} {유진 씨가 그러기를 작정한다면 나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솔직해지기로 합시다. 그래야만 피차간에 이득이 될 거요.} {궁금하신 게 많은 것 같은 표정이네요?} {물론이오.} 그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가 선수(船首)로 난 창문에 붙은 아크릴판에 금연이라는 빨간 문구가 적힌 것을 보고는 도로 집어넣었다. {역시 선생님이 가장 궁금한 점은 애라에 관한 것이겠죠?} {틀렸소. 난 그 아이를 충분히 알만큼 알았고 그 아이에 대해 숨겨진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진다고 해도 결코 놀라지 않을 거요. 그 아이가 설혹 인 형사의 미끼 역할을 했대도 나는 신경쓰지 않을 거요.}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이제 그만 만나겠다는 뜻인가요?} {그 정반대요.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애정은 앞으로도 추호의 변함이 없을 거요.} {저로서는 곽선생님의 바로 그런 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다가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뭐든지 주저말고 말해봐요. 절대 개의치 않겠소.} {좋아요, 그럼 얘길 하겠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제가 질투심을 느끼거나 애라를 모함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그 점에 관해선 걱정하지 말아요.} {애라가 선생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오로지 돈 때문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반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나의 은근한 기대를 무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는 전혀 동요의 기색이 없이 싱겁게 내뱉았다. 얼굴도 자제력으로 꾸민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인데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라에게 애정을 느낄 수가 있나요?} {안될 게 없잖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반문했다. {돈으로는 애정도 살 수 있다는 황금만능의 철학인가요?} {아무렴 어떻소? 나는 진실이니 돈이니 하는 도덕적 가름으로 그 아이를 보는 게 아니오. 그저 그 아이의 어린애다운 순진함에 매료되었을 뿐이오.} 나는 언젠가 한 번 그에게 말한 적이 있듯이 큰 나이차가 애정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여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애라를 보는 시각이 순전히 살갗이 탱탱한 꽃띠의 젊음 때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는 하마트면 속물이라는 비아냥을 입밖에 낼 뻔하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수준미달의 게걸스런 40대 한국남성들에게 전염병처럼 도는 영계나 밝히는 점잖치 못한 악취미를 가졌다니!' 나는 실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왜 말이 없소?} 그는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스스로 모순된 처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내가요?} {애라에게서 양동수 씨를 떼놓은 것은 상식의 잣대로 견줄 때 사회로부터 불미스럽다는 지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그 경우완 사정이 다르오. 그 자는 엄연히 마누라가 있지만 난......}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건지 안들어도 알겠어요.} 나는 성급해져서 말허리를 잘랐다. {곽선생님의 경우는 애라를 사랑하는데 법적인 하자가 없다는 말씀일 테죠. 물론 법적으로야 누구 못지 않은 당당한 자격이 있겠죠. 하지만 그게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모르세요?} {지, 지나친 말이오. 난 다만......나, 난 그 아이를 통해......아니오 그런 말을 해봤자......} 곽웅혁은 뭔가를 애써 설명하려 하다가 제대로 정리가 안된듯, 어쩌면 그런 의식에 깨어 있지 못해 당황한듯 심하게 더듬거렸다. 나는 그런 그가 느닷없이 몹시 측은해 보였다. 웬지 그 순간 그는 아무 특징도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하고만 꼴이었다. 나는 그가 살인마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그의 몰골은 혼란에 빠져 생기를 잃어버린 흔해빠진 중년남성에 지나지 않았다. 살인에 이골이 난 광인의 섬ㅉ한 눈빛은 완전히 퇴색돼 있었다. 그는 의욕이 탈진된 사람처럼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득히 펼쳐진 바다는 파도가 거의 없어 거대한 한 장의 비닐막이 옅은 바람결에 출렁이는 형상을 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의 침묵이 지루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제 말이 지나쳤다면 사과하겠어요.} {사과할 필요없소. 유진 씨는 내가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점을 지적해 주었소.} 그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때문에 얘기의 방향이 빗나간 건 아닌가요? 곽선생님이 절 여기까지 불러내었던 건 저와 인 형사가 어떤 경위로 만나게 되었고 여태까지 무엇을 어떻게 염탐해 왔는지를 따져묻고 싶어서가 아니었나요?} {잘못 짚었소. 난 인 동하 형사에겐 관심없소. 그 작자가 유진 씨에게 무슨 얘기를 찌껄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난 이미 그의 시달림을 받을 만큼 받았소. 그 결과 그를 이기는 최선의 길은 그를 잊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소.} {인 형사가 제게 끼쳤을지도 모를 영향력에 대해 부아가 치밀지 않으세요?} {아니라고 말하진 않겠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흥미를 느끼는 상대는 오로지 당신뿐이오.} {저요?} {뭐든지 숨김없이 말해주겠소?} 생기를 되찾은 그의 눈이 꿰뚫을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노력해 볼께요.} {나를 은밀히 관찰해 온 것으로 아는데?} {인 형사의 부탁을 받아들인 건 사실이에요.} {인 형사와 상관없이 나를 탐색하지 않았소?} {왜 그런 생각을 하셨죠?} {대답만 해요.}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부분적으로요. 곽선생님이 편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고쳐주고 싶었어요.} {결국 나를 환자로 취급한 셈이군?}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시면 곤란해요. 전 선생님에게 아무 것도 강요한 적이 없어요.} {유진 씨의 눈엔 내가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으로 보이는 거요?} {편견으로 가득찼다는 표현은 자칫 과장될 염려가 있어요. 누구나 한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요.} {구차하게 돌려 말할 필요없소. 대체 나의 편견이란 게 뭐요?} {성혐오증이에요.} {성혐오증?} 그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갔다. {많은 사람들이 성을 혐오해선 안된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타락을 허용하고 있소.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말살하고 자연스런 욕구를 황폐화시킨다는 이론을 내세워 자신들의 방탕이나 황음의 방패막이로 삼고 있는 거요.} {일부 그런 위선자들이 없진 않아요. 그렇다고 성을 나쁜 것, 죄악시해야 할 것, 터부, 금기사항, 저질스러운 것으로 싸잡아 비난해선 안돼요.} {유진 씨는 어떻소? 그 위선자들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요?} {전 위선적이지 않아요. 한 번도 제 자신의 욕망을 숨겨본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이혼한 남편과 서슴없이 어울리는 것도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내기 위해선 가요?} {제 뒤를 캐셨군요?}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그렇소. 당신도 나를 탐색했으니까.} {그래서 얻은 게 뭐죠?} {얻은 건 없소.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이 되고 말았소. 당신이란 여자의 밑바닥을 알기 위해서였는데 결과는 혼란만 가중되고 말았소.} {무슨 뜻이죠?} {난 당신이 왜 나를 우이동집에 끌어들였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흐응, 호감이라......난 바로 당신의 그런 점에 놀랐소. 인 형사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도 호감을 느낄 수 있었소?} {인 형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어요. 전 원래가 세상의 평판 따위는 무시하는 편이에요.} {아주 편한 사고방식이로군. 헌데 호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왜 한 번도 내게 데이트를 신청하지 않았소? 당신 같은 성격이라면 수줍음 때문은 아니었을 텐데.} {오해마세요. 제가 말하는 호감이란 반드시 이성간의 교감을 의미하는 건 아녜요. 전 곽선생님이 저의 예술적 재능을 자극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예술적 재능이라고 했소?} {한두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을 텐데요? 전 제 작품에 초현실주의자들의 방법을 차용하고자 해요. 광기나 꿈, 무의식적 충동 같은 것을 표현하고 싶어요. 이성에 속박돼 있는 건 모두 다 권태로우니까요. 선생님은 정신과의사이시니까 제 무의식의 세계를 열어보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영표나 미경이 같은 아이들은 일종의 연구대상인가?} {부인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제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들도 절 필요로 해요. 제가 그들을 이용만 했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좋소. 우리가 아니 내가 당신이 무의식적 상상을 발휘하는데 촉매가 된다면 당신은 뭘 얻게 되는 거지? 위대한 예술작품인가?} {운이 좋다면요. 하지만 그 이전에 전 무기력한 권태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대체 무엇이 당신을 권태롭게 하죠?} {제 삶 자체가요. 풍요는 누구에게든 권태를 몰고오죠. 그리고 개인에게서 활력과 생기를 앗아가요. 돈은 좋은 거지만 자칫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질 염려가 있어요. 전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현실은 풍요와 돈의 가치에 오염돼 있어요. 거기에서 벗어나 오로지 비현실적인 것, 조금도 기성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구의 손길도 스쳐 닿지 않은 저만의 참신한 욕망이 실현되길 바래요.} {그걸 무의식의 세계에서 찾겠다는 거요?} {그래요. 전 한때 새로운 욕망을 찾아 자살까지 꿈꾸었어요. 하지만 자살 또한 진부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자살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거든요. 게다가 권태의 극(極)은 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 드넓은 바다를 봐요. 바다는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위대성을 상징할 수 있지만 격랑(激浪)의 웅대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 그것은 밋밋한 고요이거나 평범한 무거움에 지나지 않아요. 다시 말해 권태에 빠진 물의 사막에 불과하죠. 삶은 바다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산전수전을 겪지 않고 부모가 만들어준 울타리안에서 안락하게 사는 삶처럼 허망한 게 또 어딨을까요? 전 굉장치도 않은 여유와 안락이 지겨워지기 시작한 거예요.} {당신은 불나방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에라도 뛰어들어야 직성이 풀리겠군!} {빛이여 아니면 죽음이여! 날쌘 쪽이 나를 붙잡으라!} {시구절 같은데?} {발레리예요.} {발레리를 신봉하오?} {아니요. 제가 신봉하는 게 있다면 빛의 이미지예요.} {굴광성(屈光性)이군.} {철저히요.} {지난 번에 1000W짜리 대형 조명등을 사방에 켜놓고 누드를 연출한 것도 빛의 마력에 이끄렸기 때문이오?}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하니 인상주의 화가들을 가장 흠모한다던데 그것도 빛에 대해 그들이 보인 애정어린 관심 때문이오?} {그래요. 제가 죽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머니의 품속이 아니라 태양의 코로나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곳이에요.} {태양의 코로나라? 마치 당신은 괴테의 '동서시편(東西詩篇)'에 나오는 불나비 같은 여자군.} {동서시편요?} {찾아 읽어봐요. 어떤 학자는 당신 같은 여자를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에 걸렸다고도 하지. 엠페도클레스는 신이 되기 위해 에트나 화산에 뛰어든 그리이스 철학자요.} 그때 마침 배가 작고 보잘것없는 항구인 남해에 닿는 바람에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에 따라 우리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하승선(下乘船)이 끝나고 엔젤호가 선수를 돌려 충무방면으로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말했다. {우이동집을 떠나면 어디로 갈 거죠?} {떠난다고는 하지 않았소.} {그럼 다시 들어올 건가요?} {아직 결정한 바 없소.} 그는 신중하게 억누른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버지 얘기를 더 해봐요.} {별안간 제 아버지 얘기는 왜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한편으론 그 사실에 갈등을 느끼지 않았나요?} {갈등은 없었어요. 어머니를 사랑했으니까요. 헌데 아버지 얘기는 느닷없이 왜 묻는 거죠?} {당신이 원한 거잖소. 자신의 무의식을 파헤쳐 작품에 응용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이런 장소에선 싫어요. 그리고 추궁하는 듯한 태도도 마음에 안 들구요.} {당신이 강렬한 빛에 매료되는 건 아버지와 관련된 게 아니오?} {그만두세요! 대답하지 않겠어요.} 왜 그런지 내 심장은 터질듯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무항에서엔젤9호는 20분간 쉬어갔는데 커피만 한 잔씩 나눠 마셨을 뿐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가 인 형사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무덤덤함으로 보아 억지로 꾸민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나를 밑바닥까지 들여바보고 싶은 욕구로 충만한 듯했다. 마산 방면을 지날 즈음 내가 말을 붙였다. {언제부터 제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죠?} {당신이 보헤미안에서 나에 관한 신문스크랩을 내밀고 공갈을 쳤을 때 부터였소. 누구든 그 기사를 읽은 사람은 하나같이 나를 멀리 했었소. 사실 여부를 떠나 나쁜 소문이 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게 우리네 인심이오. 헌데 당신만은 예외였소. 그러니 낸들 당신에게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있었겠소?} {나를 뒷조사해서 혼란만 가중되었다고 하셨는데 , 그래도 알아낸 게 있었을 텐데요?} {단편적인 것들은 많았소. 당신의 학창시절의 생활부터 예술관까지 즉 그리이스인의 누드에 매료되어 있다는 것, 감성적인 유한속에 어떻게 무한하고 압도적으로 위대한 것이 나타날 수 있을까 하는 숭고의 감정이나 미학에 경도되고 있다는 것 등등이오.} {그래서 얻은 결론은요?} {거듭 말하지만 오리무중이오. 구슬은 꿰어야 보배라 했거늘 난 그 모든 정보들을 꿰어맞출 아무런 구심점도 찾지 못하고 있소. 막연히 생각하기로는 당신의 아버지가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소만......} {섣부르고 무책임한 판단이에요. 왜 요즘 사람들은 백이면 백 딸이면 아버지 아들이면 엄마에게서 심리적 원인제공을 찾으려는 거죠?} {그럴지도 모르죠. 프로이드식 해석이 만능요법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주 무근거한 발상은 아니었소. 당신이 나보코프의 '어두운 방'이란 책을 빌려주면서 한 말을 기억하오?} {물론이에요.} {난 그때 당신이 은연중에 암시하려 했던 바가 아버지와의 관계라고 믿었던 거요. 전적으로 내 착각이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아버지? 글쎄요. 전 무감각해졌어요.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전 다만 그 분의 몸을 빌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저 그뿐이에요.} 나는 온몸에 열이 오름을 느꼈다. {과연 그렇게 냉철한 거리를 부모에게 둘 수 있다고 생각하오?} {가능해요. 전 오래 전부터 남남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 자체가 증오심을 감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에 불과해요. 당신은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집어치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내가 크게 소리치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이어 코발트색 와이셔츠에 넥타이차림의 젊은 안내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손님, 좀 조용히 해 주시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아까부터 우리의 말소리는 잠을 청한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만큼 떠들썩했다. 나는 민망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곽웅혁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다위에는 뿌옇게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내원이 돌아가자 나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흥분은 여전히 가슴속에 꺼지지 않은 모닥불처럼 남아 있었다. 영도다리가 보이고 밀집한 아파트촌이 산중턱에 우뚝우뚝 솟아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눈을 떴다. 엔젤 9호는 부산에 입항한 것이었다. 비는 그쳐 있었다. 시계는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사를 할 시간이었지만 웬지 식욕이 생겨나지 않았다. 여객터미날을 거쳐 밖으로 나오면서 그가 말했다. {난 별루 먹고 싶지 않은데 유진 씨는 어떻소?} {저두요.} {그럼 택시를 탑시다.} {어디로 가시려구요?} {어디로 가긴요? 여수로 되돌아가야죠. 차를 거기 두었잖소.} 우리는 택시를 대절해 남해고속도로로 왔던 길을 거슬러갔다. 차창을 내리고 비에 젖은 남도(南島)의 9월 향기에 몸을 내맡긴 채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여수에 도착할 동안 나는 이 남자가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으로 애를 태웠다. 내 차를 주차해 둔 곳에 내렸을 때는 8시가 지나 있었다. 그는 줄곧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유진 씨는 서울로 올라가요.} {선생님은요?} {하루 여기에 더 머물겠소.} {애라가 없었다면 고민조차 없었겠죠?} {그 아이 얘긴 하지 말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차에 타기를 권했다. 나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그의 손짓은 금방 빽미러 뒤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음악을 크게 틀고는 가능한 한 속도를 올렸다. 계기판은 시속 110킬길로미터를 넘나들었다. 나는 무엇엔가 생각을 열중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뜻대로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의 의문이 스쳐갔다. '왜 곽웅혁은 애라를 항상 그 아이로 부르는 것일까?' 나는 그가 내앞에서 애라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헤어지면서도 애라라는 호명을 사용하지 않고 '그 아이 얘긴...... ' 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뿐만 아니라 매번 그 아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듯했다. 그때 머리가 확 터지며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한 구절을 떠올렸다. ----진짜로 매력적인 여자는 모두 중년 사내들의 손아귀에서 옴싹을 못하는 처지죠. 그 여자들은 남편을 위해 아이를 낳아주고, 살림을 꾸려가고, 모진 세파에 갈고 닦여서 매사에 고분고분하는 토끼가 되고 말았습죠. 하지만 난 그런 여자들에게서만 유혹의 기분을 느끼는 겁니다... 아, 아닙니다. 그 부인들은 정숙할 뿐만 아니라 뭇사내들의 시선을 자극할 만큼 미인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 피부가 쭈글쭈글해져서 추하기조차 하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보면 오금을 펴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내가 성적으로 민감하게 감응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여자들이 갖고 있는 세상의 이목에서 잊혀진 나이많은 유부녀라는 레떼르 때문인 것입죠. 그게 아닐 바에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소꼽장난이나 하고 있는 게 백 번 낫죠! 애라를 바라보는 곽웅혁의 시각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세상에서 어른들이 보통 말하는 뜻으로의 성적 애착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여자를 사랑한다면, 자신만의 방식이겠지만, 자신을 보호해 주는 어머니 같은 여자이거나 아무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유치한 소꼽놀이의 상대로서일 것이었다. 그가 애라에게 육체적인 요구를 하지 않으면서도 애정을 갖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점 그리고 어린아이를 대하듯 '그 아이'라는 호칭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하필 그 상대가 애라였어야 했을까? 그가 대구에서 살해했다고 알려진 효진이라는 여대생도 애라만큼 어리지 않았던가? 인 형사의 말로는 16살 가출 소녀도 그가 죽인 피해자의 리스트에 올라 있다고 했었다. 앞서의 기회를 마다하고 애라를 점찍은 것에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검찰에 의해 기소될 뻔하다가 공소요건이 갖춰지지 않아 풀려난 이후 뼈만 앙상한 어머니의 시신을 화장한 시점(時點)의 전후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 같았다. 그토록 정신적으로 의존해 왔던 어머니를 화장한 다음 그는 진료를 포기한 채 극도의 고독을 견디며 생활해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끊임없이 인 형사의 감시를 받는 과정에서 그 외로움은 가중되어 굉장한 부담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는 1년이 넘도록 살인을 저지르지 않다가 애라를 만났다. 인 형사의 말대로 처음엔 그녀의 행실이 헤퍼보였기 때문에 살의가 자극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는 죽이기는커녕 애라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놀라운 것은 그 애정을 얻는 댓가로 애라의 성적인 문란과 동성애를 문제삼지 않기로 스스로 타협을 보았다는 점이다. 인 형사는 끝내 그 가치전도(價値顚倒)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애라에게만 보이는 그의 관용은 다음 두 가지중의 하나로 보여진다. 곽웅혁에게 있어 애라는 철없는 아이이고 소꼽장난의 상대에 불과하기 때문에 깊은 마음속으로부터는 그녀가 성적으로 오염돼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거나 그게 아니면 애라에게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순결한 성처녀 쥬리아의 환상일 것이다. 강렬한 첫인상이 잘 잊혀지지 않는 것처럼 곽웅혁은 애라에게서, 그녀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연극 속에서 쥬리아로 분한 그녀만을 봄으로써 착각에 빠져 있는 자신의 이중성을 못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하자 영표와 미경이, 애라가 하나같이 놀란 얼굴들을 하고 현관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언니, 여태 어디에 계셨어요? 우린 혹시 사고가 났을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었다구요.} 미경이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나무라듯 말했다. {어떡하다 보니 사정이 그렇게 됐어. 전화를 했어야 하는 건데...... 미안하구나. 어서들 들어가 자. 참, 어디 연락 온 덴 없었니?} 나는 집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웬 남자한테서 여러 번 언니를 찾는 전화가 있었어요.} {누군데?} {자기가 다시 걸겠다며 신분은 안 밝혔어요.} 그럼 인 형사일 터였다. {언니 저희들은 들어가 잘께요.} {그래, 어서들 취침해.} 다들 물러간 뒤 나는 주방 식탁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갑자기 피로와 함께 허기가 밀려와 계란후라이를 곁들여 먹었다. 가볍게 몸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고 잠자리에 들려 했을 때 문득 괴테의 '동서시편'을 찾아 읽어보라던 곽웅혁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곧장 시트를 걷어차고 일어나 2층의 서재로 올라가 그 작품이 있는지를 살폈다. 괴테에 관한 것은 기껏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빌헬름 마이스터----수업시대'가 고작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서초동 국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인문서관인 4층을 뒤져 겨우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나는 그 부분을 복사할까 하다가 책을 반출하는 절차가 귀찮아 가져간 메모지에 인상적인 내용만 적었다. ****** 불꽃 속에서 죽음을 동경하는 살아 있는 자를 나는 찬미하고 싶다. ...... 조용한 관솔불이 빛날 때 이상한 감정이 너를 붙잡는다. 너는 이미 암흑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욕망이 보다 높은 결론으로 너를 끌고 간다. ...... 마침내 빛을 사모하는 자여 너는 거기에서, 오오! 불타버린 나비여. ****** 메모가 끝났을 때 나는 까닭 모를 전율을 느끼며 <새로운 욕망이 보다 높은 결론으로 너를 끌고 간다>에 빨간 사인펜으로 진하게 밑줄을 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되뇌어 암송했다. 집골목에서 인 형사가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손을 들어 차를 세우게 했다. 차창을 내리자 더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아침부터 어디 갔었소?} 그가 말했다. {도서관에요.} {거긴 왜요?} {찾아야 할 자료가 있었어요.} 나는 그가 어제 하루종일 어디 있었느냐고 물을까봐 지레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의 긴장한 얼굴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왔소.} {오다뇨?} {곽웅혁 그 놈이 왔단 말이오!} {저, 정말요?} 나도 모르게 기쁨이 솟구쳤다. 순간적이라 인 형사는 그저 놀란 줄로만 안 모양이었다. {이제 어쩔 셈이오?} {그건 제가 여쭤봐야 할 질문 아닌가요?} {놈이 당신과 나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상 뭐라고 조언을 할 수가 없어 그렇소.} {일단 들어가봐야죠. 짐을 꾸리러 온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요, 그런지도 모르니까 어서 들어가 봐요. 좀 있다가 전화를 걸겠소.} 나는 전화를 걸지 말라고 할까 하다가 이미 들킨 일이라 굳이 부자연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만두었다. 나는 BMW를 서둘러 차고에 집어넣고 정원으로 들어섰다. 돌계단을 밟아올라 샐비어가 늘어선 길을 따라 가는데, 현관에서 막 곽웅혁이 애라와 함께 나란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뭔가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오셨어요?} 애라앞이라 나는 반가움을 내색하지 않은 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언니, 저 잠깐 나갔다 올께요. 곽선생님이 경복궁에 나들이 하재요.} 애라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더울 텐데?} 시샘이라도 하듯 나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수양버들 벤치 아래서 쉬는 게 얼마나 시원한데요.} {나갔다 오겠소.} 곽웅혁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은 채 애라를 리드해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찬찬히 지켜보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에어콘을 최상으로 가동시킨 다음 얼마간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데 인 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놈이 애라를 데리고 어딜 가던데 그만 중도에서 놓쳐 버렸소. 혹시 어디로 간다던 말은 없었소?} {경복궁으로 간다나 봐요.} 나는 맥빠진 소리를 냈다. {그건 뭐랍디까? 놈이 집에 계속 머무르겠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겨를이 없어 미처 못 물어봤어요. 하지만 그거야 뻔한 거잖아요. 짐을 꾸려 나갈 사람이 한가하게 애라와 데이트나 즐기겠어요?} 나는 가시돋친 말을 내뱉은 후 인사도 없이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느닷없이 애라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밤, 나는 끝내 애라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명목상의 이유는 그녀가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실크 블라우스를 가져가 입었기 때문이었다. 애라는 반발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입으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기억 안 나요?} {난 그런 적 없어.} {저한테 무슨 불만이 있는 거로군요.} {말 돌리지마. 앞으로 남의 물건에 손 안대겠다고 뉘우치면 가볍게 덮어질 일이야.} {그렇게는 못해요!} {뭐라구?} 결국 손이 올라가고 애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내일 당장 집에서 나가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덩달아 흥분한 나머지 너 같은 계집은 썩 꺼져주는 게 집안의 평온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이죽거려 주었다. 그러나 소동이 가라앉고 내 방으로 돌아와 마음이 진정되자 곧 함부로 말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애라가 집을 나간다면 곽웅혁 그 사람도 뒤따라 나가게 될지도 몰라......' 밤새 그 걱정으로 잠을 설치다가 새벽을 맞이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정원으로부터 서늘한 찬바람이 열어젖힌 창을 통해 가슴 깊숙이 호흡되었을 때 나는 어떡하든지 애라를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안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10. 이상한 증발의 귀결 애라가 집을 나갈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언행이 지나쳤다는 것에 한 마디의 사과도 해오지는 않았으나,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생활하는 걸로 보아 진짜로 나갈 의향은 아닌 것 같았다. 나 자신 또한 애라가 환자의 신분임을 배려했어야 한다는 자책이 들면서 더 이상 그날의 설전(舌戰)을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모든 건 곽웅혁이 집을 뛰쳐나간 이전으로 돌아와 제 자리를 회복하고 있었다. 나는 오전에 2시간----횟수도 주당 월수금 3번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치료에도 거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의 회회치료를 끝내면 작업실에 틀어 박혀 해가 기울 때까지 작품을 손질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사라'라는 요염한 이름을 가진 태풍이 불어닥쳐, 별로 외출할 약속도 생기지 않았으므로 작품에 몰두하는데는 안성마춤이었다. 게다가 나는 생각을 바꿔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들의 전시회를 주관, 개최할 때 내 작품도 서너 점 끼워넣을 작정이었다. 그 전시회가 채 20일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는 그간 이미 완성된 작품들이 꽤 있었지만, 출품을 하기에는 끝내 성에 차지 않아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으로 꼬박 밤을 세워 작업을 하다가 옥외 작업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문을 세차게 두드려대는 소리에 나는 잠을 깼다. 간이 군용침대에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추위를 덜기 위해 켜둔 석유난로는 기름이 다 탔는지 역겨운 냄새를 풍겨대고 있었다. 밖에서는 소동이 난 것처럼 시끄러웠다. 나는 석유난로를 끄고 형광등을 켠 다음 채웠던 도어록을 풀었다. 문을 열자마자 오싹한 한기와 함께 빗발이 쳐들어왔다. 비를 고스란히 맞은 채 영표가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거기 서서 말했다. {누나, 집안이 이상해요! 미경이랑 애라가 모두 없어졌어요.} {없어지다니?} {말 그대로예요. 식사를 하러 주방엘 갔는데 아무도 코빼기를 보이지 않길래 방마다 찾아다녔어요. 헌데 아무도 없지 뭐예요.} {설마? 니가 잘못 안 거겠지.} 영표를 따라 현관까지 가는 동안에도 비바람은 사정없이 몰아쳤다. 집안은 괴이쩍을 정도로 조용했다. 평소 이 시간이면 다들 식탁에 모여앉아 대화를 나누며 쩝쩝대는 소리로 시끄러웠을 터였다. 우리는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2층으로 올라가 먼저 미경이의 방부터 점검했다. 방은 원래의 단촐한 배치 그대로였다. 옷장과 간이화장대, 책상, 침대가 하나, 그 어디에도 눈에 거슬리는 흔적은 없어 보였다. 우리는 복도로 나와 맞은 편의 애라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도 이렇다할 이상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침대옆에 큰 여행용 가방이 눈에 띄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영표가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 가방을 여기 두고 나갔을 턱이 없잖아. 둘 모두 없어진 것두 이상하구.} 나는 가방을 열어젖혔다. 내의와 옷가지들이 단정히 개켜져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다. 애라가 소중히 여기던 독사진이 담긴 액자와 소지품도 보였다. 우리는 벌어진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워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미경이와 애라는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곽선생님은?} 그제서야 나는 생각이 나 말했다. {모르겠어요. 아마 계시겠죠.} {그렇지가 않아. 곽선생님도 늘 이 시간에 같이 식사를 하셨잖아.} 우리는 곧 곽웅혁도 깜쪽같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셋이서 어디 약수터에라도 간 게 아닐까요?} {그래, 맞아! 어리석기는...... 이 근처에 널린 게 약수터잖니. 그런 걸 괜히 걱정을 했잖아.} 내가 맞장구를 치자 영표는 이내 부정했다. {하지만 비바람이 혹독하게 불어닥치는데 설마 약수터엘 갔을라구요?} 그러고보니 바깥의 짓궂은 날씨로 보아 약수터엘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뭔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았지만 달리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지나자 영표가 걱정이 되는지 말했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 큰 어른 셋이 그것도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다고 하면 경찰에서 부리나케 달려와 발벗고 나서줄 것 같니?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야.} 우리는 다시 한 나절을 기다렸다. 파출부를 일찌감치 보내고 나자 5시가 가까웠다. 해가 비구름에 가려 바깥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손톱을 깨물어뜯고 있던 영표는 아무래로 안돠겠다 싶었는지 일어나 나가려 했다. {어딜 가려구?} 내가 제지했다. {파출소에요.} {성급하게 굴지 말고 좀더 기다려 보자꾸나.} 그때였다. 챠임벨이 울렸다. 영표가 뛰어가 인터콤을 받았다. 그는 낙담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곽선생님인가봐요.} 우리가 현관포오치까지 마중나가자 곽웅혁이 비를 흠뻑 맞으며 성큼성큼 올라왔다. 그는 증오심이 가득 담긴 눈길로 나를 노려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뒷뜰 별채로 몸을 움직였다. {곽선생님!} 영표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애라와 미경이랑 함께 나가셨던 게 아닌가요?} {아니. 헌데 그건 왜 묻지?} {우린 같이 나가셨나 해서요......} {아냐, 난 볼 일이 따로 있었어.} 그는 영표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애라와 미경이가 갑자기 없어졌어요.} 영표가 안타깝게 호소하듯 말했다. {없어졌다구?} 그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어서 신고를 하던가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무관심하게 몸을 돌리자 영표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요구의 빛을 띠우고 있었다. {그래, 어서 가봐. 일단 신고를 하는 게 낫겠어. 아냐, 나도 같이 가자.} {아니에요. 그 사이에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르잖아요. 한 사람은 지키고 있어야 해요. 혼자 다녀올께요.} {경찰서에 가는 게 두렵지 않니?} 나는 문득 평소 그가 경찰에 보이던 민감한 반응이 떠올라 말했다. {미경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냥 내버려둘 순 없잖아요.} 쏜살같이 달려나간 영표는 2시간 후쯤 돌아왔다. 그는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접수시켰지만 담당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줄 것 같지가 않다고 투덜댔다. {접수계원 한 명만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구요. 유흥가와 우범지대 특별단속기간이라 다들 나갔다나봐요. 대뜸 하는 말이 코흘리개 아이가 아니라 성인들의 실종이라면 가출이 뻔하다고 오히려 저를 설득시키려고 했어요. 게다가 제가 법적인 보호자나 후견인도 아니다보니 아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일단 접수는 받아놓겠으니 서류나 작성해 놓고 가라고 형식적으로 말하더군요.}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지만 영표는 조바심이 나는지 자꾸만 나의 능력에 기대려고 했다. 나는 내일까지만 기다려보자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지리하던 비가 그친 다음날 아침까지도 애라와 미경이에게서는 한 통의 전화조차 없었다. 이제 뭔지는 몰라도 불길한 일이 그들에게 닥쳤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어떡하든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나는 당장 급한대로 인 형사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다. {드디어 놈이 일을 저질렀군! 그러기에 내 뭐랬소? 항상 조심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얘기를 듣고나자 그는 대뜸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 사람 짓이 아니에요! 미경이도 함께 증발했다니까요.} {아니긴요? 아마 미경이가 애라를 죽이는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당했는지도 모르잖소?} {둘 모두를 죽였다면 그가 무슨 배짱으로 집에 버젓이 들어앉아 있겠어요?} {하여간 알았소. 누가 옳은지는 나중에 밝혀질 테니 입씨름은 그만둡시다. 지금 당장 관할서와 상의해 조치를 취하겠소.} 그로부터 1시간 반이 지나자 인 형사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동료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는 피부가 검고 우락부락한 인상의 곤색 점퍼를 입은 사내를 소개했다. {이 분은 강 형삽니다. D경찰서 강력계 소속이죠. 앞으로 실종자의 행방을 찾는데 적극 협조할 겁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인 형사만 따로 주방으로 불러내 속삭이듯 말했다. {인 형사님이 직접 오심 어떡해요? 곽웅혁 그 사람이 자극을 받아 흥분할지도 모르는데요.} {나도 그 문젠 고민을 해봤는데 상관이 없을 것 같소. 어차피 내 신분이 노출된 이상 한두 번 마주친다고 해도 큰 탈은 없을 거요. 헌데 지금 놈은 어디 있소?} {왜 그런지 오늘 아침엔 식사도 거르고 자기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요.} {그럼 지금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걸 모르겠군요?} {아마 모를 거예요.} {그가 묻더라도 세세한 얘기까진 하지 말아요. 그리고 수사의 진전에 따라 내일 당장에라도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명심해야 합니다.} {알았어요.} {그럼 실종자의 방부터 살펴봅시다.} 영표와 내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는 동안 인 형사와 강 형사는 미경이와 애라의 방을 용의주도하게 점검해 나갔다. 두 방을 다 둘러보았을 때는 거의 1시간이 지나 있었다. 우리는 애라의 방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인 형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행용 가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애라가 근자에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겠다고 귀띔을 한 적이 있었소?} {그런 적은 없었어요. 다만......} 나는 열흘 전쯤에 있었던 불미스런 '손찌검 사건'을 얘기해 주었다. {그때 그 애가 화가 나서 나가겠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날 밤에 싸둔 건지도 모르겠어요.} {딴은 그렇겠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오늘은 이쯤해 둡시다. 애라와 미경이의 수첩은 당분간 내가 보관하겠소. 적힌 전화번호에 일일이 연락을 취해 보면 아마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요.} 그때였다. 방바닥을 더듬던 강 형사가 손바닥에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을 올려보이며 말했다. {벽돌 조각 같은데요.} 인 형사는 얼굴을 들이대어 자세히 관찰했다. {그렇군요.} {방바닥에 왜 이런 게 떨어져 있을까요?} {글쎄요. 화분 받침대로 쓴 게 아닐까요?} {아마 아닐 거예요. 애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 꽃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어요.} 둘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었다. {그럼 어디서 바지에 묻어 들어온 거겠지.} 인 형사의 추단에 강 형사가 반대했다. {바지에 묻어 들어오기에는 조각이 너무 큰데요. 그리고 여길 봐요.} 강 형사는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 묻어나온 벽돌가루를 내보였다. {방안에 붉은 벽돌을 가지고 들어왔던 게 분명해요.} 인 형사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그거 정말 이상하군! 벽돌이 특별히 요긴하게 쓰일 데도 없는 것 같은데......} 두 형사는 진지하게 그 문젤 논의했으나 시원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벽돌 부스러기에 관심이 시들해진 것 같았다. 사정이 그랬다. 굳이 실종자와 하찮은 돌조각을 연관시켜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습관적으로 돌조각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오면서 인 형사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여자애들이 실종된 날 밤 놈은 어디 있었소?} {자세한 건 몰라요. 아마 자기방에서 잤을 거예요. 그건 이 애가 더 잘 알 거예요. 늘 옆방에서 자니까요.} 나는 옆에 서 있던 영표를 소개했다. {그날 밤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지?} 인 형사가 말했다. {자정쯤에요.} {곽웅혁씨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기방에 들어간 것까지는 봤는데 그 후엔 모르겠어요. 왜,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세요? 지금 계실 텐데요.} 영표는 약간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다. 인 형사가 나에게 은밀한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아, 아냐. 굳이 만나서 물어볼 건 없구.} 나는 영표를 물러가게 한 후 인 형사와 마주섰다. {곽웅혁 씨를 추궁할 건가요?} {놈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하오. 무조건 부인하면 달리 들이댈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잖소. 앞으로 놈의 움직임을 더욱 주시해야겠소.} 그는 속삭이는 듯한 태도를 바꿔 큰 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 전에 어쨌든 실종자들이 갈만한 곳을 다 알아볼 테니 유진 씨도 생각나는 곳이 있으면 연락을 취해봐요.} 그리고 그들은 정원을 한 바퀴 들러본 다음 돌아갔다. 인 형사는 이번 일을 기회로 기어코 곽웅혁을 철장에 잡아가두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오른 것 같았으나 수사는 사흘이 지나도록 전혀 진전이 없었다. 미경이와 애라의 소식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아이들은 만났거나 봤다는 사람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곽웅혁은 날마다 어디론가 쏘다녔다. 나는 그가 외출할 때면 그 즉시 인 형사에게 알려주었다. 인 형사는 그때마다 곽웅혁의 뒤를 밟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서 이런 연락이 왔다. {놈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모양인데 혹시 짐작가는 사람이라도 없습니까?} {전혀요. 제가 그 사람의 사생활을 알 리 없잖아요. 헌데 누굴 찾고 있는 거죠?} {구로동 소재의 H렌트카 회사 접수원의 말로는 곽웅혁이 자기네 회사 소유의 차량번호를 적어와 지난 9월 24일 그러니까 애라양과 미경양이 실종된 전날 누가 차를 렌트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렌트한 사람은요?} {주소와 서명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소.} {곽웅혁 씨가 왜 그 사람을 찾아다닐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그리고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소. 놈은 내가 미행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소. 어쩌면 당신에게 화가 돌아갈지 몰라요.} 그러나 인 형사의 충고는 적절했지만 정확하진 못했다. 이날 밤 나는 흥분한 곽웅혁의 추궁에 시달렸는데 인 형사와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애라를 어딘가에 빼돌린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믿는 거죠?} {그날 새벽 1시경 이 집에 찾아온 사람을 당신은 알고 있을 텐데.} 그는 잔뜩 벼르고 있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는 거예요? 전 그때 작업실에서 작업중이었어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야밤에 누가 여길 찾아오겠어요?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날 바보로 만들지 말고 진실을 말해봐.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잖아.} {제발 이러지 말고 진정해요. 곽선생님이 애라를 좋아하고 계신 걸 알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약간의 질투를 보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애라를 어떻게 해버릴 악녀(惡女)로 단정하면 곤란해요.} {만일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나, 난 당신을 죽일 거야.} 충혈된 두 눈이 활활 타오르며 나를 보려보았다. 그것은 진심인 것 같았다. 나는 겁을 집어먹지 않기 위해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협박치고는 너무 노골적이네요.} {난 사람을 죽일 때 한 번도 협박을 한 적은 없었어. 언제나 기습적이었지.} 그리고는 그는 내 방을 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그의 말이 현실감있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그는 살인을 했다고 스스로 고백을 한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틀 후였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시체 안치소로 불려갔다. 영표도 동행했다. 영표는 미경이의 시체를 보자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시체안치실은 비통해하는 그의 괴성으로 시끄러웠다. 마침내 확인을 거친 미경이의 시신이 부검에 들어가자 영표는 실성한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영표의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다음날 정확한 사인(死因)이 나왔다. 나는 밖에서 인 형사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오.} {청산가리라면 독극물 아녜요?} {그렇소.} {그럼 미경이가 자살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건 오히려 내쪽에서 묻고 싶은 질문이오. 평소 미경이에게 자살을 할만한 이유라도 있었소?} {그렇지 않아요. 영표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신이 불안했던 게 사실이지만 최근엔 아주 좋아져서 우울증세를 보인 적이 없었어요.} {그럼 역시......} 인 형사는 이미 타살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체는 행주대교 부근의 강변 갈대밭에 유기되었었는데, 발견 당시 미경이는 아래 위 하늘색 남자 체육복을 입고 있었소. 청산염중독으로 인해 입술이 짓물러 있었으나 다른 외상은 전혀 없었구요.} {미경이에겐 그런 옷이 없었는데......} {살해되기 전후에 범인이 입힌 것 같소. 난 처음에 곽웅혁이 입던 옷이 아닌가 했소만 사이즈로 보아 그렇진 않은 듯하오.} {미경이가 살해되었다면 애라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그렇게 봐야 할 거요.} 나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인 형사는 내가 슬픔을 억누르는 동안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이걸 봐요.} 그는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작은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거기서 찢어진 종이조각을 내보였다. {미경이의 오른 손에 쥐어져 있던 거요.} {그게 뭐죠?} {소설책인 모양인데 추측하건대 청산가리를 마신 후 몸을 뒤틀며 죽을 때 손아귀에 움켜쥔 것 같소.} 종이쪼가리는 죽어가던 미경이의 몸부림치는 손아귀에 꽉 움켜졌던지 빳빳이 폈는데도 꼬깃꼬깃해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소설책의 중하단 부분인지 페이지나 제목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빠져 있어 완전한 문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알비누스는 마음속... 아버지의 유별난 모습을 생생하게... 틀림없이 초라하고 성격이 못됐으며... 예술가로서 인생에 고달프게 시달렸... 그러나 알비누스라는 이름 하나로서 그 종이쪼가리가 나보코프의 '어두운 방'이라는 소설에서 뜯겨져 나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단서중의 하나인데 뭐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아, 아니요.} 종이쪼가리를 살펴보던 나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그러나 인 형사는 눈치를 못챈 듯 그 종이쪼가리를 비닐봉지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어요. 결정적인 단서는 정작 딴 데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수사상 비밀이니 유진 씨 한테도 말할 수가 없어 유감이오.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 단서를 추적하면 놈은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소.} 나는 그 이후 그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인 형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외출했던 곽웅혁이 돌아오자마자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만나기를 거부했다. {잠깐이면 돼요!} 나는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욕설이 들려왔다. 이어 그는 크게 뭐라고 떠들어대며 집기들을 내던지는 것 같았다. 방은 온통 그의 광분으로 어지럽혀지고 있었으나 나는 물러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소란이 잦았을 때 내가 다시 요구했다. {문 열고 얘기 좀 해요.} 그러기가 무섭게 문짝이 젖혀지며 나는 빨려들듯 안으로 당겨졌다. 그의 손이 덥썩 내 팔목을 낚아챈 것이었다. 나는 용수철처럼 그의 품에 안겨졌다가 튕겨나듯 그에게서 떨어져나왔다. 그 순간 그의 손톱이 내 팔목을 할켰다. {아파요!} 나는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엄살부리지 말고 어서 용건이나 말해.} 그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와이셔츠의 윗단추 두 개가 끌러진 채 얼굴전체와 쇄골께가 시뻘겋게 열이 올라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대형 믹서기가 돌아가며 뒤죽박죽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책장을 빠져나온 갖가지 책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고 사방으로 흩어진 박살이 난 도자기 조각들,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와 전화기마저 제자리를 벗어나 아무렇게나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죠?} 나는 따지듯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건가?} 그는 얼굴 가득히 비웃음을 머금었다. {애라 때문이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 잔소리는 귀담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어서 용건이나 말하라구!} {좋아요. 그게 소원이라면 말하죠. 제가 빌려준 나보코프의 소설을 돌려줘요.} {당신 진짜 재밌는 여자군! 지금 그걸 돌려받자고 만나지 않겠다는 걸 부득부득 우겨대 방을 이 꼴로 만들어 놓게 했나?} {저한테 덮어씌우지 말아요. 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당신이에요.} {물론 이 내 두 손으로 그랬지.}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원인제공은 당신이 한 거야.} {전 책을 돌려받고자 했을 뿐이에요.} {그 아이는 어딨지?} 느닷없이 그의 말이 비약했다. {왜 자꾸 애라의 행방을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당신의 눈빛에 그렇게 씌어 있으니까.} 그는 내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서로간의 얼굴 간격은 채 50센티도 안 될 정도로 가까웠다.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어서 책이나 돌려줘요.} 나는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왜, 그 책이 갑자기 필요해 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은근했지만 어떤 살의의 기운이 끼쳐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입가의 보일듯 말듯한 웃음처럼 그의 눈도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끔직하고 잔인해 보였다. 나는 가슴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오금이 저려 뒤로 물러나 지지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의 두 손이 우악스럽게 내 목을 옥죄어올 것만 같았다. {그건 제 책이에요. 언제든지 돌려받을 권리가 있어요.} 나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 {헌데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묻잖아?} {제발 이러지 말고 책이나 돌려줘요.} 나는 그를 밀쳐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으나 무슨 생각이 났는지 공중에서 손동작을 멈추었다. {당신은 요물이야! 책을 가지고 썩 꺼지라구!} 그는 더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는듯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는 서둘러 흩어진 책더미에서 '어두운 방'을 찾아냈다. 막 방을 빠져나오려는데 벽에 걸린 조그만 사각형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애라와 함께 미류나무 아래서 호수를 배경으로 찍은 칼라사진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장식물 가운데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사진 속의 애라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 옆에 약간 뻣뻣해 보이는 곽웅혁의 얼굴이 카메라렌즈를 향해 멋적은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과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그가 나를 외면한 채 피던 담배를 내동댕이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옥외 작업실 뒤에 설치된 점토를 굽는 가마가 있는 곳까지 갔다. 내용을 펼쳐 과연 미경이가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페이지가 찢겨졌는지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가마의 화덕에 장작개비를 쌓아올려 그 위에 석유를 골고루 뿌린 다음 성냥불을 그어댔다. 불은 석유의 힘을 빌어 금방 활활 타올랐다. 나는 주저없이 그 소설을 화덕에 집어던졌다. 책은 집어삼킬듯한 화염에 휩싸여 겉에서부터 타들어갔다. 테두리가 검게 변색되자 책은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한장 한장씩 벗겨져 나갔다. 활자가 진해지며 시야에 뚜렷하게 떠올라왔다. 나는 다시 석유통을 집어들어 호스를 통해 빠져나오는 석유줄기를 들이댔다. 화염은 화덕 바깥까지 빠져나와 뱀의 혀처럼 날름댔다. 소설책이 완전히 재로 화한 것을 확인한 나는 지체없이 그 길로 전남편의 사진관을 찾아가 1000W짜리 조명등 2개를 빌렸다. {이걸 또 어디에 쓰려는 거지?} 소영식은 4등분으로 해체된 조명기구들을 내 차의 뒷트렁크에 실어주며 물었다. {어디에 쓰든 당신은 상관말아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이걸 두 번 다시 빌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우이동집으로 돌아온 나는 조명기구들을 옥외 작업실 천정 한가운데 설치했다. 설치가 다 끝나고 스위치를 올렸을 때 빛이 작업실을 두루 환하게 밝힐 만큼 강렬한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날 밤 나는 영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와 오늘, 그는 몹시 낙심해 있었으나 나로서도 그를 위로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짤막한 편지를 남겨놓고 떠나갔다. ----전 이곳 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누님의 치료법에도 미경이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어진 상황에서 더 눌러앉아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나는 굳이 그를 찾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옥외 작업실을 청소하고 있는데 강 형사가 찾아왔다. {그냥 잠깐 집안을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는 별일이 아니라면서도 뭔가 아주 신중한 일을 앞둔 듯한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세요. 전 하던 일이 있어 마무리를 지어야겠어요.} 나는 허락을 하고 나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선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던 석고작품들이 습기를 먹지 않도록 한쪽에 평행선으로 나무깔개를 깔고 나란히 세워두었다. 의외로 작품이 많아 두상이 4개, 흉상이 8개, 전신을 본뜬 좌상과 와상 그리고 입상을 합쳐 9개나 되었다. 나는 작품에 쌓인 먼지를 일일이 털어낸 다음 작업실에서 당장 불필요한 집기들을 마당으로 내놓았다. 그러고 있는데 작업실 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 그곳으로 가보았다. 강 형사가 가마의 화덕 가까이 붙어앉아 뭔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벽돌이 들려 있었다. 내가 접근하는 소리를 듣고 그가 돌아다보았다. {이 붉은 벽돌들 언제부터 여기 있었죠?} 그가 말했다. {글쎄요, 한 3~4개월쯤요. 가마를 보수할 때 쓰다남은 벽돌이에요. 왜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특별한 건 아니오. 애라양의 방안에 있던 벽돌조각과 이것이 같은 게 아닐까 해서요.} {같다고 하면 무슨 실종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그냥 궁금해서.....애라의 방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강 형사는 10분쯤 후 2층에서 내려와 돌아갔다. 나는 다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점심을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고 나서 일을 마쳤을 때는 4시가 가까워 있었다. 파출부는 남편의 몸이 좋지 않다며 일찍 가겠다고 해서 보내주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작업실에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있는데 열린 문으로 곽웅혁이 들어왔다. 나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길래 얼떨결에 말했다. {커피가 고소한데 한 잔 드실래요?} {대체 그 아이는 어디로 간 거지?} 그는 다짜고짜 소리치며 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그 바람에 실내는 햇빛이 차단되며 어두워졌다. 이제 드넓은 작업실에 남향으로 난 조그마한 창으로만 햇빛이 비쳐들었기 때문에 그 빛을 등지고 서 있는 나로서는 그의 얼굴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뒤에 있는 형광등이나 켜고 말하세요.}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먼저 대답을 해! 그 아이는 어딨지?} {왜 자꾸 제가 애라를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당신 정말 미련한 사람이군요! 본 게 있으면 진작 털어놓지 그랬어요?} 나의 비아냥거림에 그는 어디 그래 볼까 하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사라진 날 난 새벽 1시경 집밖 골목에서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어. 우린 그날 줄행랑을 놓을 작정이었지. 그 아이는 내가 도망치자는 말에 기꺼이 동의했어. 당신이란 여자와 같이 살기가 지겨워졌다고 했지. 나야 인 형사가 당신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걸 안 이상 여기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지. 나는 그 자가 벌레처럼 싫으니까. 나는 그 아이보다 먼저 집을 빠져나가 차안에서 기다렸어. 기본적인 소지품 외에는 아예 내버릴 계산이었지. 야반도주의 댓가치고는 비싼 것두 아니었으니까. 헌데 그 아인 그게 아닌 것 같았어. 15분을 기다렸는데도 나오질 않았어. 나는 조바심이 났지만 도로 들어가기도 뭐해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검은 로얄살롱 하나가 집앞에 멈춰서더군. 처음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로얄살롱인지도 몰랐었지. 다만 수상쩍은 차가 집앞에 멈춰서길래 무심결에 그 차를 살피게 된 거지. 그 아이가 나올 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부터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초조함이 생겨났어. 그런데도 그 아인 영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연거푸 담배 3대가 재떨이에 쌓여갔지. 그런 기분을 더욱 자극한 것은 로얄살롱의 운전사가 이상하게도 차에서 내릴 조짐이 없다는 거였지. 마지막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는 순간이었어. 갑자기 대문의 보안등이 켜지는 거였지. 그러자 운전석의 사내는 그것이 무슨 신호인 것처럼 차에서 내리더군. 놀랍게도 비가 억수로 퍼붓는데도 우산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았지. 그런데 그 자가 집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먼저 뛰쳐나왔어. 그 사내는 일순 당황했지만 재빨리 사태를 간파한듯 뛰어나온 사람을 차에 태워 떠나는 거야. 한 템포 늦게서야 나는 깜짝 놀라 그 사람이 그 아이라고 생각했지. 부랴부랴 시동을 걸고 전조등을 켠 후 로얄살롱을 따라갔어. 차간거리가 최대한 가까워졌을 때 우선 급한대로 차넘버를 적어두었지. 그러나 놈의 운전솜씨가 워낙 뛰어났기에 끝내 차를 놓쳐버리고 말았어. 나는 한동안 차를 놓친 곳 일대를 빙빙 돌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왔지. 그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더니 싸다만 여행가방만 덩그렇게 놓인 채 짐작대로 역시 그 아이는 없더군. 나는 로얄살롱을 타고 온 사내가 당신과 내통을 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당신에게 대놓고 따져물을 수는 없었지. 당신 성격이라면 끝까지 잡아뗄 게 뻔했으니까. 그 다음날 나는 당장 차넘버를 조회해 구로동 소재의 H렌트카 회사 소유라는 것은 알았지만, 더 이상 추적을 할 순 없었지. 그 자가 쓴 서류는 모두 거짓이었으니까.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당신과 담판을 짓지 않고는 그 아이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 하지만 무작정 당신을 다그치다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그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는 불상사를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오늘 그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소식이라뇨?} {미경이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났더군.} {그래서요?} 나는 그의 얘기에 흥미진진함을 느꼈다. {그날 밤 집을 뛰쳐나온 사람은 그 아이가 아니었어. 나는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미경이가 같이 실종된 것을 알면서도 한 번도 사람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거야.} {그럼 그 사람이 미경이었단 말인가요?} {물론이야. 그 놈의 짓궂은 날씨 때문에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던 거지.} {정말 재밌는 시나리오군요. 제게 말한 것을 그대로 원고지에 옮겨 영화진흥공사에 응모라도 해보지 그러세요?} {날 더 이상 자극하지 말고 모든 걸 털어놔.} 그는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바본 줄 알아요?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을 두 명씩이나 납치해서 어디다 쓰게요?} {그야 낸들 알 수 없지. 그러나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제발 이러지 말아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난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 {당신은 미쳤어요!} 그 순간 그의 손이 내 목을 옥죄어왔다. {아, 안돼요! 지금은......} 내 목소리는 신음처럼 입안을 맴돌다 사그라들었다. 그의 억센 손은 내 편도선 부위을 꽉 누르며 숨통을 조였다. 시야가 가물거렸다.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귀가 웅웅거려 잘 들리지가 않았다. 땀이 배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윤곽이 점점 희미해져 마침내 배경과 하나가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더듬어 아무 거나 움켜잡으려고 애썼다. 뭔가를 건드렸다고 느끼는 순간 목울대를 부풀렸던 통증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나는 한 가닥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고통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느낄 수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뒤 눈을 뜨자 조명등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그의 얼굴이 아직 내 코앞에 있었다. 허우적대던 내 몸뚱이의 어느 부분이 책상에 설치한 스위치를 누르자 갑자기 조명등이 켜지면서 당황한 그가 조르던 손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바로 그 놈이었군!} 그는 내뱉듯 말했다. {......} 나는 사지에 맥이 풀려 대꾸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번에 실내 작업실에 조명등을 설치했던 당신의 전남편 말야. 미경이을 데리고 간 로얄살롱의 운전사는 바로 그 녀석이었어!} {제, 제발요......저를 내버려둬요.} 잠시 혼곤해진 의식을 가다듬는 사이 나는 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의자를 찾아 앉아 호흡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목을 어루만지자 아직 악력의 여운이 남아 피부가 두 겹이 된 듯이 얼얼했다. 5분쯤 지나서야 어느 정도 원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작업실을 빠져나와 집안의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시 엎어지듯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악몽을 꾼 후처럼 기분이 얼떨떨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얼마간 그대로 누워 정신과 육체 모두를 가능한 한 이완시키려고 노력했다. 잠에 푹 빠져든 것은 아니었으나 반수면 상태인 것은 분명했다. 나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는데 그때까지 나는 소파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수화기를 집어들자 나라는 것을 확인한 상대는 가까스로 토해내는 듯한 소리를 냈다. {과, 곽웅혁이란 작자가 다녀갔어. 옆구리와 하벅지에 드라이버를 두 개나 박고 갔어. 그렇게 잔인한 놈은 처음이야. 추, 출혈이 심해......} {다 말했나요?} {내, 내가 아는 건 모두......으윽......어, 어쩔 수가 없었어. 30분안에 당신에게 갈 거야......다, 당신은 누구야?}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그래요?} {어떤 놈이 또 들어왔어. 소, 손님이 아닌 것 같아......} {누군데요?} {모, 모르겠어.} {어쨌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요.} {여보세요?} 별안간 목소리가 바뀌었다.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거기 누구죠?} 그렇게 말을 붙여 나의 신분을 알아내려는 사람은 다름아닌 인 동하 형사였다. 나는 대꾸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목욕탕으로 가 옷을 벗고 샤워기의 물줄기에 몸을 내맡겼다. 살갗이 익을 정도의 뜨거운 물에 온몸의 구석구석을 씻어냈다. 샤워가 끝난 후 나는 대형 타월로 전신을 감싼 채 주방에서 먹다남은 양주 한 병을 찾아 들고 옥외 작업실로 갔다. 나는 스코트랜드산 순수 몰트 위스키 그렌 터너를 커피잔에 가득 따라 쭉 들이켰다. 식도가 타는듯 하더니 콧김이 사나와졌다. 그에 개의치않고 반잔을 더 마신 뒤 나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곽웅혁을 기다렸다. 곧 그가 나타났다. 그는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걸어와서 우뚝 멈춰섰다. {그 아이는 어딨지?} {전남편이 말하지 않던가요?}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내놔......그러면 모든 걸 덮어두겠어.} 그는 내 앞에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서 의자손걸이에 손을 가져왔다.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이제 옴싹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애란 없어요.} {없다니?} {술 한 잔 드시지 않겠어요?} 내가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만 비틀어 술을 따르려 하자 그는 내 어깨를 거칠게 돌려잡았다. {날 속이려 들지마! 난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어.} {당신이 제 전남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알아요. 그리고 저에게도 충분히 그 이상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것두요.} 그 냉정한 대꾸로써 살기등등한 그의 기세를 잠재우며 나는 기어이 커피잔에 술을 따르어 그에게 건네었다.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킨 다음 잔을 집어던졌다. {자, 어서 말해봐.} {성급하게 굴지 말아요. 그런다고 애라가 살아 돌아오진 않아요.} {지, 지금 뭐라고 했지?}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애란 죽었어요.} {서, 설마......당신 날 놀리려고 장난을 치는 거지?}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내 눈빛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나약해지지 말아요. 당신은 그 죽음의 현실을 당당히 받아들여야만 해요.} {난 믿을 수가 없어. 그 아이는 결코 죽지 않아!} {부정한대도 소용없어요. 그건 이제 변할 수가 없는 사실이에요.} {당신이 죽였나?} 마침내 그는 부정하고 싶은 욕구을 억누르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무 죄도 없는 애라를 죽였지?} 의자손걸이를 잡은 그의 손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신을 보낼 수가 없었어요. 전 미경이를 통해 애라가 곧 떠날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됐어요. 애라가 떠나면 당신도 떠날 거구요.} {날 사랑하나?} 그는 절망적으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애라를 죽여서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텐데?} {그렇진 않아요. 제가 원하는 건......} 나는 치밀어오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주저하지? 두려운가?} {두려워요. 하지만 그건 절 굉장히 흥분시키는 일이기도 해요.} {성적으로?} {......}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알 수가 없군. 대체 당신은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제가 애라를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원하는 게 뭐냐니까?} 내가 말을 돌리자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 뒤를 봐요!} 나는 그가 윽박지르는 것에 개의치않고 말했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사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얼른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는 내가 밖으로 달아나려는 줄 알고 잽싸게 문쪽을 가로막아섰다. {날 놀렸군!} {당신을 놀린 게 아니에요. 저기 애라가 있잖아요.} 나는 석고상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얕은 수작하지마! 또 그 옷차림꼴은 뭐지?} 나는 석고상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가장 앞쪽에 배치된 좌상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앉아 있는 여자가 의자와 한덩이가 된 작품으로 손질이 덜 된데다 윤곽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아주 조잡해 보였다. 곽웅혁은 멍하니 나를 지켜보다가 뭔가 확 터지듯 안색이 변하며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석고상을 그에게 양보하며 책상쪽으로 움직였다. 퍽하고 박살이 나는 소리에 뒤미처 포효하는 짐승같은 괴성과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곽웅혁의 발밑에는 깨어져 흩어진 석고조각들 사이로 애라의 머리와 팔목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조명등의 스위치를 켰다. 천정에서 2000W 용량의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당신이 원한 게 바로 이것이었나?} 그가 돌아서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몸을 감싸고 있던 타월의 매듭을 풀었다. 타월이 스르르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자 내 알몸은 골고루 빛의 축복을 받았다. 나는 빛이 좀더 강렬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애를 태웠다. '좀더......좀더 세게......더 세게.......' 그 순간 그는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방어자세를 취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목이 졸리며 금방 숨이 막혔다.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아버지의 아뜰리에가 떠올랐다. 헤르메스 흉상과 라보르트 두상 그리고 오른 쪽 젖가슴을 드러낸 그리이스 부인 같은 석고상이 가득 들어찬 작업실의 마루바닥은 갖가지 색의 유화물감으로 더럽혀져 있고, 폐품처럼 쌓여 올라간 마루리가 덜 된 캔버스들, 겨울이면 언제나 장잦 타는 냄새와 물끓는 주전자 소리----. 그러나 그 무엇보다 늘씬한 팔등신 누드걸들이 사계절 끊이지 않고 득실거리던 곳! 나는 문틈을 통해 때론 창밑에 받침대를 고이고 올라가 벌거벗은 여인들이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아버지 앞에서 알몸을 뒤틀며 포즈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훔쳐보고 싶은 욕구가 못말리게 나를 충동질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런 날 밤이면 나도 누드모델이 되어 화가들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는 공상에 젖어들곤 했다. 하루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여러 화가들 앞에서 누드모델이 되어야 했던 어머니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움직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다그침! 어머니의 나체를 바라보는 탐욕스런 시선들! 나는 나 자신이 아버지와 동료 화가들 앞에서 벌거벗기운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묘한 쾌감을 자극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 내내 어머니의 침실에서는 흐느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만나는 것도 거부했다. 그 흐느낌은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동맥을 면도날로 끊은 시체로 발견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아버지가 내 누드를 그리고 있다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내가 들은 것은 내 인생의 셔터가 쿵하고 내려닫히는 소리였다. 11. 에필로그 ...지난 10월 2일 우이동 소재 임동석 화백 자택의 옥외 작업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윤곽이 밝혀졌다. 범인은 전직 '로이드 의료원' 정신과의사 곽웅혁(39)으로 현장에 긴급 출동한 인동하 형사에 의해 체포되어 관할 경찰서로 넘겨졌다. 현장에는 곽웅혁에 의해 살해된 임유진씨(32세, 임동석 화백의 외동딸) 말고도 동거인 윤애라씨(21세)의 시체도 발견되었는데, 그녀는 앞서 임유진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한편, 경찰은 임유진의 전남편인 소영식씨가 복잡미묘한 이 사건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고 병원에 입원가료중인 그가 회복하는대로 연행 조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Y일보) 그로부터 닷새 후 H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소영식씨(36세)는 자신의 전부인인 임유진의 사주를 받아 지난 9월말 행주대교 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전미경씨(23세)를 살해한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밝혀졌다. 경찰은 그의 사진관을 수색해 습판사진의 정착에 사용하는 청산가리와 43페이지가 찢겨나간 V.나보코프의 '어두운 방(camera obskura)'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소설은 죽은 전미경씨의 움켜쥔 손에서 나온 종이쪼가리의 모본(母本)인 것이 최종 확인되었다. 한편, 윤애라씨를 부검한 결과 그녀는 뒷통수를 붉은 벽돌(윤애라씨의 방에서 나온 붉은 벽돌조각에서 그녀의 피와 동일한 B형의 혈액형이 검출되었다)에 얻어맞아 살해된 다음 의자에 앉혀진 자세로 전신에 석고가 입혀져 옥외 작업실에 보관되어 왔던 것으로 경찰은 결론지었다...... 그러고도 이번 살인사건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 주요일간지들은 연일 떠들썩하게 사회면의 톱기사로 다루었다. 그러던 중 한 무명기자의 추적에 의해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밝혀졌다. 남미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던 임동석 화백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파리에 있던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가 서울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더불어 소영식이 범행을 돕는 조건으로 임유진에게 받기로 한 금액이 10억인 것으로 알려져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세상의 관심이 풍성한 가십거리에 쏠려 있는 사이 인 형사는 임유진이 왜 하필 그런 어리석은 방식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렸을까 하는 데 골몰했다. 그로서는 그녀의 덕을 톡톡히 입은 셈이었다. 그녀가 무모한 죽음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곽웅혁을 현장에서 잡아넣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곽웅혁이 세상빛을 오래도록 보지 못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웬지 개운찮은 뒷맛이 남았다. 그런 허전함은 그가 애라와 미경이가 실종되었을 때 대뜸 곽웅혁의 소행으로 본 판단착오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때 성급한 실수만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는 미경이가 청산가리에 중독된 타살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범행수법의 상이함에 주목했어야 했다. 헌데 곽웅혁의 잔인한 과거에만 집착한 나머지 어처구니게도 임유진이 미경이를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도외시했었다. 그 점은 강 형사가 아니었더라면 상당 부분 수사의 공백이 생겼을 터였다. 수사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강 형사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의 충고를 받아들였더라면 어리석은 판단을 일찌감치 뉘우칠 수가 있었을 텐데......} {무슨 겸손의 소린가? 자네야말로 이번 사건의 공로자지. 자네가 곽웅혁을 집요하게 미행해 소영식의 사진관을 알아내고 또 곧바로 우이동집으로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그를 어떻게 잡았겠나?} {과찬일세. 내 행동은 결과에는 유익했지만 초동수사의 결과를 무시하는 바람에 모든 게 우연의 혜택을 입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걸세. 헌데 애라의 방에서 나온 붉은 벽돌조각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사실은 미리 좀 귀띔을 해주지 그랬나?} {귀띔을 해주려고는 했지. 헌데 자네가 워낙 바쁘게 돌아다녀 오히려 성가심만 줄 것 같아 그만두었네.} {듣기로는 임유진도 나보코프의 소설을 갖고 있었다던데 그건 무슨 소리지?} 인 형사는 관할구역 문제도 있고 해서 임유진이 저지른 살인건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는 관계하지 않고 있었다. {곽웅혁을 추궁하던 중에 나온 얘기야. 중요한 건 아니구. 우연히도 임유진과 소영식 둘 모두 그 책을 갖고 있었던가봐. 원래 그 책의 원제인 카메라 옵스쿠라가 우리가 쓰는 사진기의 어원이라고 하더군. 사진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소영식은 그 책을 최근에 구입했던 모양이야.} {최근에?} {작년인가 MBC에서 그 소설을 가지고 미니시리즈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책을 접하게 되었다더군. 나도 그 드라마를 드문드문 봤는데 이미연이란 탈렌트 정말 예쁘더군. 권인하란 가수도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겼구.} {싱거운 소리! 헌데 임유진의 소지품에서는 그 소설책이 없었다며?} {그게 이상해. 어쩌면 곽웅혁 그놈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구. 어쨌든 소영식의 사진관에서 찢어진 소설책이 나왔으니 굳이 찾아낼 필요가 없었지.} 그것에 관해서 인 형사는 곽웅혁을 따로 만나 약간의 보충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모든 걸 체념했는지 순순히 질문에 응해 주었다. {그 여자가 빌려줬던 소설책을 난 분명히 돌려줬소.} {헌데 소지품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던데?} {그야 낸들 어떻게 알겠소? 그 여자가 책을 없애버렸다면 그건 아마 내가 미경이를 죽인 범인으로 몰릴까봐 그랬을 거요.} {당신에게 의심이 돌려지면 그녀에겐 더 유리했을 텐데?} {그건 그렇지가 않소. 그녀는 내가 자기를 죽여주기를 바랐던 거요. 그 동안 내가 붙들려 가는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거요.} {강 형사앞에서는 그런 진술을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들은 내가 임유진을 죽인 것에만 관심이 있지 그 죽음이 임유진이 스스로 택한 길이라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오.} {그럼 임유진은 당신이 죽여주기를 원했다는 말인가?} {그렇소.} {그녀가 왜 그런 욕구를 품었다고 생각하지?} {아마 아버지 때문이었을 거요.} {아버지?} {그녀의 말로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자살했다고 했소.} {아버지를 증오했다는 말인가?} {그렇소.} {그것과 당신 손에 죽기를 원하는 욕구와 무슨 관계가 있지?} {자세한 건 나도 모르오. 다만......} 그는 거기서 잠시 주저했다가 얘기했다. {그녀에겐 노출증이 있었소.} {그녀가 죽을 때 나체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나?} {그렇소. 노출증이란 기본적으로 자기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충동인데, 그 이면에는 깊은 잠재의식 속에 공포의 감정을 숨기고 있는 행위오.} {공포?} {그렇소.} {임유진이 공포를 느꼈단 말인가?} {추측컨대 그녀의 공포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을 거요.} {왜 아버지에게 공포를 느끼지?} {어머니가 죽은 것은 아버지였기 때문인데 이번엔 아버지가 자신마저 죽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을 거요.} {설명이 미흡하군. 그 때문에 당신 손에 죽기를 원했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 정 죽기가 소원이라면 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앞서 얘기했지만 나로서도 정확한 건 알 수가 없소. 그녀가 자살에 대한 종교적인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도......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녀는 자살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또한 사랑했을 거요. 그래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한편으로 스스로 누드모델이 되어 아버지 앞에서 옷을 벗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던 거요.} {무슨 근거루다 그런 해석을 내릴 수 있지?} {나보코프의 소설에 3류 화가로 나오는 아버지와 누드모델이기도 했던 여주인공 마고트의 관계가 그걸 암시해 준다고 믿고 있소. 게다가 그녀는 알몸인 채 그 아이와 나로 하여금 자신의 누드를 그리기를 강요했소.} 곽웅혁은 인 형사에게 있었던 일을 낱낱히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화가로서 3류인 것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반영하는 것이오. 하지만 현실은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분이니까 그 증오심은 더욱 커졌을 거요.} {하지만 죽고 싶어 하는 욕구는 여전히 의문이지 않나?} {그녀가 죽고 싶어한 이유는 적어도 심리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일 거요. 아마도 그것이 무의식 속에서 죄의식을 싹틔워 자신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거요. 무의식 속에서는 살해에의 욕구와 살인은 심리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지니는 것이니까요.} {당신의 이론이 맞다면 그 결과로 임유진이 자살을 해야 했지 않겠소?} {굳이 설명을 원한다면 자신은 없지만 난 이렇게 해석하고 싶소. 그녀는 내가 아는 한 마조키스트였소.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느꼈던 거요.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소. 난 그녀가 숭고의 경지에 도달한 그리이스의 누드작품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내가 조사한 바로는 <숭고의 미학> 자체가 마조키스트의 미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오. 선행하는 불쾌의 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뒤에 따라오는 쾌(快)가 크다는 것이 숭고감정의 일반적인 특징이니까요. 그녀는 그래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포효하는 바다 같은 이미지에도 심취해 있었죠. 하지만 그녀가 마조키스트라고 결정적으로 판단한 것은 역시 그녀의 노출증 때문이었소. 피학적 만족감은 본래 노출증에 의존하는 감정이기도 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녀는 죽임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꼈을 거란 말이오?} {그렇소. 그리고 죽는 순간 그녀는 나를 아버지로 착각했을 거요.} {그건 무슨 뜻이죠?} {그녀는 아버지에게 공포를 느꼈고 그 공포의 감정은 동시에 색욕화(erotise) 되었을 거란 뜻이오.} {성적으로 왜곡돼 있단 말인가?} {그렇소. 그녀는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늘 새로운 욕망을 추구해 왔다고 했소. 일상의 권태와 무료를 떨치기 위해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참신한 욕망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소. 결국 그 새로운 욕망이란 피살되고 싶은 욕망외에 다름이 아닌 것이오.} {피살되고 싶은 욕망?} {그에 상응하는 쾌감만 수반된다면 마조키스트의 궁극의 목표겠죠. 더구나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심리적으로 그건 현실에서 죽인 것과 동일한 것이니까요---- 댓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것은 마치 자위행위를 하고 싶지만 남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과 같은 의미요.} {그럼 그녀에게 있어 빛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소?} {글쎄요. 어쩌면......} 그는 자신이 없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녀 자신을 육체적 숙명에서 해방시켜준 구원의 상징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곽웅혁을 만남으로써 인 형사가 임유진에 대해 품고 있던 의문은 나름의 해석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죽은 이상 과연 그런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인 형사는 곽웅혁의 해석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한편, 곽웅혁의 신병이 검찰에 인도되고 기소가 준비되는 동안에도 임 동석 화백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행방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는 당장 재산보전 문제로 경찰이 골치를 앓게 되었기 때문이다. 임유진의 생모와 관련이 있는 친척들은 한결같이 나서기를 거절했고 몇 안되는 임 화백의 친척들은 모두 미국 LA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져 우이동집을 관리하는 것도 법원의 허가를 얻은 경찰이 떠맡은 처지였다. 곽웅혁이 기소되기 전날 인 형사와 강 형사는 만감의 교차를 느끼면서 우연찮게 우이동집엘 들렸다.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 집안은 벌써 폐가가 된듯이 을씨년스러웠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잔디는 누렇게 변색돼 있었고 건물의 창문과 출입구는 일절 두꺼운 나무판자로 때려박아 폐쇄했기 때문에 살풍경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잔디밭의 양지에 깔개도 없이 주저앉아 따스한 햇볕을 쬐며 생각나는대로 얘기했다. {소영식이 맡은 임무는 원래 임유진이 죽인 윤애라의 시체를 여기서 밖으로 내가는 것이었다더군. 집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대문의 보안등이 켜지면 안으로 들어와 그 작업을 하기로 했었는데, 누군가가 느닷없이 문밖으로 뛰쳐나오길래 순간적으로 임유진이 윤애라를 죽이는데 실패했다고 직감하고 무조건 그 아가씨를 차에 태워 출발했다더군. 미경이로서는 구원자가 나타났으니 공범자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차에 올라탔을 수밖에...... 나중에 임유진에게 듣기로는 미경이가 애라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다 들켜 바로 집밖으로 도망쳐나갔다더군. 그때 임유진은 대문의 보안등을 켬로써 그에게 신호를 보낸 거지. 어쨌든 소영식은 미경이를 일단 사진관으로 데려간 다음 임유진과 통화를 해서 그녀를 죽이기로 합의를 본 거지. 마침 그때 녀석은 '어두운 방'을 읽고 있었다나봐. 오렌지주스에 청산가리를 타먹였는데, 미경이가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커텐 뒤에 숨어 있었다더군. 공교롭게도 그때 미경이의 손에 그 책의 43페이지가 쥐어졌던 거지. 녀석이 그 이후로 그 책을 읽었다면 그걸 없애버렸겠지만 사람을 죽인 후라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혔던 게지.} 강 형사는 말을 마치며 인 형사에게 물었다. {곽웅혁 그 자가 윤애라를 사랑했다던데?} {글쎄, 난 그 자가 누구든 사랑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아.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해. 만약 그가 진짜 윤애라를 사랑했다면 그 열정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임유진의 목에 난 수적(手迹)의 강렬함에 비례한다고 생각해. 임유진은 목이 부러져 숨진 거니까.} {임유진이 심리적으로 아버지를 죽였다고 믿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강 형사는 인 형사로부터 곽웅혁이 그런 해석을 내리더라는 말을 듣고난 뒤부터 줄곧 의심을 품어왔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곽웅혁 그 자가 오랫동안 정신과의사 생활을 했고 또 심리학을 얼마나 공부했는지는 몰라도 임유진도 결국은 한국인이야. 무조건 프로이드의 이론에 꿰어맞춰 해석하는 건 너무 학문에만 치우친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어. 프로이드가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빅토리아 왕조 때의 유럽인들이야. 자네도 강력계에 몸담고 있어 잘 알겠지만, 우리네식의 살인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복잡미묘한 심리의 갈등 같은 게 있나? 그저 욱해서 저지르는 것들이지.} 그때였다. 담벼락을 타고 내려온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재빨리 정원을 가로질러 옥외 작업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 벌어진 문틈새로 사라졌다. {저긴 폐쇄를 안 했나?} 인 형사가 말했다.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라 담당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다 보니 시기를 놓친 거야. 나중에라도 폐쇄를 했어야 하는데 귀중품도 없는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둔 걸세.} {잠깐 저리로 가볼까?} 인 형사는 일어나 엉덩이에 붙은 잔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강 형사는 담배를 태워 물며 인 형사를 따라갔다. 작업실안은 어디든지 뒤엉긴 먼지가 수북했다. 형광등빛에 반사된 먼지들은 허옇게 덩어리가 져 마치 솜을 뜯어놓은 것 같았다. 바닥에는 스프레이로 시체가 누워있던 곳을 표시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발소리를 내자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도둑고양이의 보금자리치고는 안성마춤이군. 비바람도 피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이나 죽어나갔으니 방해꾼도 없을 테고.} 인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강 형사에게 담배를 요구했다. 강 형사는 라이터불을 들이밀며, {저 석고상들 속에도 혹시 사람이 들어앉아 있지 않을까?} {이 사람, 끔찍한 농담은 말게나. 난 제법 무서움을 타는 편일세.} 인 형사는 연기를 내뱉으며 엄살을 떨다가 문득 몸동작을 멈추며 석고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인 형사, 왜 그래?} 강 형사는 인 형사의 돌연한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석고상들은 다 점검해 보았나?} 인 형사는 석고상앞에서 돌아서서 물었다. {그걸 점검할 필요가 뭐 있나? 사람수가 맞는데.} {그야 임동석 화백이 남미여행중이라고 믿고 있을 때의 얘기지.} {서, 설마......임 화백은 임유진의 친아버지야.} {미묘한 심리적 갈등이란 건 믿을 수 없고 살인은 욱해서 저질러진다고 방금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뭐든 쇠붙이 같은 것을 좀 갖다주게.} {자네, 미쳤군! 이건 법적으로 보호된 재산이야. 때려부수면 문책을 당한다구.} {내가 책임질 테니 자넨 못본 걸로 하라구.} 그러며 인 형사는 바닥을 이리저리 훑고 다녔다. 이윽고 그는 구석에서 큼직한 쇠뭉치를 줏어왔다. 깊이 박힌 대못을 뺄 때 사용하는 빠루였다. 그가 주저없이 석고입상 하나를 내려치자 상체가 완전히 날아가버리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강 형사가 다시 걱정이 되는지 만류했다. {이봐, 농담을 한 것 같구 왜 그래? 그것들을 다 날려버려야 속이 시원해지겠나?} 인 형사도 그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여 빠루를 건네주고는 남은 7개의 전신상의 먼지를 하나씩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무심코 와상의 얼굴에 머물렀다. 인간의 고뇌를 표현한 듯한 그 와상은 아주 고통스런 몸짓을 하며 누워 있었다. 왼팔은 구부정하게 허리에 붙어 있었으나 오른 팔은 허우적대며 허공을 휘젖는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여기저기 시멘트를 발라 여러 번 보수를 한 흔적이 역력했다. 인 형사는 와상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들어보았다. 굉장한 무게였다. 여느 석고상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정말 이상하군.} 인 형사는 잔뜩 긴장한 낯빛으로 강 형사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무거운가?} 그를 지켜보던 강 형사가 의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 인 형사는 강 형사의 손에 쥐어져 있던 빠루를 뺏아들어 석고상의 어깨 부분을 내리쳤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석고와 한덩어리가 된 붉은 섬유가 드러났다. {사, 사람이야!} 두 형사의 얼굴은 경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사흘 후 석고와 시멘트로 밀봉된 시체의 신원은 예상대로 임동석 화백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그가 오른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가 결정적 단서였다. 그것은 파리주재 한국예술가협회의 창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반지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완벽한 밀봉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극심한 부패로 인해---- 감식반원은 석고의 습기가 빨려들면서 부패가 촉진된 것으로 보았다----변사체의 사망시간을 추정해내기란 불가능했다. 다만 여러 정황증거----임유진이 영구 귀국한 것은 작년 가을이었지만 그 두 달 전에 꽤 여러 번 서울과 파리를 왕복한 것으로 조사됐는데, 그 시기에 임화백도 파리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치르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임유진이 남미여행을 떠났다고 말을 하고 다녔으므로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로 보아 사망시기는 1년전쯤으로 추측되었다. 또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인마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부식이 덜한 신체 각 부위의 뼈와 두개골에 외상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반면, 기도 폐 위장 대소창자 콩팥등의 내장은 부식이 심해 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자 경찰내에서는 임화백의 죽음을 두고 논란이 오갔다. {천인공노할 범죄야!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지난 10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질되고 타락했다니! 딸이 어떻게 아버질 죽일 수가 있어? 아무리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자살했다고 해도 그렇지!} {잔인한 아가씨야!} {이거 딸 둔 아버지 오늘부터 몸조심해야겠는걸!} 그렇게 임유진이 극악무도한 범인임을 단정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어. 그 어디에도 임유진이 아버질 살해했다는 증거는 없어. 속단들 하지 말라구. 그 여잔 그냥 미친 거라구! 병으로 죽은 아버지를 석고로 밀봉했을 수도 있어.} {무조건 악독한 존속살해범으로 몰아세우는 건 온당치 않아!} {잔인한 여자인 건 부인 할 수 없지만 동정을 받을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냐! 아버지에게 물려받을 수 있는 재산이 백억대를 넘는다던데 왜 그걸 마다하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녔겠어? 결국 심리가 일그러진 불쌍한 청춘이었던 거야!} 인 형사는 팽팽한 의견대립의 가운데서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존속살해의 가부(可否)는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곽웅혁의 해석이 옳다면 임유진은 이미 심리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던가? 인 형사는 곽웅혁과 임유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새삼 인간이 무엇인가를 반성했다. 1심의 선고형량(사형)에 불복한 곽웅혁의 상고심이 서초동 법원에서 있기 전날 그는 이번 사건을 접하고 나서 마치 권위 있는 심리학자나 된양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끄적거려 놓았다. ----그 천부(天賦)의 성격상, 좀처럼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뭐든지 건전하게 욕구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끝내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거나 타인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심리학의 근본문제다 大尾